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 뒤편 동광장 너머엔 국내에 몇 곳 안 남은 ‘철도관사촌’이 넓게 자리한다. 1920~1930년 대전역이 경부선·호남선을 분기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철도 관계자들의 숙식을 위해 형성한 동네다. 당시 일본 철도 기술자들 상당수가 이곳에 머물면서 100개 이상의 관사가 세워졌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현재까지도 29개의 관사가 남아 있다. 지금은 대전 내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으로 꼽히지만, 일자형 주택구조에 삼각형 지붕을 인 관사들은 한옥과는 또 다른 고즈넉함을 보인다.

최근 이런 철도관사촌에 사뭇 다른 모습의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관사나 옛 가옥에 현대식 인테리어 양식을 접목시켜 개보수한 카페, 음식점들이다. 지난 9월 16일 철도관사촌 초입에서 기자의 시선을 빼앗은 것도 관사가 아닌 이들 가게였다. 각기 다른 독특한 콘셉트로 이른바 ‘뉴트로’ 감성을 자아내는 이곳에선 슈니첼, 스테이크, 팬케이크 등 다양한 음식을 취급하고 있었다. 평일 오후였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은 상당했다. 길목에서 만난 20대 김모씨는 “오래된 가옥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가게 디자인의 일부로 활용한 점에 눈길이 갔다”고 말했다. 철도관사촌의 행정구역명은 대전시 동구 소제동. 소셜미디어상에서 소제동은 이미 뜨는 동네로 주목받고 있었다. ‘소제동’ 키워드만으로 1만여개가 넘는 게시물이 검색될 정도다.

익선다다, 서울 익선동 일구고 대전으로

올 9월 기준 소제동 일대에서 새롭게 문을 연 가게는 총 10곳이다. 눈여겨볼 점은 이 중 9곳을 ‘소제호’라는 한 부동산임대업체가 모두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제호는 2016년 중반부터 이들 가게의 설립, 운영을 기획하면서 지난해부터 순차적으로 오픈했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의 변화를 이 업체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박한아 소제호 대표는 “국내에 남은 철도관사촌이 손에 꼽힌다. 그만큼 한옥보다 희소가치가 높다. 소제동 건물의 경우 일본 철도 기술자들 숙소로 활용되다가 적산가옥으로 일반인에게 불하되면서 가옥 구조가 한국식으로 개조되기도 한 곳이다. 건축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원이다. 지역적 측면에선 철도 개통으로 급발전한 대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대로 버려진 땅으로 둘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소제호 측은 궁극적으로 소제동을 다시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운영 중인 가게는 이를 위한 일종의 ‘마중물’이다. 지역이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외지인, 내지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현재는 9개 가게 오픈 이후 이에 대한 시장과 지역 반응 등을 살피는 중이다.

이런 소제호 측 시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사실 박한아 대표를 포함한 소제호 직원 대부분이 2014년 설립된 부동산임대업체 ‘익선다다’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익선다다는 일종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낙후, 침체됐던 서울 종로구 익선동 내 130여채의 한옥단지를 지역 특색에 맞는 현대식 가옥으로 개조, 그 일대를 핫플레이스로 뒤바꾼 업체다. 한때 도심 속 흉물로도 평가받던 익선동은 현재 카페, 음식점, 액세서리점, 옷가게 등 100여개의 매장이 즐비해 있다. 이들 덕에 동네 전체가 활황을 누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익선다다는 익선동 개조 당시 매장 기획과 시공, 투자, 운영 모두를 도맡았다. 외부에선 익선다다를 도시재생 스타트업 혹은 기획팀, 프로젝트팀으로 불렀다. 익선다다가 대전 소제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소제호 업체를 새롭게 설립한 시점은 익선동 가게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2016년 전후다.

박홍철 익선다다 전략기획팀장은 “당시 익선동에서 우리가 기획, 시공한 가게는 11개뿐이다. 그 이후엔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들어와 새 가게를 차렸고 그 가게들이 지역 활성화의 또 다른 거점이 됐다. 대전 소제동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10개 가게를 우리가 먼저 보여주자는 거다. 이미 한 카페가 자발적으로 오픈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익선동에서 이들은 점포를 임차해 가게를 차렸지만 소제동에선 직접 건물과 땅을 사들이고 있다. 향후 건물주와의 재계약 어려움 등으로 사업 진행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조치다. 소제호 측은 자신들의 사업이 잘 진행되면 철도관사촌이 대전에서 내로라할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부동산임대업체 ‘소제호’가 대전 동구 소제동에 설립한 가게 모습. ⓒphoto 이성진 기자
부동산임대업체 ‘소제호’가 대전 동구 소제동에 설립한 가게 모습. ⓒphoto 이성진 기자

