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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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식 고려대 교수(물리학)는 한국 최초의 핵물리학 전문 연구그룹을 이끈다. 그룹 이름은 ‘극한핵물질연구센터’. 7개 대학 교수 9명과 연구원 15명, 그리고 대학원생 30명이 참여하고 있다. 홍 교수를 지난 8월 22일 고려대 아산이학관 내 ‘극한핵물질연구센터’ 사무실에서 만났다.

‘극한핵물질연구센터’는 한국연구재단 선정 SRC(Science Research Centre)다. SRC는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노정혜 서울대 교수)이 연구비를 지원하는 과학 분야 그룹. 홍 교수에게 물어보니 다른 분야 ‘연구센터’로는 공학 분야의 ERC(Engineering Research Centre), 의학 분야의 MRC(Medical Research Centre)가 있다고 했다. 홍 교수가 이끄는 ‘SRC’는 2018년부터 2025년까지 활동이 예정돼 있다. 극한핵물질연구센터의 연구 목표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와 물질의 기원 연구’이다. 센터 이름에 들어가 있는 ‘극한핵물질’은 핵물질이 고온·고밀도에서 만들어지는 걸 가리킨다.

그는 센터장이면서, 센터 내 제1그룹을 책임지고 있다. 제1그룹은 ‘고에너지 핵물리학’을 연구한다. 고에너지 핵물리학은 쿼크-글루온 플라스마(QGP)라는 우주 최초의 물질에 관해 연구한다.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스위스 제네바)와 미국 브룩헤이븐국립가속기연구소(BNL·뉴욕주 롱아일랜드)가 거대한 입자가속기를 갖고 이 연구를 하고 있다.

‘극한핵물질연구센터’ 이끌어

센터 내 제2그룹은 김현철 인하대 교수가 이끈다. 쿼크 가둠(쿼크라는 기본입자는 낱개로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고 다른 입자와 묶여서만 존재하는 걸 가리킴)을 연구한다. 제3그룹은 희귀 동위원소를 연구하며 한인식 이화여대 교수가 책임자다.

홍병식 교수는 “주간조선에 보도된 걸 보니, 이전에 고에너지 핵물리학자를 만났더라”면서 “그러니 오늘은 고에너지 말고 나의 또 다른 관심 분야인 저에너지 핵물리학을 얘기하면 좋겠다. 희귀 동위원소 연구에 관해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고려대 물리학과(1982학번)를 졸업하고, 미국 토머스 제퍼슨 국립가속기연구소(버지니아주 뉴포트뉴스 소재)에서 실험과 관련한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스토니브룩-뉴욕주립대학에서 실험으로 했다. 스토니브룩 인근에 있는 브룩헤이븐국립가속기연구소에서 고에너지 실험을 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대서양을 건너 독일 다름슈타트로 갔다. 그곳에 있는 중이온연구소 GSI에서 저에너지 핵물리학 실험(중핵 충돌)에 참여했다. 그러니 홍 교수는 고에너지와 저에너지 핵물리학 양쪽 연구를 다 하고 있는 것이다.

홍 교수가 극한핵물질연구센터 사무실 벽 스크린에 PPT 화면을 띄웠다. 핵물리에서 사용하는 핵도표(nuclear chart)다. 세로축과 가로축으로 된 좌표 평면 위에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핵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좌표 세로축은 양성자 수이고, 가로축은 중성자 수다. 특정 핵 안에 양성자가 몇 개 있는지, 중성자가 몇 개 있는지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다.<아래 도표 참조> 가령 원소기호 1번인 수소 원자핵을 보자. 수소 핵은 양성자 1개, 중성자 0개로 되어 있으니 핵도표상 위치가 (0,1)이다. 헬륨은 원소기호 2번이고, 원자핵은 양성자 2개, 중성자 2개로 구성돼 있다. 핵도표상 좌표는 (2,2)이다. 이런 식으로 핵들을 좌표에 점으로 하나씩 찍어서 만든 게 핵도표이다.

1만개 추정 핵의 기원과 구조 연구

홍 교수에 따르면, 자연에서 발견되는 안정된 핵이 300개(검은색), 그리고 가속기로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합성할 수 있는 불안정 핵이 2700개 있다. 핵도표에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불안정 핵은 아주 짧은 순간 존재한다. 두 종류의 핵을 합하면 3000개다. 그리고 아직 실험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이론적으로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핵들이 있다. 이게 7000개 이상이라고 했다.

“존재할 수 있는 핵에는 한계가 있다. 양성자도 그렇고, 중성자도 그렇고 핵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수에 한계가 있다. 핵도표상에서 핵이 몰려 있는 지점 위쪽은 양성자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고, 그 아래쪽은 중성자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다. 왜 한계가 있을까? 중성자는 왜 더 붙지 않나? 그런 걸 연구해야 한다. 1만개로 추정되는 핵의 기원과 그 구조를 연구하는 게 저에너지 핵물리학의 핵심 이슈다.”

