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1월 베트남 APEC 정상회의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밝히고 있다. ⓒphoto US DOS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1월 베트남 APEC 정상회의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밝히고 있다. ⓒphoto US DOS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 회원국들 중에서 대표적인 친중파 지도자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2016년 6월 취임 이후 지금까지 친중 노선을 걸어온 덕분에 필리핀 정부는 지난해 중국으로부터 150억달러 규모의 투자 자금을 유치했다.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한 유커(중국인 관광객)는 무려 126만명에 달했다. 그런데 두테르테 대통령이 최근 들어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중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南沙群島, 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필리핀명 칼라얀군도)에 있는 티투섬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이 섬은 면적이 0.33㎢밖에 되지 않지만 길이 1300m의 활주로가 있다. 남중국해를 지나는 항공기 추적에 쓰일 수 있는 전략요충지다. 필리핀명으로 파가사섬, 중국명으로 중예다오(中業島)라고 불리는 이 섬은 중국이 스프래틀리제도에 미사일을 배치한 3개 인공섬 중 하나인 수비암초(중국명 저비자오·渚碧礁, 필리핀명 자모라)와의 거리가 12해리(22㎞)밖에 되지 않는다.

티투섬 인근 해상에는 중국 선박 수백 척이 몰려와 포진하고 있다. 중국 어선들은 티투섬 주변을 둘러싼 채 고기잡이도 하지 않고 교대로 며칠씩 정박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필리핀 어선들은 이 지역에서 조업도 못 하고 티투섬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다. 중국 어선들은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해상 민병대’다. 중국 정부의 전략은 ‘비군사적’인 어선들을 포진시켜 티투섬을 자국 영토로 만들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남중국해를 ‘난하이(南海)’라 부르면서 자국 내해(內海)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남중국해의 90%에 달하는 해역을 자국 영해로 주장하기 위해 9개의 선을 그려놓은 이른바 ‘남해구단선(南海九段線·nine dash line)’을 일방적으로 설정해놓았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현재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는 모든 해역이 중국의 영토가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말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photo BRF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4월 말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photo BRF

필리핀이 일대일로에서 돌아선 이유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를 자국의 바다로 만들려는 것은 이것이 시진핑 국가주석이 적극 추진해온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및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남중국해는 중국이 구축하고 있는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남중국해는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해상 루트로, 전 세계 물동량의 25%가 통과한다.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대만이 수입하는 석유 중 90%가 이곳을 지나간다. 액화천연가스(LNG)의 3분의 2도 남중국해를 경유한다. 해상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출발해 남중국해와 말라카해협~벵골만·인도양~아라비아해~중동·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바닷길을 말한다. 중국은 그동안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고자 동남아, 인도양, 아프리카의 에너지 및 화물 수송로에 위치한 국가들과 정치와 외교는 물론 경제와 군사 협력까지 맺는 등 관계를 강화하면서 주요 항구를 단계적으로 확보해왔다. 중국은 이를 일대일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다.

티투섬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자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이 파가사섬을 건드리면 군에 자살 임무를 준비하라고 지시할 것”이라며 “파가사섬은 우리 영토이며 중국이 이 섬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중국 정부에 경고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 정부에 이처럼 강경하게 대응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4월 26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 참석하면서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 대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판결을 거론하면서 티투섬 문제를 강력하게 항의했다. PCA는 2016년 7월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었다. 시 주석은 “중국 정부는 PCA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두테르테 대통령의 항의를 일축했다.

이후 중국의 속내를 잘 알게 된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필리핀 정부는 미국과의 군사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원했던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테오도르 록신 필리핀 외무장관은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세계 유일한 강국”이라며 “미국은 우리의 유일한 군사동맹으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다른 어떤 동맹도 필요하지 않다”고 천명했다. 두테르테 대통령도 지난 5월 3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의 미래’ 국제경제포럼 연설에서 “중국을 사랑하지만, 어느 한 국가가 모든 바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게 옳은 일이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으로선 자칫하면 자국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선 거리를 뒀던 미국과 다시 손을 굳게 잡을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미국 레이건호와 스테니스호 등 항모 2척이 지난해 11월 남중국해에서 훈련하고 있다. ⓒphoto US Navy
미국 레이건호와 스테니스호 등 항모 2척이 지난해 11월 남중국해에서 훈련하고 있다. ⓒphoto US Navy

인도 모디 총리가 강조한 ‘JAI’

미국 정부는 그동안 인공섬들을 앞세워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 해군 함정 등을 동원해 ‘항행의 자유’ 작전을 벌여왔다. 그 이유는 인도양과 태평양,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중국이 장악할 경우 미국으로선 해양의 지배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로선 항행의 자유 작전만으로는 중국 정부의 야심을 견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1월 11일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인도·태평양에서 오랫동안 친구, 파트너이자 동맹이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이라면서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인도양에서 태평양까지 걸쳐 있는 지역에서 법의 지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역내 항행의 자유 등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정부는 기존의 ‘아시아·태평양’을 ‘인도·태평양’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부르고, 태평양사령부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 전략의 핵심은 무엇보다 미국, 일본, 인도, 호주와의 동맹과 연대를 통해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봉쇄하는 것이다. 미국, 일본, 호주는 그동안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추진하는 차원에서 비동맹 노선을 견지해온 인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특히 미국은 군사·안보 측면에서, 일본은 경제적 측면에서 인도와의 관계 강화를 모색해왔다.

