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나온 영국 출신 대니얼 크레이그(51)는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배우다. 하지만 인터뷰 날은 기분이 좋다는 듯이 얼굴에 홍조까지 띠고 웃으면서 유머를 구사하기도 했다. 대답은 매우 직선적이요 사무적이다시피 했는데 사적 질문에는 대답을 사양했다. 살인면허를 가진 스파이답게 늠름했다.

크레이그는 최근 개봉한 미스터리 영화 ‘나이브스 아웃’에서 85세 생일에 갑작스레 죽은 베스트셀러 추리소설작가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 분)의 사망을 추적하는 사립탐정으로 나온다. 영화 속 사립탐정 베나 블랑은 작가의 사망을 살인으로 보고 작가의 온 가족을 용의자로 간주해 심문한다. ‘나이브스 아웃’은 제이미 리 커티스, 돈 존슨, 크리스 에반스, 토니 콜렛, 마이클 섀넌 등이 나오는 올스타 캐스트 영화다. 크레이그와의 인터뷰는 최근 비벌리힐스의 포시즌스호텔에서 있었다.

- 영국 사람인 당신이 악센트가 심한 미국 남부 사람의 말을 영화 속에서 하는데 어렵진 않았나. “감독 라이언 존슨이 쓴 각본에는 악센트가 너무 심하지 않게 알 듯 모를 듯 구사하라고 썼지만 그걸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역에 충실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난 미시시피 출신으로 남북전쟁에 관한 권위 있는 책을 쓴 역사가 셸비 후트가 아름다운 (남부) 악센트를 구사해가며 하는 말을 여러 시간 공들여 들었다. 그가 내 선생이었던 셈이다.”

- 당신은 베나 블랑처럼 탐정 노릇을 할 소질을 지녔는가. “베나는 추리력이 뛰어난 명탐정이라기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속 탐정 에르퀼 푸아로처럼 약간 서툰 데가 있다. 베나는 주위의 사람을 잘 이용할 줄 안다. 용의자들 중 누가 진짜로 사건 해결에 중요한 사람인지를 파악해 그를 이용해 사건을 풀어나간다. 나로 말하자면 뛰어난 탐정이 될 자격이 별로 없다.”

- 다른 사람과 이해 충돌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는가. “방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화로 해결하도록 한다. 서로가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게 내 방법이다.”

- 영화의 상징적 제목처럼 칼을 꺼내들 만큼 당신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불의가 나로 하여금 칼을 꺼내들게 한다. 서로들 배신하고 해치고 또 돕기를 마다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칼을 꺼내들게 만든다.”

- 각본을 읽으면서 금방 자기 역을 이해할 수 있었는가, 아니면 몇 번 거듭해 읽었는가. “금방 이해했다. 그리고 글을 읽자마자 역이 탐났다. 플롯이 배배 꼬였지만 결코 보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주 정직하고 영리한 각본인데 난 읽자마자 역에 응했다. 히치콕 스타일의 작품으로 일찌감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 뒤에 끝까지 플롯을 뒤틀어가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식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이런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했다.”

- 당신의 다음 007영화 ‘노 타임 투 다이’를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도시 마테라에서 찍었는데 방문 소감은. “어두운 과거를 지닌 그곳의 오랜 역사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드 영화의 배경장소로 그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고 본다. 장소가 하나의 인물 노릇을 했다. 장소가 우리 영화의 스케일을 보다 크게 만들어준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역사를 지닌 곳에서 영화를 찍는다고 밤새 고속으로 차들을 몰면서 법석을 떨었으니 주민들이 용서해주길 바랄 뿐이다.”

- 이번 영화에서 할란 트롬비의 간호사로 나오는 아나 데 아르마스는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본드걸로 나오는데 어떤 배우인가.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였다. 당시 영화를 보면서 ‘저 여자가 도대체 누구지’ 하고 감탄했다. 이 영화에서 아나와 그의 역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영화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나와 플러머가 같이 하는 연기를 보면서 울었다. 정말로 감동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연기다. 아나가 영화의 중심으로 영화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다. 쿠바에서 ‘노 타임 투 다이’를 찍을 때 이 영화를 감독하는 캐리 후쿠나가가 나더러 ‘아나를 아느냐’면서 그를 영화에 쓰겠다고 하기에 내가 찬성표를 던졌다.”

-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배신’을 공연했는데 추억담이라도 있는가. “참으로 멋진 역이었다. 특히 기억할 것은 그 작품을 작고한 마이크 니컬스(영화 ‘졸업’의 감독)가 연출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겐 아주 특별한 작품이다.”

- 영화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자녀들 간의 갈등을 그렸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화처럼 거액의 재산은 아니지만 우린 모두 어느 정도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고 본다. 돈과 물건은 가족을 순식간에 갈라놓고 찢어놓는다. 유산이란 타기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죽기 전에 없애버리든지 남을 주든지 해야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무겁지는 않지만 어떤 메시지를 지닌 영화라고 본다. 유산이란 토론해봄 직한 주제다.”

- 미스터리와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어렸을 때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영화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탐정으로 나온 크리스티의 소설 원작인 ‘나일강 위의 죽음’과 앨버트 피니가 탐정으로 주연한 역시 크리스티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로렌스 올리비에와 마이클 케인이 공연한 ‘슬루스’를 좋아한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한 장면.
영화 ‘나이브스 아웃’의 한 장면.

- 본드영화를 찍으면서 부상을 당했는데 그로 인해 본드 역을 다신 안 맡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나. “난 본드영화를 찍을 때마다 부상을 당했다. 그건 영화 제작의 한 과정이라고 본다.”

- 영화에서 구사하는 악센트를 집에 가서도 쓰는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집에 가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면서도 악센트를 썼고 영화 촬영하느라 따로 떨어져 있는 아내에게 전화할 때도 아마 악센트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 영화 촬영이 끝나면 어떻게 쉬는가. “해변에 가서 눕거나 등산을 한다. 그러나 특별히 긴 영화를 촬영한 후에는 해변을 찾는 편이다. 이번 본드영화 촬영도 끝나자마자 해변에 갔다.”

- 하고픈 역은 어떻게 고르는가. “특별한 조건 같은 것은 없다. 다만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조건이라면 조건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싫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 당신은 아까 영화를 보면서 울었다고 했는데 스스로를 매우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잘 운다. 분위기에 휩쓸리면 우는데 심지어 잘 만든 광고 방송을 보면서도 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운다. 사람들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고도 운다.”

- 당신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누군가. “이 영화를 감독한 라이언 존슨도 그중 하나다. 나는 그를 오래전부터 알아왔고 내 아내(레이철 바이스)도 그의 작품에 나왔다. 그의 영화라면 또 출연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들의 명단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함께 일할 사람을 물색하는 셈이다.”

- 환경오염 문제를 비롯해 세상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데 그런 문제들에 어떻게 접근하나. “혼자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내가 믿는 것에 개입할 뿐이다. 문제 해결에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무슨 특별한 묘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린 공동체로서 기상변화 등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한다. 이를 정부가 뒷받침해준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지.”

- 감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아이고 맙소사,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감독은 너무나 바쁜 일이다. 잠시도 쉴 틈이 없는 힘든 일이어서 난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전연 없다.”

- 본드영화 촬영이 끝나서 기쁜가. “‘노 타임 투 다이’를 완성해 정말로 행복하다. 참으로 힘들었다. 배우들과 제작진이 혼연일체가 되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다. 내겐 큰 의미를 지닌 영화다.”

- ‘노 타임 투 다이’로 본드 역에서 은퇴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사실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본드 역을 맡을 때가 왔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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