홍 교수에 따르면, 핵 속의 중성자와 양성자 비율이 달라지면 핵의 구조와 성질이 변한다. “핵은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내부 구조가 이상하게 변한다. 안정된 핵 안에서는 중성자와 양성자가 잘 섞여 있다. 그런데 중성자가 많은 한계 영역에 오면 핵 안쪽 중심부에는 핵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가리키는 말)들이 고루 잘 섞여 있으나 외곽에는 중성자로만 이루어진 껍질이 생긴다. 중성자가 퍼져 있어 후광처럼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중성자와 양성자는 핵 안에서 에너지 껍질 구조를 갖고 있다. 안정된 핵과 불안정 핵은 핵 안의 에너지 껍질 구조가 다르니, 이걸 연구해야 한다.”

홍 교수가 핵도표를 다시 가리켰다. 오른쪽 아래, 그러니까 중성자가 무한히 많고, 양성자는 거의 없는 지점이다. 그곳에는 중성자별이라고 쓰여 있다. 중성자별은 중성자가 대부분이고, 양성자는 거의 없는 거대 핵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중성자별은 핵도표에서 핵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중성자를 핵 안에 쌓아가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영역이다.

“중성자별은 핵들의 존재 분포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상한 천체다.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중성자별 안에서는 핵들이 압축된 상태다. 이런 극한 환경에서는 핵자를 포함한 여러 입자들의 ‘강한상호작용’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강한상호작용은 핵자 혹은 쿼크들이 서로 주고받는 힘이다.) 보통 상태라면 중성자별은 존재할 수 없다. 핵도표의 핵들이 존재하는 지점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깨지거나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우주에서 중성자별이 많이 발견된다. 중성자별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핵반응이, 핵도표 안의 안정적인 핵들의 핵반응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 걸 연구하고 싶다.”

‘정상 핵자 밀도’라는 게 있다. 핵은 평균 1큐빅펨토미터(10-15㎥) 안에 0.16개의 핵자가 들어 있다. 핵도표 안에 있는 핵들은 밀도가 ‘정상 핵자 밀도’ 인근이다. 그런데 중성자별 내부의 중성자 밀도는 정상 핵자 밀도보다 최소 2배에서 많으면 10배일 것으로 예상한다.

중이온가속기 라온에 들어가는 RTQ선형가속기. 라온은 2021년 완공 예정이다. ⓒphoto IBS중이온가속기건설사업단
중이온가속기 라온에 들어가는 RTQ선형가속기. 라온은 2021년 완공 예정이다. ⓒphoto IBS중이온가속기건설사업단

2021년 완공되는 대전의 중이온가속기 라온

홍 교수는 이를 연구하려면 빔 안의 양성자와 중성자 비율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가속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대전에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짓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이 바로 이 연구를 위한 시설이다. 중성자가 풍부한 영역을 라온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라온은 ‘동위원소 공장(isotope factory)’이다. ‘동위원소’는 양성자 수는 같으나 중성자가 수가 다른 핵을 말한다. 라온(RAON)은 ‘희귀 동위원소 가속기(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for ON-line experiment)’란 뜻이다. 희귀 동위원소는 동위원소 중에서도 자연에서 보기 힘든, 실험실에서 만들어 짧은 순간 존재하는 동위원소를 가리킨다. 라온은 대전 북쪽 끝, 세종시 가까운 곳에 들어서고 있다. 1조4000억원을 들여 2011년에 건설을 시작했다.

라온은 흔히 ‘중이온가속기’라고도 불린다. ‘중이온가속기’ 속 ‘중(重)이온’은 수소보다 무거운 핵을 말한다. 중이온가속기는 ‘중이온’을 초전도가속기를 이용해 가속시키는 장치다. 라온은 가속된 중이온을 고정되어 있는 표적물질에 충돌시키는 방식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희귀한 동위원소, 즉 새로운 핵을 만들어낼 예정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핵물리학계는 2003년부터 ‘국립핵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가속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을 해왔다. “한국보다 훨씬 경제가 나쁜 나라도 핵과학연구소를 갖고 있다. 한국도 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 때 IBS(기초과학연구원)라는 대형 기초과학 연구기관을 만들고, 기관의 성격에 맞는 연구시설을 논의한 결과 중이온가속기를 만들게 됐다.

