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에서 포도주 키안티 안주로 사람의 간을 즐기던 살인자 한니발 렉터로 나온 앤서니 홉킨스(82)가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되어 인터뷰에 응한 것을 보자니 감개가 무량하다. 홉킨스는 교황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약간 웅얼대는 음성으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물음에 답했는데, 나이답지 않게 원기왕성했다. 세월의 흐름을 파악했다는 듯이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만든 ‘두 교황’에서 임기 중 퇴임한 보수적인 교황 베네딕트 16세로 나온 홉킨스와의 인터뷰가 최근 비벌리힐스의 포시즌스호텔에서 있었다. 베네딕트 16세의 후임자인 진보파 프란시스 교황으로는 조너선 프라이스가 나온다. 두 베테랑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가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이다. 홉킨스는 이 역으로 2020년도 골든글로브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영화 ‘두 교황’의 장면.
영화 ‘두 교황’의 장면.

- 영화는 상당 부분이 베네딕트 16세와 후임자인 프란시스 간의 대화로 이어지는데 모든 것이 기계화하는 요즘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방법을 잃었다고 보는가. “난 사회비평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다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한다. 유머감각과 웃음으로 우리를 남에게 열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모두들 분노하고 회한을 품고 산다. 우리가 언제라도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난 나를 비참하게 만들 수가 없다. 그냥 삶을 즐긴다.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베네딕트 역에 왜 응했는가. “내게 그 역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과는 일했지만 조너선과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를 본 적은 있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우린 둘 다 웨일스 태생이다. 만나자마자 우린 즉각적으로 서로 통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연기 스타일을 지녔는데 조너선은 느슨한 스타일인 반면 나는 불협화음 식이다. 우린 서로 농담을 하면서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너선은 함께 일하기 아주 즐거운 사람이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대화가 많은 것도 내가 역에 응한 이유 중 하나다.”

- 지금 당신의 영적인 상태는 어떤가. “과거 나는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였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부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좋은 느낌이었다. 내 손과 몸을 볼 때마다 내가 늙어간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보다 위대하고 큰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난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내 인생은 내가 알 수 없는 뭔가 진짜로 큰 것이 안내한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40여년 전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한 것도 돈이나 경력 때문이 아니라 내 안 깊숙이 있는 그 무언가의 말에 따라 찾아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난 나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 그것을 신(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난 영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난 요즘 과거보다 많이 웃는데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의 농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린 다 죽을 것 아닌가. 죽음이 우리를 부르러 온다는 것을 안다는 건 현명한 일이다. 에이전트와 레드카펫과 할리우드 외신기자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갑자기 어느 나이가 되면 저기 수평선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 베네딕트 16세와 프란시스 교황이 시스틴 채플에서 관광객들과 만나는 장면을 비롯해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정도가 사실과 부합하는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다른 장면에서 묘사된 둘이 함께 피자를 먹는 일이 진짜로 있었는지 난 모른다. 그리고 둘이 나눈 대화도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증명할 길이 없다. 각본을 쓴 앤서니 매카트니가 허구로 쓴 훌륭한 사실적 기록이라고 하겠다. 그는 각본에서 보수적인 베네딕트의 이념과 진보적인 프란시스의 이념을 절묘하게 종합하고 있다. 그런 글을 바탕으로 조용한 장인 페르난도가 이런 뛰어난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누구도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 대화라는 외교로 의견의 불일치를 해결하려 들지 않고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양분해 대치하고 있다.”

- 맡은 역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난 맡은 역에 대해 사전연구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내게 한니발 렉터 역을 어떻게 했느냐고 묻기에 ‘가만히 서서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또 어떻게 교황 역을 할 것이냐고 묻기에 ‘교황이 입는 가운을 입으면 되지’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배우들처럼 열심히 역에 대해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연기란 테니스경기와 같아서 긴장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이완되어야 한다. 그러면 대사가 절로 나오게 마련이다. 연구는 하지 않지만 대사는 철저히 숙독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

-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작품활동이 활발한데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온다. 인생은 진행되는 과정으로 예행연습이 아니다. 지난 4~5년간 계속해 영화를 만들었더니 매우 피곤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럴 때마다 난 내게 ‘야 일어나, 노인 행세 하지 마’라고 자신을 재촉한다.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렸다. 건강의 비결이라면 음식조절을 하고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쉬는 것이다. 또 체육관에 가서 적당히 운동을 한다.”

