92세 현역 지휘자의 브람스 교향곡 1번
오페라 스타 알라냐 부부의 ‘오텔로’
프리츠커상 수상자의 ‘필하모니 드 파리’…
2015년 1월 파리 외곽 라 빌레트 공원에 들어선 필하모니 드 파리 콘서트홀 내부. 파리 오케스트라와 일드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등이 상주단체로 있다. ⓒphoto W. Beaucardet
2015년 1월 파리 외곽 라 빌레트 공원에 들어선 필하모니 드 파리 콘서트홀 내부. 파리 오케스트라와 일드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등이 상주단체로 있다. ⓒphoto W. Beaucardet

은발의 지휘자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살짝 굽은 어깨에 굵고 흰 눈썹이 유난히 돋보였다. 지난 3월 13일 밤 파리 외곽 콘서트홀 필하모니 드 파리. 프랑스 제1의 교향악단 파리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렸다. 레퍼토리는 멘델스존 피아노협주곡 1번과 브람스 교향곡 1번. 독일 피아니스트 마르틴 헬름헨은 고난도 멘델스존 협주곡을 능숙하게 연주했다. 지휘자는 피아니스트의 다이내믹한 연주가 돋보이게 오케스트라를 솜씨 좋게 이끌었다. 휴식에 이은 브람스 교향곡 1번도 직접 들은 실연(實演) 중 손꼽을 만한 명연주였다. 호른으로 시작해 금관이 총출동하는 피날레는 베토벤 교향곡 ‘합창’처럼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빚어냈다. 이날 티켓값은 10~50유로. 최고가석에서 6만5000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이런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파리 시민들이 부러웠다.

현역 최고령 지휘자 블롬슈테트

이날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한 노(老)신사는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Herbert Blomstedt). 1927년생으로 올해 아흔둘이다. 스웨덴계 미국인인 블롬슈테트는 세계적 지휘자 중 현역 최고령이다. 지휘자 겸 작곡가 앙드레 프레빈은 지난 2월 90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떴고, 볼쇼이극장 수석 지휘자를 지낸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는 지난해 87세로 숨졌다. 영화 ‘아마데우스’로 유명한 네빌 마리너도 2016년 92세로 별세했다. 구순을 넘기고 지휘자로 활동 중인 이는 두 살 아래인 네덜란드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정도다. 하이팅크는 올 들어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와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런던 심포니를 지휘했고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 필하모닉도 지휘한다. 2012년 1월 뮌헨 가스타익홀에서 들었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이끈 하이팅크의 브루크너 4번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브루크너 하면 떠오르는 무겁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단숨에 허물어뜨린 연주였다.

블롬슈테트는 2016년 10월 독일 밤베르크 교향악단을 이끌고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의 첫 내한 연주였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이틀에 걸쳐 베토벤 교향곡 5번과 6번, 슈베르트 교향곡 7번(미완성)과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연주했다. 첫날 들은 베토벤 교향곡만으로도 블롬슈테트의 명성과 밤베르크 교향악단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토벤·멘델스존 같은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과 시벨리우스·닐센 같은 북유럽 작곡가에 정통한 블롬슈테트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북독일 교향악단(NDR) 등의 음악감독,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구순을 넘겼지만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NHK 심포니 계관명예지휘자이고 밤베르크 교향악단,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덴마크 국립교향악단, 스웨덴 방송교향악단 명예지휘자로 있으면서 정기적으로 지휘하고 있다.

92세 블롬슈테트의 오케스트라 연주 못잖게 부러웠던 건 2015년 1월 파리 외곽에 들어선 필하모니 드 파리였다. ‘건축계 노벨상’ 프리츠커상 수상자(2008년)인 장 누벨이 설계한 콘서트홀 내부는 물결치듯 곡선이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도 리듬감이 넘쳤다.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의 이름을 딴 메인홀은 2400석으로 파리에서 가장 큰 콘서트홀이지만 지휘자와 청중 간의 거리가 최대 32m밖에 안 될 만큼 객석과 무대를 가깝게 배치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소리가 객석 모퉁이에서도 명료하게 들릴 만큼 만족스러운 음향이었다. 시(市) 외곽 도축시설이 있던 곳을 공원으로 재개발하면서 들어선 콘서트홀로 도심에서 멀다는 불평도 나온다. 하지만 메트로 5호선 포르테 드 팡탕 역이 코앞에 있어 20분 안팎이면 도심에서 접근할 수 있다. 숙소 근처인 오베르캄프 역에선 꼭 16분 걸렸다. 저녁 공연에 맞춰 광화문에서 서초동 예술의전당까지 가려면 1시간은 잡아야 하는 우리 현실에선 배부른 소리 같다.

파리 오케스트라 연주의 감동이 오래 남아 이틀 뒤 다시 찾았다. 필하모니 드 파리 산하 일드 프랑스 국립 교향악단의 시네마 콘서트였다.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나온 말러 교향곡 5번이 프로그램이었다. 티켓값도 10유로부터 최고 30유로라서 그런지 일찌감치 매진이었다. 연주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좋았다.

