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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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제2의 고난의 행군’을 맞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으로 33만명이 숨진 ‘고난의 행군’(1996~2000) 시기에 견줄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해졌다는 분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북한의 식량 문제는 지난 5월 3일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 등이 3월 29일부터 10여일간 진행된 북한 현지조사를 토대로 ‘북한의 식량안보평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FAO·WFP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 사정은 최근 10년 사이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올해 회계연도(2018년 11월~2019년 10월) 식량 부족량은 136만t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지난해 가을 수확한 북한의 곡물 생산량을 490만t(조곡 기준)으로 추정했다. 이는 평년보다 12%가량 낮고 최근 10년 중 가장 낮은 수치다. FAO·WFP는 이 때문에 북한 인구의 40%인 1010만명이 식량 부족에 처해 있으며 긴급 식량 지원이 절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대로 가면 대규모 아사자 나올 수 있다

“북한의 식량 부족량이 136만t에 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가. 북한 전체 주민(2573만명)이 하루에 먹는 식량 소비량은 1만t 규모로 보고 있다. 즉 이들이 136일을 꼬박 굶어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 농업전문가인 권태진 GS&J인스티튜트 북한·동북아연구원장의 말이다. 지난 5월 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GS&J인스티튜트 사무실에서 만난 권 원장은 “북한은 다시 대규모 아사자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권태진 원장은 1980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입사한 이후 1997년부터 북한 농업 분야 연구를 시작해 이 분야 최고 전문가로 꼽히고 있다. 그는 1999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후 30회가 넘도록 북한 농촌 현장을 오가며 연구에 매진해왔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머무는 동안 2007년까지 대북 쌀지원 현장(북한의 강원도 고성군)에서 직접 모니터링 작업을 해왔고 현대그룹과 함께 대북지원 업무를 맡기도 했다. 2014년 연구원을 정년퇴임한 뒤에는 곧바로 민간 농업연구소인 GS&J인스티튜트에서 북한·동북아연구소 원장을 맡아 북한 농업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권 원장의 설명대로 북한의 식량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 2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에 앞서 북한 당국이 WFP에 식량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만 해도 그렇다. 북한은 6월과 9~10월에 걸쳐 한 해 두 번 수확을 한다. 특히 가을 수확은 전체 곡물 생산량의 92%를 차지해 매우 중요하다. FAO·WFP가 공개한 보고서에서 지난해 가을 작황의 심각성이 드러났지만 실제 상황은 더 매서울 수 있다.

북한의 작년 가을 작황이 부진한 직접적 이유로는 지난해 발생한 긴 가뭄과 고온현상, 홍수 등 날씨 영향이 꼽힌다. 권 원장은 “작년엔 가뭄과 폭염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다. 특히 옥수수의 꽃가루가 수정하는 시기에 폭염이 나타나 옥수수의 타격이 많았다. 여기에 홍수까지 발생했는데 그 피해가 가장 큰 곳이 북한의 곡창지대로 꼽히는 황해도였다”고 설명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따른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로 인해 원유 수입량과 농자재 수입량이 줄어든 것이 농산물 재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권 원장의 설명은 이렇다. “기름은 유엔 제재 품목이기 때문에 북한 원유 수입량이 크게 줄었다. 또 가공된 원유인 휘발유, 디젤유 수입도 통제를 받게 됐다. 2018년 디젤유 공급은 4만502t으로 전년보다 25%, 평년보다 30% 감소했다. 트랙터를 움직이는 원료가 줄다 보니 수확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대북 제재로 인해 북한은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트랙터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권 원장은 “쇠붙이도 제재 품목에 해당하는데, 그렇다 보니 트랙터 부품을 필요한 만큼 구하지 못하게 됐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6만5000대의 트랙터 중 절반가량은 부품을 구하지 못해 그냥 두고 있다”고 말했다. 권 원장에 따르면 북한 농가에선 트랙터를 버려둔 채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고 한다.

북한 평양의 농업과학원에서 촬영한 모내기 작업 모습.
북한 평양의 농업과학원에서 촬영한 모내기 작업 모습.