“두 번째 먹튀 시도 아니냐” 비난도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지역민들 생각은 다르다. 소제동에서 30여년간 세탁소를 운영해온 박모씨는 “인터넷에서 이들 가게를 보고 오는 사람이 늘긴 했지만 이것이 지역 활성화에 근본 대안이 되긴 힘들다. 저들(소제호)은 비슷한 형태로 서울에서 돈을 대거 벌고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대전엔 살지도 않는다. 진짜 목표는 여기서 차익을 남기는 데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근 이발소 사장 이모씨는 “이들이 가게를 짓겠다고 한 평(3.3㎡)에 300만~400만원 하던 걸 700만~800만원에 사면서 주변 땅값만 올렸다. 피해는 여기 지역민들이 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는 소제호 관계자들이 운영하는 익선다다가 2014년 익선동에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임대료 상승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익선동은 젠트리피케이션 진행 4단계(초기·주의·경계·위험) 중 임대료 상승, 과잉 상업화 등이 심화되는 ‘경계 단계’에 있다. 기존에 있던 주택이 상점들로 변화했고 공방 등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타 지역으로 다수 이동했다. 임대료는 최근 6년 동안 4배 상승했는데 2017년 조사 당시만 전년 대비 약 50%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가정보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익선동 일대 상가 임대료는 평균 보증금 3000만~5000만원에 월세 120만~150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권리금은 1억원 이상에서 거래됐다. 익선동 인근 한 부동산 관계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면적이나 계약 조건에 따라 임대료가 천차만별이다. 월세만 1200만원인 곳도 있다”고 말했다.

익선동 개발 당시 기존 거주민과의 마찰도 적지 않았다. 일부 공방 운영자는 익선다다의 가게 보수 공사 등을 두고 “소음, 먼지를 일으키며 무분별하게 공사를 진행한다”고 비난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철도관사촌 인근 소제동 주민들은 소제호식 개발보다 일반적인 재개발을 지지하고 있다. 소제호 측이 지역 활성화를 꾀하는 소제동 지역은 대전시가 2009년 대전역세권 재정비촉진계획 결정 고시를 통해 도시환경정비사업 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다. 구체적으로는 삼성4구역과 삼성5구역인데, 삼성4구역의 경우 2016년 재개발정비사업조합 설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재개발에 속도가 붙은 곳이다. 지난해 12월 대전 동구청의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설립된 조합이 지난 6월 대림산업을 시공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향후 1400여가구의 아파트 16개동과 부대복리시설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토지소유권자 340여명 중 75% 이상이 재개발에 찬성 중이다. 소제호식 개발을 지지하는 삼성4구역 비상대책위원회 참여 주민은 20여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지역이 워낙 노후됐다 보니 재개발을 통해 하루빨리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석두 재개발정비사업조합장은 “이미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던 곳인데 소제호 측이 사전에 상의도 없이 들어왔다”며 “5년 전이거나 재개발이 완료된 이후였다면 이들 방식이 적합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제호 측이 겉으론 선의를 표방하면서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 익선동에 이어 소제동에서도 이윤만 남기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소제호 관계자들이 운영하는 익선다다 총매출은 2017년 기준 전년 대비 147% 오른 25억6000만원,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12% 상승한 1억5900만원을 기록했다.

2014년부터 익선다다가 일종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활성화시킨 서울 종로구 익선동 골목. ⓒphoto 연합
2014년부터 익선다다가 일종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활성화시킨 서울 종로구 익선동 골목. ⓒphoto 연합

도시재생, 정부 아닌 민간이 주도해야

이러한 비판에 대해 소제호 측은 도시재생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홍철 전략기획팀장은 “재건축은 1980년대 낡은 건물을 개선하고 치안을 높이는 등 지역 활기를 불어넣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는 도시팽창과 인구증가, 경제활성화 3가지 요소가 함께 진행돼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지금은 인구가 줄고 경제 성장은 둔화되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획일화된 재개발이 아니라 지역 특성에 따라 재해석하고 이에 걸맞은 콘텐츠를 다양하게 채워 넣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초래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성공 여부도 장담할 수 없는 사업을 펼쳐가는 개발 주체에 그 책임까지 떠넘기는 건 적절치 못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한아 소제호 대표는 “우리 사업은 투자 대비 3% 정도의 수익을 우리가 가져가고 나머지 97%는 지역사회가 가져가는 식이다. 이건 먹튀가 아닌 진정한 상생”이라고 말했다. 소제호 측은 도시정비법 21조에 따라 삼성4구역 토지소유자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 대전시에 삼성4구역에 대한 정비구역 직권해제를 요청, 아파트 재건축을 중단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는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 도시재생으로 나아가야 하는 만큼 이들 시도를 마냥 나쁘게 볼 건 아니라고 평가한다. 서종국 인천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지자체 등이 진행하는 관 주도 도시재생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지역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지만, 점진적으로는 익선다다 같은 민간 주도 도시재생이 늘어나야 한다.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민간이 나서야 지역민이 배제되지 않고 도시 발전의 형태도 다양해질 수 있어서다. 정부는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경우 개발 과정에서 정부와 도시재생 추진 주체가 건물주·임차인의 상생협약을 강구하는 등 함께 풀어갈 문제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사실상 이런 민간 주도 도시재생 시도는 소제호, 즉 익선다다가 처음이다. 이들을 향한 평가와 도시재생 패러다임의 변화는 대전 동구 소제동의 지역 활성화 결과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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