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의 스카다리야 거리는 보헤미안 거리로 불린다.
베오그라드의 스카다리야 거리는 보헤미안 거리로 불린다.

서늘하고 감미로운 밤이다. 거리를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 머문 지 이틀밖에 안 됐구나.”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이틀이다. 처음엔 아슬아슬하게 느껴진 도시에 단숨에 빠져든 탓이다. 명색이 여행가란 내게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낯설었다. 1999년 나토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이 남아 있고, 여행보다는 분쟁이란 말이 익숙한 도시에 순식간에 빠져들 줄이야. 전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많은 서점을 본 적 없다. 빵집도, 카페도 많다. 빵을 좋아하는 나로선 값싸고 맛있는 빵집을 보기만 해도 즐겁다.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첫날, 나토 공습 때 반파된 건물을 보러 갔다. 관광지를 찾아가듯 말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처음 간 곳에선 젊은 남자가, 그 다음 간 곳에선 나이 든 남자가 묻는다.

“이 건물이 왜 이런지 알아요?”

설명은 비슷하다. “나토 때문에, CNN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피해를 입었어요!”

한번은 빵집에서 빵을 사서 나오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건다. “혹시 도움 필요한 일 있나요? 뭐라도 괜찮아요.”

빵을 사면서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직원과 가벼운 문제가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남자다. 세르비아 남자에게 받는 친절은 낯설다. 여기 오기 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선 하루, 이틀을 지내고 나니 그만 떠나도 될 것 같았는데 베오그라드에서 하루, 이틀, 사흘을 보내고 나니 한 달, 두 달, 석 달을 더 보내고 싶어진다. 베를린처럼 자유로운 도시의 공기와 친절한 세르비아 사람들 때문이다. 내가 만난 세르비아 사람들은 대개 조용하고 친절하다. 이게 어색하다. 발칸의 싸움꾼 같은 세르비아 사람들이 왜 이리 유순하지? 묵고 있던 호텔 매니저에게 커피를 얻어 마신 적도 있다.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 발생지인 라틴다리.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건 발생지인 라틴다리.

‘소박한 파리’ 베오그라드

“당신은 우리 호텔에 묵는 최초의 한국인이에요. 세르비아에 왔으면 이 커피를 마셔봐야 해요.”

‘도마차 카파’라 부르는 ‘발칸 커피’다. 그녀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 어떻게 커피를 만드는지 구경했다. 끓인 물에 커피를 침전시켜 만드니 영락없이 오스만투르크 스타일이다. 터키의 지배를 받던 땅 코소보가 떠오른다. 2008년 세르비아에서 독립한 코소보를 베오그라드에서 운운하는 건 금기 아닐까 싶어 조심스러웠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코소보에 단체로 간 적 있어요. 꼭 다시 가보고 싶어요. 언제가 될진 알 수 없지만….”

베오그라드에서 만난 다른 세르비아 친구는 깔깔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슬로베니아도 떠나고, 마케도니아도 떠나고, 코소보도 떠나고…. 이제 뭐 세르비아만 남겠네요.”

공화국 광장에서 멀지 않은 칼레메그단 성채에 오르면 오른편으론 도나우강, 왼편으로 사바강이 보인다. 매일 저녁 석양을 보려는 사람들이 성채 위로 모여든다. 도나우강과 사바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슬로베니아에서 발원한 사바강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지나 여기까지 1000㎞를 흘러온다. 이방인으로선 말로 담을 수 없는 애환과 기쁨이 서려 있을 발칸의 강줄기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발칸의 ‘나쁜 나라’란 선입견을 갖고 찾아온 베오그라드 거리는 뜻밖에도 낭만적이다. 어둠이 내리면 베오그라드는 ‘소박한 파리’처럼 느껴진다. 스카다리야(Skadarlija)는 ‘보헤미안 거리’라 불린다. 1800년대 중반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매일 밤 길 양편에 늘어선 레스토랑 여기저기서 감미로운 라이브 연주가 흘러나온다. 거리 벤치에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카다리야의 로맨틱한 무드에 빠져든다.

며칠 후 코소보로 가기로 했다. ‘베오그라드에서 코소보로 간다’고 말하는 건 간단하지만, 가겠다고 마음먹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코소보를 떠올리면 여전히 1998년 전쟁부터 떠오른다. 처음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코소보로 넘어가는 게 가능한지도 의문이었다.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지, 또는 베오그라드에서 코소보로 넘어가는 건 가능해도, 코소보에서 몬테네그로로 넘어가면 세르비아 출국 스탬프가 안 찍히니 세르비아에서 불법 체류하는 식으로 돼버리는 건 아닌지…. 그럼 코소보에서 다시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몬테네그로로 가야 하는 건지 온갖 상상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베오그라드에서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로 가는 버스 티켓을 구한 뒤에도 근심과 기대가 뒤섞인 기분에 빠졌었다. 2019년 현재 베오그라드에서 프리슈티나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낮 12시와 오후 5시, 두 대뿐이다. 대략 5시간 반이 걸린다고 하지만 국경에서 지체될 수 있다. 종전 후 20년이 지났어도 두 나라 사이에 버스가 다닌다는 게 낯설다.