92세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photo Martin U.K. Lengemann
92세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photo Martin U.K. Lengemann

발레리나 박세은의 ‘백조의 호수’

파리는 오페라와 발레로 이름난 도시다. 마침 바스티유극장에선 파리오페라발레단 제1무용수인 박세은(30)이 나선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와, 세계적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56)와 폴란드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쿠르작(42) 부부가 남녀 주역으로 출연한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가 공연 중이었다. ‘백조의 호수’는 소련에서 망명한 무용수 누레예프가 1984년 파리오페라발레단을 위해 재안무한 이 발레단의 대표작.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지난 2월 19일부터 3월 19일까지 ‘백조의 호수’를 20차례 공연했다. 그래도 티켓이 일찌감치 동났다. 박세은은 3월 5일과 8일, 11일 세 차례 ‘백조의 호수’ 주인공 오데트로 나섰다. 파리에서 만난 박세은은 “오데트 역은 발레단 최고 무용수 격인 에트왈만 맡는다”고 했다. 파리발레단 발레리나 중 에트왈은 10명. 에트왈이 다치거나 출산 등의 사정으로 공연할 수 없으면 제1무용수나 솔리스트인 쉬제까지 캐스팅된다는 것이다.

박세은은 당초 3인무로만 캐스팅됐다. 모두 8번 예정이었다. 1막 지그프리트 왕자의 생일 축하연 때 10분 남짓 출연하는 비중 있는 배역이긴 했다. 개막 2주 전 발레단에서 박세은에게 연락했다. 오데트로 서달라는 주문이었다. 박세은은 쉬제이던 2015년 전격 발탁돼 세 차례 오데트를 춘 적이 있다. 창단 350년 역사의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황색 피부의 동양인이 ‘백조’를 맡은 건 그가 사실상 처음이다. 그때는 일본계 뉴질랜드인 한나 오닐과 함께 오데트로 데뷔했다. 이번엔 한나 오닐은 3인무만 나서고, 박세은만 오데트에 캐스팅됐다. 일정 때문에 박세은의 오데트는 아깝게 놓쳤다. 하지만 3월 14일 박세은이 3인무로 나선 ‘백조의 호수’는 볼 수 있었다. 지휘자 바로 뒤 1열 가운데 자리였다. 10분 남짓 출연했지만 박세은은 압권이었다. 여유 있는 도약과 자신감 넘치는 회전은 다른 무용수보다 한 수 위였다. 박세은의 오데트를 놓친 게 두고두고 아까울 것 같았다. ‘백조의 호수’ 압권은 스물넷 백조가 추는 군무(群舞). 푸른 조명 아래 새하얀 ‘튀튀’(발레스커트)를 입은 무용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백조의 슬픔을 몸으로 담아냈다. 발레단 정단원인 윤서후, 강호현이 군무에 나서 아쉬움을 달랬다. 윤서후는 군무진(陣) 선두에 서서 관객들에게 더 주목받았다. 비(非)서구인에게 문호가 좁은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박세은을 비롯, 한국인 무용수가 셋이나 활약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3월 16일 저녁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본 ‘오텔로’는 파리 여행의 피날레였다. 베르디 만년의 대표작이자 실제 부부 사이인 세계적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가 오텔로, 폴란드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쿠르작이 데스데모나로 나서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 이혼한 알라냐는 2015년 한창 주가를 올리던 쿠르작과 결혼하면서 또 다시 세기의 오페라 커플이 됐다. 쿠르작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런던 로열오페라, 빈 국립오페라에도 자주 출연하는 실력파이다. 알라냐의 오텔로도 궁금했지만 쿠르작의 데스데모나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스타 부부의 ‘오텔로’를 본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쿠르작이 남녀 주역으로 나선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 ⓒphoto Charles Duprat/OnP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와 소프라노 알렉산드라 쿠르작이 남녀 주역으로 나선 베르디 오페라 ‘오텔로’. ⓒphoto Charles Duprat/OnP

바스티유 오페라 ‘오텔로’

루마니아계 미국 거장(巨匠) 안드레이 서반이 연출한 무대는 초반부터 청중을 압도했다. 거센 파도가 객석을 덮칠 듯 몰아쳤다. 키프로스 총독 오텔로가 탄 배가 풍랑에 침몰할 것 같은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알라냐의 일성(一聲)은 불안했다. 승전보를 알리는 아리아 ‘기뻐하라(Esultate!)’는 폭풍우를 압도하고 개선하는 주인공의 등장을 알리는 장면 치고는 빈약했다.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내는 리릭 테너인 알라냐가 최고의 기량과 힘을 요구하는 오텔로의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소리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다시 솟았다. 하지만 데스데모나와의 사랑의 이중창이 시작되면서 우려는 사라졌다. 알라냐는 이아고의 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가는 나약한 오텔로였다. 총독 자리까지 올랐지만 무어인 출신이란 콤플렉스로 아내에 대한 불신과 시기의 덫에 빠지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쿠르작은 좋은 소프라노였다. 오텔로와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부터 죽음을 예감한 듯한 4막 아베 마리아까지 악의(惡意)의 제물이 된 데스데모나를 충실히 표현했다. 2막 초반 손에 해골을 쥔 채 ‘나는 잔인한 신(神)을 믿는다’며 노래하는 이아고 역 조지 가닛제는 주변에서 마주칠 것 같은 평범한 악인이었다.