홍 교수는 여러 핵물리학 실험시설 가운데 중이온가속기를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의 LHC와 같은 고에너지 가속기는 주로 국제 협력을 통해 건설된다. 천문학적인 건설 비용도 문제지만 가속기를 운영할 전문인력도 한 나라가 감당할 수 없다. 반면 낮은 에너지 가속기는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장비인 동시에 학문적으로도 중요하다. 그래서 당시 핵물리학계는 낮은 에너지의 희귀동위원소 가속기를 건설하자고 제안하게 됐다. 라온은 한국 최초의 기초과학을 위한 대형 가속기다.”

라온과 비슷한 시설로는 일본 이화학연구소 산하 니시나(人科)가속기연구센터(사이타마 소재)의 RIBF가 있다. 2008년 가동에 들어간 시설이며, 홍병식 교수는 이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 미시간주 랜싱에 있는 미시간주립대(NSCL), 그리고 프랑스 캉의 GANIL연구소 등도 동위원소 공장을 가동 중이다. 한국은 후발주자이다. 그래서 이들과 차별성을 기하기 위해 남들이 안 하는 길로 갔다. 희귀 동위원소 빔을 제작하는 두 가지 방법(ISOL·IF)을 결합하여 더욱 희귀한 빔을 제작한다는 전례 없는 시도를 했다.

“ISOL 방식은 양성자를 가속시켜 우라늄 표적에 충돌시킨다. 그러면 우라늄 입자가 깨지면서 2차입자가 나온다. 이 중에서 중성자가 많은 2차입자를 골라낸다. 그런 뒤 IF가속기로 보내 다시 가속한다. 이 입자를 고정 표적인 베릴륨(원자번호 4번)이나 탄소(원자번호 6번)에 충돌시킨다. 그러면 양성자 대비 중성자 비율이 월등히 높은 원자핵 빔이 나온다. ISOL을 통해 중성자 비율이 높아졌는데, IF에서 다시 중성자 비율이 더 높아진 것이다. 중성자별과 비슷한 상황을 실험실에서 만들어 보려고 한다.”

라온으로 희귀한 빔을 만들 예정

홍 교수는 라온과 중성자별 연구와 관련 “라온으로 중성자가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많이 붙은, 그래서 자연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희귀한 빔을 만들 예정이다. 중성자별과 똑같지는 않으나, 중성자별 내부와 가능한 한 비슷한 물질을 실험실에서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중성자가 많은 빔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중성자가 많이 붙은 표적에 충돌시켜야 한다. 그러면 중성자가 양성자보다 훨씬 많은 핵물질을 만들 수 있다. 그 핵물질 안에서는 중성자별 안에서 일어나는 핵반응이 비슷하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입자들을 검출기로 확인하면, 중성자별과 비슷한 특이한 핵물질 내부의 구조가 어떻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공 안에서 보는 핵반응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라온이 중요하다.”

현재 라온을 이용하는 실험장치 7개가 준비되고 있다. 이 중에서 KOBRA와 LAMPS가 핵물리학을 위한 시설이다. KOBRA는 특이한 핵구조, 핵천체물리학을 위한 저에너지 핵실험장치이다. LAMPS는 압축된 핵물질, 핵물질의 에너지 상태, 특이한 핵구조를 위한 장치로, 라온 에너지 영역에서 상대적인 고에너지 핵실험이다. 홍 교수는 LAMPS 실험을 처음부터 책임지고 있다. LAMPS 검출기는 중성자검출기, 시간투영검출기 TPC(전하를 띤 입자의 비행궤적을 측정하는 장치), 초전도전자석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에너지 분해능에서 세계 최고라고 홍 교수는 말했다. 제작에 120억~130억원이 들어간다고 했다. 홍 교수는 “LAMPS 실험은 조만간 외국 물리학자가 많이 참여하는 국제실험으로 가게 되며, 실험단 구성을 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개인적으로 CERN의 CMS 실험(고에너지 핵물리학 실험) 등에 참여해왔다. CMS그룹의 주요 목표는 입자 실험이나, 핵물리학 실험도 가능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홍 교수는 CMS그룹의 중이온 충돌 연구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해왔으며, 이를 포함해 미국, 일본, 프랑스 등에서 진행 중인 다양한 중이온 충돌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홍병식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극한핵물질연구센터에 대한 연구비 지원과,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 연구그룹의 많은 학생과 박사급 연구원들이 있기에 이들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

저에너지 핵물리학의 또 다른 관심은 무거운 원소의 기원이다. 홍 교수는 “철까지는 융합 등을 통해 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철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는 방법은 정확히 모르고 있다. 초신성 폭발이나 중성자별과 중성자별 충돌 때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걸로 추정되기는 한다. 이 같은 궁금증을 라온에서의 실험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모르는 게 많고, 그걸 알아내려는 핵물리학자의 도전은 끝이 없겠다 싶다. 세 시간 이상 홍병식 교수의 설명을 들으니 핵물리학 전체의 이슈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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