그런데 중국과 영토 분쟁을 벌여왔던 인도 역시 중국의 인도양 진출에 자극을 받으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지난해 11월 30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 사상 첫 3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모디 총리는 일본(Japan), 미국(America), 인도(India)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JAI’를 언급하며 “이는 힌디어로 성공을 뜻한다”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 3국 정상들은 오는 6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도 별도로 정상회담을 갖고 인도·태평양 전략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할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또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남중국해를 접하고 있는 아세안 회원국들과의 협력과 연대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 정부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F-35B 스텔스 전투기 최대 20여대를 탑재할 수 있는 최신예 강습상륙함 와스프호를 필리핀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해군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1951년 체결된 상호방위조약을 발동해 필리핀을 지원할 것”이라고 필리핀 정부에 약속했다. 미국 정부는 또 동티모르 학살의 배후라는 이유로 중단했던 인도네시아 특수전사령부(코파수스)와의 합동훈련을 내년부터 재개하기로 했다. 코파수스는 1999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하려던 동티모르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의혹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아왔다. 인도네시아는 2016년부터 남중국해 나투나제도 해역의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이 해역은 인도네시아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이지만, 중국이 주장하는 남해 9단선과 겹친다. 미국 정부는 이와 함께 싱가포르와 베트남과의 기존 협력관계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난해 4월 남중국해애서 관함식을 갖고 있다. ⓒphoto China.mil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난해 4월 남중국해애서 관함식을 갖고 있다. ⓒphoto China.mil

프랑스와 영국의 동참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함께 프랑스와 영국을 인도·태평양 전략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와 영국은 과거 인도양과 남중국해 및 동남아 지역에 진출한 국가들이다. 양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이 제해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실제로 프랑스의 핵 항공모함 샤를 드골호는 지난 5월 22일 인도양에서 미국, 일본, 호주의 함정 및 잠수함들과 함께 첫 4개국 연합 해상훈련을 실시했다. 리슬롯 오가드 미국 허드슨연구소 연구원은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이 함정들을 보내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지지하는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전략을 구체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패트릭 섀너핸 미국 국방장관 대행은 지난 6월 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서 열린 제18차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 기조연설에서 “어느 한 국가가 인도·태평양 지역을 지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서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게 최선의 억지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섀너핸 대행은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와 영공 통과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면서 “이웃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불신을 유발하는 일을 즉각 그만두라”며 중국을 정조준했다. 미국 국방부는 섀너핸 대행의 연설에 맞춰 공개한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통해 향후 추진할 계획을 분명하게 밝혔다.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우리와 동맹국·동반국(파트너)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보고서는 구체적 행동 방침으로 △억제 보장과 취약성 경감을 위한 충분한 자원 확보와 투자(전력 강화) △국제법, 국제규범, 항행의 자유 등 규범에 기초한 세계 질서 유지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위해 지역이 주도하는 계획의 추진과 참여 등을 제시했다. 특히 보고서는 “공산당 지도 체제인 중국이 법치에 기반한 질서의 가치와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고 명시해 중국의 공산당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이처럼 정면충돌하고 있는 가운데 자칫하면 한국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일대일로에 참여하겠다는 ‘속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장하성 주중 대사는 지난 5월 28일 시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중국 외교부가 밝혔다. 중국 정부는 지난 3월 27일에도 이낙연 총리가 리커창 총리와의 회담에서 “한국은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는 이 총리나 장 대사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문 대통령 역시 2017년 12월 베이징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중 양국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운명공동체의 관계”라며 시 주석의 중국몽에 동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국몽은 중국이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초강대국이 되겠다는 것을 말한다. 시 주석이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일대일로다.

문재인 정부의 속내는 일대일로?

시 주석의 일대일로 한반도 진출 계획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 구상인 서울~평양~신의주~단둥 고속철도 연결 청사진과도 중첩된다. 한국이 중국의 일대일로에 적극 참여하게 되면, 미국에 등을 돌리고 중화경제권에 편입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북한 바라기’인 문재인 정부가 일대일로에 동참한다면 특히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대일로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과 군사동맹 관계인 중국과의 연대는 가당치 않으며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국제사회는 중국이 일대일로 참여국들의 경제발전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막대한 빚을 지게 만들고 자국의 이득만을 챙기고 있다면서 중국을 ‘채무 제국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미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요청을 거부해왔다. 이 때문에 미국 국방부 보고서는 한·미 동맹에 대해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린치핀(linchpin)”으로 표현했지만, 일본에 대해선 “인도·태평양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코너스톤(cornerstone)”으로 명시했다. 한·미 동맹은 동북아에 국한된 국지적인 동맹인 반면 미·일 동맹은 인도·태평양 전체로 확대됐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남중국해와 인도양은 에너지와 수출입 상품의 가장 중요한 통로다. 한·미 동맹은 피와 목숨으로 이어진 동맹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미·중 무역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는 앞으로 상당 기간 흔들릴 가능성이 낮다. 문재인 정부는 국익을 위한 올바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더 이상 양다리 전략은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