‘오텔로’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역할이 결정적이다. 아름다운 선율보다는 바그너 오페라처럼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리세우극장 음악감독 출신 프랑스 지휘자 베르트랑 드 비이는 노련했다.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줄거리를 암시하고 유도하는 ‘오텔로’의 솜씨 좋은 안내자였다. 쿠르작의 요청으로 커튼콜에 나선 드 비이는 알라냐와 쿠르작 사이에 섰다가 알라냐에게 옆으로 비켰다. ‘신혼’인 알라냐 부부를 의식한 제스처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알라냐는 오페라 경력만 30년 넘는다. 대표적 테너 배역을 60개 넘게 소화했다. 수명이 짧은 테너로서는 이례적인 경력이다. ‘테너의 에베레스트’로 알려질 만큼 어려운 오텔로에 도전한 게 2014년이다. 그해 프랑스 오랑주 페스티벌에서 정명훈이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을 지휘하고, 바리톤 고성현이 이아고로 출연한 그 프로덕션이다. 쿠르작은 소프라노 어머니와 호른 주자인 아버지를 둔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1999년 폴란드 브로츠와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수잔나로 데뷔했다. 이때 어머니가 알마비바 백작 부인으로 함께 출연했다. 2015년 알라냐와 결혼 후 파리 오페라 ‘사랑의 묘약’ 남녀 주인공 네모리노와 아디나로 함께 출연했고, 2016년 취리히 오페라 ‘팔리아치’의 남녀 주역 카니오·네다, 2017년 런던 로열 오페라의 ‘투란도트’의 칼라프·류로 호흡을 맞췄다. 다시 파리 오페라에서 2018년 9월 ‘라 트라비아타’와 올해 3월 ‘오텔로’에 동반 출연한 데 이어 10월 ‘돈 카를로’에서도 남녀 주역으로 나온다. 리허설과 공연에 보통 4주 넘게 걸리는 오페라 무대 특성상,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알라냐·쿠르작급(級) 스타가 아니면 내로라 하는 오페라극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카드다. 남아공 출신 소프라노 프리티 옌데와 멕시코 테너 하비에르 카마레나가 주역으로 나선 가르니에 오페라의 ‘돈 파스콸레’, 샹젤리제 극장의 슈트라우스 오페라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역시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와 니노 마차이제가 나선 마스네 오페라 ‘마농’…. ‘한 달 살기’라도 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파리의 또 다른 명소

‘미술관 천국’의 숨은 보석, 오랑주리미술관에 핀 ‘르누아르’

오랑주리미술관은 모네 ‘수련’뿐 아니라 르누아르를 비롯, 세잔·고갱·피카소 등 유럽 회화 146점이 포함된 기욤 컬렉션이 유명하다. ⓒphoto 김기철
오랑주리미술관은 모네 ‘수련’뿐 아니라 르누아르를 비롯, 세잔·고갱·피카소 등 유럽 회화 146점이 포함된 기욤 컬렉션이 유명하다. ⓒphoto 김기철

‘미술관 천국’ 파리엔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 말고도 갈 곳이 많다. 콩코르드광장과 맞닿은 오랑주리미술관이 그중 하나. 튈르리공원 안에 있는 이 미술관은 전시장 두 개에 걸린 모네의 대형 연작 ‘수련’으로 이름났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나오면 절반만 본 셈이다. ‘수련’을 충분히 눈과 가슴에 담은 후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파리 미술품 거래상이었던 폴 기욤(1891~1934)이 수집한 컬렉션을 놓치면 안 된다.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유럽 회화 146점이다.

르누아르(25점)와 세잔(15점) 작품이 가장 많은데 복도처럼 보이는 벽에 줄줄이 걸렸다. 고갱, 시슬리, 피카소와 마티스, 모딜리아니는 물론 20세기 전반 여성화가 마리 로랑생도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 컬렉션만으로도 미술관 하나는 거뜬히 만들 법하다.

지하 1층 한쪽에서 6월 17일까지 열리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1880~1916), 아우구스트 마케(1887~1914) 기획전도 놓칠 수 없다. 프랑스에서 두 사람을 위해 연 첫 단독기획전이다. 둘은 젊은 시절 세잔, 반 고흐, 고갱 같은 프랑스 화가에 관심을 갖고 파리에 와서 지냈다. 이들은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 그룹을 만들어 활약하면서 전위미술의 선봉에 섰다.

마르크와 마케의 회화와 그래픽아트 100여점은 화려한 색채와 자연을 단순화한 구도가 인상적이다. 작년 뉴욕 노이에갤러리에서 먼저 전시하고 파리로 넘어왔다. 작품 못잖게 관심을 끄는 것은 둘 다 1914년 1차대전 발발로 독일군에 입대해 전선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한때 자신과 맞서 싸운 적국의 군인인데 이들을 위한 기획전을 열었다는 게 심상찮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프랑스의 관용을 새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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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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