1998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1998년 나토의 베오그라드 공습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빵 하나에 70원, 코소보의 매력

‘코소보’보다 ‘코소보 사태’라는 말에 아직 더 익숙한 상태에서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 왔다. 처음 맞는 코소보의 아침은 뜨겁다. 아침 10시, 빨래를 하는데 전기가 끊겼다. 코소보 전쟁의 여파는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 있다. 어제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 나를 태워준 택시기사는 “프리슈티나 인구의 97%는 알바니아계”라고 했는데 지도를 보니 놀랍게도 세르비아 정교회 교회뿐만 아니라 가톨릭 성당도 있다. 세상은 내 선입견처럼 선명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모스크에 들어가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마더 테레사 성당 첨탑에 올라가 프리슈티나 시내를 바라봤다. 전망대 난간이 바닥 끝에 바짝 붙은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베오그라드에서 프리슈티나로 넘어오니 두 도시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겠다. 언어는 물론이고 건물 형태도, 사람들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유고슬라비아 정서’로 두 도시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프리슈티나의 첫인상은 경적 소리가 요란하고 너저분해 하룻밤 지내고 떠나도 그만일 곳이었는데 이틀 만에 프리슈티나가 좋아졌다. 일단 물가가 싸고 사람들이 호의적이다. 유럽 같지 않은 유럽의 도시, 무슬림 도시 같지 않은 무슬림 도시라는 점도 매혹적이다. 터키나 모로코와 달리 모스크에 들어가 기도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촬영할 수 있었던 것도 코소보를 ‘리버럴한 무슬림 나라’로 여기게 만들었다.

걷는 게 편했고, 카페이건 레스토랑이건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모로코 마라케시를 여행할 때 지독한 호객에 시달렸는데 프리슈티나에선 전혀 그런 일이 없다. 관광객이 거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프리슈티나를 걸어도 아시안 여행객은 전혀 볼 수 없다. 내가 프리슈티나 거리에서 종종 사람들 시선을 받는 이유다. 어린아이들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빤히 지켜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길을 가는데 무턱대고 함께 사진 찍자던, 스무 살쯤 되어 보이던 남자도 있었다. 인도를 여행할 때 종종 겪었던 일을 ‘발칸의 유럽’에서 겪는다.

나토 덕분에 독립한 코소보에선 유로를 쓴다. 숙소 바로 앞에 있던 빵집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내 손바닥만 한 두툼한 크루아상이 30센트다. 20센트짜리 빵도, 심지어 0.05유로라고 쓰인 빵도 있다. 아무리 빵이 작다 해도 0.05유로라고? 그럼 70원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도 가격이 좋다. 카페에선 버거와 레모네이드를 먹고 2.8유로를 냈고, 번듯한 레스토랑에선 파스타를 먹고 3유로, 루콜라 피자를 먹고 4유로를 냈다. 유럽에서 이런 물가가 또 있을까. 세상에서 유로 동전을 가장 값지게 쓸 수 있는 곳, 유럽을 여행하며 가격을 안 보고 주문할 수 있는 곳이 코소보다.

코소보를 떠나 보스니아로 가는 국경에서 유로 동전은 다시 한번 유용하게 쓰인다. 버스가 국경에 멈추자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서서 뭐라고 말하더니 승객들에게 동전을 걷는다. 알고 보니 국경 군인에게 돈을 좀 건네면 빨리 통과시켜 준다.

코소보 국립도서관
코소보 국립도서관

이 선을 가운데 두고 사라예보는 이슬람 거리와 유럽 거리로 나뉜다.
이 선을 가운데 두고 사라예보는 이슬람 거리와 유럽 거리로 나뉜다.

무덤의 도시, 사라예보의 테크노뮤직

발칸 여행 30일째, 보스니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숙소인 아파트는 그 유명한 라틴다리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라틴다리에서 암살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얘기는 참 많이 들었는데 여기가 정말 그곳인지는 좀체 실감 나지 않는다. 라틴다리만큼이나 눈길을 끈 건 내가 묵을 아파트 외벽의 총탄 자국이다. 짐작은 했지만 집주인에게 “1992년 보스니아전쟁 때 유고슬라비아 군인들이 그랬어요” 하는 얘기를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불과 27년밖에 안 된 일인데 역시나 현실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코소보에서 묵었던 숙소 주인도 좀체 실감 나지 않는 얘기를 했다.

“전쟁 때 이 건물의 절반 정도가 부서졌어요. 전쟁 끝나고 복구한 거죠.”

이방인으로선 1차 세계대전의 현장, 유고슬라비아전쟁, 보스니아전쟁의 현장에 와서 잠시 숙연하다가도 겨우 2.5마르카(1700원)짜리 고기파이 ‘부렉’을 먹으며 맛있다 감탄하고, 느닷없이 밥을 해먹겠다고 쌀과 소고기를 찾아 시내 슈퍼를 누빈다. 쌀을 찾아다니다 알았다. 사라예보에 관광객이 참 많구나! 처음에는 ‘인종청소’ 같은 말부터 떠올랐던 보스니아에 간다고 나 혼자만 괜스레 상념에 잠겼었다.