대북 제재 이후 소득 줄고 쌀 소비량도 줄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하면서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분야에서 시장을 매개로 하는 경제운영시스템을 도입해왔다. 2012년 ‘새로운 경제관리방법’이 도입됐고 2016년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으로 완성된 틀이 갖춰졌다. 이 영향을 받아 농업 부문에서도 시장경제적 요소를 대폭 도입했는데 가령 협동조합이 제한적이나마 자체 계획권, 농장의 탄력적인 소득분배권과 자금조달권, 잉여 농산물의 판매권 및 가격제정권 등을 가지게 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개혁의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다. 권 원장은 “북한 농업 쪽에선 ‘포전담당책임제’가 실현되고 협동조합 운용 및 분배 방식의 변화 등 내부 개혁 움직임이 많다”면서도 “하지만 통계상으로 보면 김정일 정권 때와 김정은 정권 들어서의 곡물 생산량은 큰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의 제도 개혁이 실질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데에는 현재 직면한 대북 제재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며 “유엔 제재 국면이 북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밀수 등 ‘장마당 경제’로 경제제재에 대한 내성을 갖췄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의 쌀값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대북 제재의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권 원장의 해석은 달랐다. 권 원장은 “대북 제재가 본격화된 2017년도 하반기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해졌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쌀 부족분이 심각한 수준인데 가격은 떨어지거나 안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쌀을 사먹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은 배급제가 거의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난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식량을 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난의 행군 시절엔 쌀이 없어서 소비를 못 했다면 지금은 돈이 없어서 쌀을 사먹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쌀 소비량이 꾸준히 늘어나다가 2017년 대북 제재에 접어들면서 쌀 소비가 급격히 줄었다. 경제제재로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소비 능력을 갖춘 사람이 줄어든 것이다.”

FAO와 WFP의 보고서 발표 이후 정부의 대북 인도적 식량 지원 역시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5월 8일 정례브리핑에서 “정부가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히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을 공식화했다. 청와대는 전날 트럼프 미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이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하며 긍정적인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는 앞으로 대북 식량 지원의 방식과 시기,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 지원에 나서기 위해서는 지원 방식 등에 대한 논의에 앞서 북한 식량난 실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FAO·WFP가 발표한 ‘북한의 식량안보평가 보고서’는 북한에서 제공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보고서이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다. 권 원장 또한 “FAO·WFP가 공개한 보고서 내용 중 상당한 왜곡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FAO·WFP가 공개한 보고서에서 북한 곡물 생산량에 관한 기본 통계는 북한 당국이 제공한 자료를 사용하고, 곡물 소요량은 FAO·WFP의 자체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권 원장은 “북한이 제공한 곡물 생산량에 대해서는 40만t의 과소평가가 존재하고 FAO·WFP 측의 곡물 소요량은 10만t의 과대평가가 존재한다고 보여진다”며 “식량 부족량은 전체 곡물 생산량에서 곡물 소요량을 빼서 계산하는데 자료의 왜곡된 부분을 통합해서 계산해보면 50만t가량 식량 부족량을 부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밝혔다.

북한 강원도 고성군의 식량공급소에서 배급을 받는 모습. ⓒphoto 권태진 원장
북한 강원도 고성군의 식량공급소에서 배급을 받는 모습. ⓒphoto 권태진 원장

북한 식량 부족분 50만t 정도 부풀려져

권 원장이 곡물 생산량과 소요량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번에 보고서에 공개된 2018년의 곡물 생산량에는 북한 내의 약 55만㏊에 달하는 ‘15도 이상의 경사지’에서 재배된 곡물량이 제외됐기 때문이다. “김정은 정권 들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자연재해의 위험이 있는 ‘15도 경사지’에서의 곡물 재배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식량난 문제로 여전히 재배가 진행되고 있다. 북한 당국에선 일부러 15도 경사지에서 재배되는 최소 20만t가량의 곡물 생산량을 누락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농촌진흥청이 추정한 북한의 곡물 생산량은 455만t인데, FAO·WFP가 추정한 417만t과 비교하면 40만t 정도 차이가 있다.”

곡물 소요량 역시 마찬가지다. FAO·WFP는 지난해 보고서에서는 곡물 소요량을 562만t으로 추정했으나 올해 보고서에서 575만t으로 10만t 이상 높게 추정했다. 권 원장은 “식량, 사료, 수확 후 손실을 이전보다 더 높게 추정해서 곡물 소요량이 늘어난 것인데 그 근거가 분명치 않다”며 “더 낮춘 생산량과 더 높인 소요량 등 자료의 왜곡 가능성을 감안하면 실제의 곡물 부족량은 136만t이 아니라 80만~90만t일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자료 왜곡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에서 적어도 100만t의 식량 부족이 예상된다는 게 권 원장의 분석이다. 북한 전체 주민이 앞으로 100일을 굶어야 한다는 의미다. 권 원장은 “이대로 두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며 “식량 지원의 필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2017년 9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고 유니세프와 함께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모자보건·영양지원 사업에 남북협력기금에서 800만달러를 공여하기로 의결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북 압박 기조 속에서 실제 집행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최근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방식으로 WFP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공여 방식이 다시 부각되는 것은 정부가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은 과제를 우회해서 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다. 다만 정부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식량 지원에 나설 경우에는 과감한 방식으로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에 대해 권 원장은 “어떤 방식이든 식량 지원에 나선다면 북한의 달라진 경제체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장에서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배급제가 무너진 북한 현실 속에서 그저 쌀을 많이 건넨다고 식량난이 해결되진 않는다.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서 식량을 사먹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느냐’에 주목해야 한다. 즉 ‘마켓 액세스(Market Access)’ 관점에서 식량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북한 경제가 다시 살아나서 주민들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식량을 사먹는 구조가 잘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것, 이것이 북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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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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