- 영화에서 당신이 피아노를 치는데 어떤 곡인가. “촬영을 하기 위해 로마에 가기 전 페르난도가 내게 전화로 베네딕트 교황이 피아노 치기를 즐기는데 무슨 곡을 치면 좋겠냐고 물으면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권했다. 난 그것 대신 즉흥적으로 연주를 해보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좋아한 카바레 가수 자라 레안더가 부른 ‘달콤한 이별’을 나대로 변주해서 쳤다. 나의 이런 아이디어가 영화에 반영된 것이다.”

- 가톨릭 신도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30여년 전 술에 절어 살 때다.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심히 괴로워 런던에서 심리상담가이기도 한 신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게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더니 ‘실행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라. 그는 이어 ‘왜 가톨릭 신자가 되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난 ‘모르겠다’고 했더니 ‘신자가 되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니 포기하라’고 권했다. 그는 이어 나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기에 알코올중독을 비롯해 모든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신부는 ‘당신은 인간이어서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그저 인생을 즐기라’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다.”

- 자랄 때 가톨릭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는가. “난 어릴 때 성당에 간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요 어머니는 불가지론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40여년 전 뉴욕에 머물 때 영육이 심히 고달파 성패트릭성당에 찾아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계시 같은 것을 경험했다. 내가 그 무언가에 의해 받아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뭐라 말로 설명 못 할 절대적 경험이었다. 그것이 은총인가 보다.”

- 배우 명단에 조너선 프라이스의 이름이 먼저 오르고 당신 이름이 두 번째인 것을 놓고 조너선 프라이스와 장난기 있는 싸움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조너선이 나더러 자기 이름이 먼저니 나보다 큰 트레일러가 제공될 것이라고 놀리기에 내가 ‘그렇지만 난 앤서니 홉킨스 경이야(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서’ 칭호를 수여받았다)’라고 응수했다. 그와 난 촬영 내내 농담을 하고 아이들처럼 장난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종종 페르난도가 끼어들곤 했다. 조너선은 내가 피아노를 칠 때 잠에 빠지곤 했는데 그리고 나선 ‘그게 다야? 좀 더 잘 칠 순 없어’라며 놀려댔다. 그는 매우 조용하고 사적인 사람으로 저녁도 혼자 먹고 사람들이 사진을 찍겠다고 몰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한다. 그는 프란시스와는 달리 보수적인 사람이다.”

- 베네딕트를 연기하면서 그와 외모 및 육체적으로 닮기 위해 어떻게 시도했는가. “쉬운 일이었다. 내가 그처럼 늙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시스틴 채플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장면에서 등과 발과 손이 모두 저리고 아파 매우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내가 ‘너무 느리게는 말고 속도를 조금 늦추라’고 조언해 그에 따랐다. 사람이 늙으면 여행이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 매사에 조심하는데 아내도 항상 내게 모든 것에 신경을 쓰라고 말한다. 카펫 끝자락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일 따위다. 내가 노인이어서 노인처럼 걷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다.”

- 맡은 인물의 도덕성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도덕성? 난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늙은 죄인이다. 그러나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예수는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말했는데 요즘 세상은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정치적 바름’에 따라 실시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이런 일은 내 나라나 미국 등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로 말하자면 죄인으로서 후회할 일들을 많이 했는데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 역에 몰두해 운 적도 있나. “난 항상 운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난 나이가 들면서 별것도 아닌 것을 보고 운다. 조난당한 개가 구출되는 장면을 보면서도 운다. 다소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부끄럽게 여기진 않는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 이젠 모든 것이 내 감정을 자극한다. 난 매우 감정적인 사람으로 우는 것에 대해선 준비할 필요가 없다.”

-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 성추행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문제에 대해선 전연 관심이 없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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