하지만 사라예보에서 전쟁의 흔적은 결코 지울 수 없다. ‘옐로 포트리스 언덕’에 올랐을 때 일이다. 그저 높은 곳에 올라 사라예보의 시내를 내려다볼 생각이었다. 막상 높은 곳에서 눈에 들어온 건 아름다운 사라예보 시내만큼 시선을 잡아 끄는 백색 묘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한두 개가 아니다. 옐로 포트리스 언덕 바로 아래에는 코마치 묘지가 있는데 역시나 거대하다. 새하얀 묘지에 뭉뚝한 사각형 연필 같은 비석이 수없이 늘어섰다. 묘지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왼편에, 오른편에 또 다른 묘지가 있다. 시내 곳곳에는 무차별적인 총탄 흔적이 가득했다. 사라예보에 머무는 동안 맛있는 빵을 먹고, 맛있는 보스니아 커피를 마시면서 매일 하얀 묘지와 직면했다. 사라예보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게 묘지였다. 수많은 이의 죽음은 스펙터클처럼 사라예보 곳곳에 남아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목적지가 되었다.

나는 굳이 보스니아에 왜 왔을까. 루마니아나 세르비아에서 편히 쉴 수도 있었는데 굳이 어렵고 복잡한 길을 나섰을까 새삼 묻는다. 발칸 여행은 세계사를 떠올리는 여행이다. 여기서 민족을 구분하는 기준은 종교 같다. 정교회를 느끼고, 정교회와 가톨릭·이슬람의 갈등을 엿보고, 이로 인한 전쟁의 흔적을 살피며 오늘의 세르비아, 오늘의 코소보, 오늘의 보스니아를 느끼는 여행이다. 사라예보 시내에는 수많은 모스크뿐만 아니라 정교회도 있고 가톨릭 성당도 있다.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을 부조로 새긴 유럽식 건물도 있으니 참 희한하다.

한번은 오후 3시 넘어 숙소를 나서 가랑비 날리는 사라예보를 걸었다. ‘유럽 거리’를 지나 금세 ‘오스만투르크 거리’에 이르렀다. 카페 디반(Caffe Divan)에서 2마르카(1400원)짜리 보스니아 커피를 시키니 향미를 돋우는 디저트가 같이 나왔다. 음악은 애잔하고, 이곳의 이슬람 여인들은 날씬하고 세련됐다. 흐린 날, 잔잔하거나 청승맞거나 한스럽거나, 시를 읽는 듯한 노래에 빠져든다. ‘터키 같은 보스니아’의 정취다.

4년 전 이스라엘 텔아비브 거리를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맙소사, 여긴 ‘리틀 뉴욕’ 같잖아. 늘 긴장에 휩싸여 있을 것 같은 텔아비브는 영락없는 지중해 휴양지 같았다. ‘분쟁’이 없다면 그랬다. 오늘 사라예보 중심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맙소사, 여긴 ‘리틀 런던’ 같잖아. 부질없지만 ‘전쟁’을 지우면 그랬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도시는 사라예보다. 사라예보는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도시이거나 기껏해야 동유럽 변방의 촌구석 같았다. 사실 사라예보가 유럽의 도시라는 사실조차 생경했다. 실제 사라예보는 뜻밖이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전쟁’만 잊으면 그랬다. 거리 곳곳의 아파트와 빌딩에는 총탄 흔적이, 길바닥에는 저격수가 쏜 총탄에 쓰러진 사람들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지난 밤 사라예보 영화제의 폐막 공연만 보면 이곳은 문화의 도시, 청춘의 도시 같다. 사라예보 중심가에서 벌어진 디제잉쇼에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는 게 어려울 만큼 수많은 청춘이 몰려들었다. 세계적 디제이인 솔로문(Solomun)의 쇼였다. 하우스 음악답게 딱 클럽에서 맥주를 한 손에 쥐고 가볍게 흔들기 좋은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라이트쇼가 곁들여지면서 열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여기가 스페인 이비자라면, 여기가 런던이라면 이상할 게 없지만 여기가 사라예보라고 하면 왠지 어색하다.

5일 전 새벽 6시11분, 사라예보 버스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막막했다. 가이드북도, 인터넷도, 정해진 숙소도 없었다. 시내로 어떻게 가는지도 몰라 버스터미널 대합실에서 한참을 미적거렸다. 사라예보의 첫인상은 휑하고 추웠지만 겨우 5일 만에 사라예보는 나의 도시가 되었다. 떠나면 그리울 곳, 언젠가 다시 돌아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물고 싶다. 세상을 걸으며 내가 안착할 것만 같은 장소를 발견하는 건 늘 벅차다. 나는 언젠가 발칸에 돌아오리라. 언젠가 사라예보에서, 베오그라드에서 몇 달씩 살아보리라. 45일간의 발칸 오버 랜드 여정의 마지막 날, 사라예보 아침 산책을 하며 느끼는 여행의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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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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