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공중도시’ 바뇨레조 전경.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공중도시’ 바뇨레조 전경.

이탈리아인들이 자랑하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중도시’ 바뇨레조(Civita di Bagnoregio). 10여년 전 사진으로 이 도시 전경을 처음 봤을 때 ‘신과 인간은 죽이 잘 맞는 예술의 동반자’란 생각부터 들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자연, 신이 창조하기 어려운 문명과 문화가 사진 속에 ‘함께’ 녹아 있어서다. 지명 속에 ‘도시’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중세부터 이어져온 작은 마을이라 보는 게 맞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120㎞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인상 깊은 사진과 더불어, 상주인구가 25명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바뇨레조를 선명히 기억한 이유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동안 잊고 지내던 바뇨레조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바뇨레조를 불러낸 장소는 최근 신년 휴가를 보내고 있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오르비에토(Orvieto) 대성당이다.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에 나오는 지옥 장면을 대리석 조각으로 표현한 정문을 관찰하다가 10여년 전 바뇨레조 사진이 생각났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바벨탑이 연상되었고, 곧바로 바뇨레조로 이어졌다. ‘지옥=바벨탑=바뇨레조’인 셈이다. 왜 갑자기 연상됐을까? 공통점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결론은 하늘이다. 불길 속에서 형벌을 받는 인간은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살려 달라’ ‘잘못했다’고 울부짖는다. 바벨탑은 하늘에 대적하려는 인간의 속된 욕망을 상징한다. 공중도시 바뇨레조는 어떨까? 선한 인간들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중간 기착지나 사다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겨울 토스카나의 기막힌 풍경

구글 지도를 뒤졌다. 바뇨레조는 오르비에토에서 25㎞ 떨어진 남쪽에 위치해 있다. 곧바로 차로 달렸다. 가는 길은 토스카나 특유의 포도밭과 사이프러스 소나무로 채워져 있다.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다 알게 된 철칙이지만, 와인의 맛은 포도밭의 정리 정돈 상태와 정비례한다. 좋은 와인일수록 포도 가지의 높이와 크기, 각도는 물론 잎의 수까지도 통제한다. 고흐의 명화 ‘별이 빛나는 밤’으로 한층 더 유명해진 사이프러스 소나무는 지중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상록수다. 직선으로 뻗은 나무의 기상도 특별하지만, 토스카나 지방의 경우 사이프러스를 마주 보게 배열하면서 재배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바이블에서 포도는 예수의 피로 연결되고, 사이프러스 소나무는 죽은 자를 기리는 성수(聖樹)로 통한다. 희생으로서의 포도와 위령(慰靈)으로서의 사이프러스 소나무. 때마침 붉게 물든 석양빛이 퍼져나간다. 눈에 드러난 풍경은 아름답지만, 배경에 깔린 얘기는 너무도 애절하다. 단 한 번이라도 토스카나 풍경을 본다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오르비에토에서 출발한 시간이 오후 4시다. 걱정이 앞선다. 겨울의 이탈리아, 특히 토스카나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시골길 25㎞는 넉넉히 1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이탈리아의 1차선 지방국도는 빈티지 삼륜 오토바이가 아직도 활개치는 공간이다. 2~3세대를 훌쩍 넘긴 골동품 탈것이지만 아직도 현역이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앙증맞은 기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빨라야 시속 20㎞ 정도의 속도만 낼 수 있어 시골길 정체의 주범이다. 국도에서 만날 경우,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장사형(長蛇型) 저속 운전을 감수해야 한다. 거북이 삼륜차는 가다가 3번이나 만났다. 운이 따랐는지, 모두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지는 바람에 출발 45분 만에 바뇨레조에 도착했다.

일몰 이전에 볼 수 있겠다고 안도하는 순간, 멀리서 경찰이 다가왔다. 바뇨레조 안으로는 자동차 진입 금지란다. 서둘러 주차를 하고 나서는데, 바뇨레조까지 걸어서 27분이란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틈엔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해가 멀리 지평선 끝에 걸려 있다. 5분 정도 뛰어가자 ‘평지’ 바뇨레조가 눈에 들어왔다.

해발 443m 도시에 11명이 거주 중

바뇨레조는 두 개의 도시, 즉 공중과 평지로 나눠져 있다. 공중도시 바뇨레조 인구는 10여년 전 25명에서 최근 11명으로 줄어들었다. 크기는 축구 운동장 반 정도 규모다. 공중도시로 향하려는데 작은 버스가 눈에 띄었다. 바뇨레조까지 가는 셔틀버스다. 1유로를 내고 타자 좁은 골목길을 따라 10분 만에 도착했다. 내리는 곳이 인산인해라 깜짝 놀랐다. 11명이 거주하는 조용한 도시쯤으로 생각했는데, 눈에 띈 관광객만도 500여명은 됨 직하다. 대형버스 5대를 타고 온 밀라노 거주 이탈리아인들이다.

국외에는 아직 생소하지만,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더 잘 알려진 곳이 바뇨레조다. 이탈리아인 대부분은 60대 말로 보이는 실버 세대들이다. 그렇지만 필자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공중도시로 향한다. ‘셀카 군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공중에 뜬’ 중세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하고 신기하다. 가운데 교회를 중심으로 석재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첨탑처럼 90도 각도로 뾰족이 솟은 언덕과, 움푹 꺼진 주변 풍경이 대조적이다. 해발 443m 높이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함몰된 탓에 높은 산처럼 느껴진다. 바닷속에 떠 있는 작은 섬이란 생각도 든다. 천국으로 통하는 중간 사다리로서의 공중도시란 생각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지반침하·붕괴… 철제빔으로 지탱

바뇨레조는 2500년 전 이탈리아 원주민 에트루스칸(Etruscan)에 의해 개발된 곳이다. 바뇨레조는 13세기 들어 토스카나를 대표하는 성인 중 한 명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탄생지로 유명해진다. 특이한 자연풍광과 더불어 일약 가톨릭의 성지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거주민들이 급격히 줄어든다. 지진으로 인한 지반침하와 붕괴 때문이다. 진흙이 주성분인 지반으로 인해 주변 땅이 함몰하면서 바뇨레조의 지반침하와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현재 이탈리아 정부는 바뇨레조를 ‘죽어가는 도시(La citta′ che muore)’로 선포하면서 도시 보호에 나서고 있다. 세계기념물기금(www.wmf.org)도 2006년 바뇨레조를 세계 100대 멸종 도시 중 하나로 선포했다. 공중도시 바깥쪽 언덕을 초대형 철제빔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워낙 높은 곳이라 근본적 처방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공중도시 바뇨레조로 통하는 길은 공중다리가 유일하다. 높이 30m, 길이 300m의 철제다리다. 어릴 때 경험했던 구름다리가 떠오른다. 이탈리아 실버 세대들과 함께 걸어는데 정체가 심하다. 이미 어둠이 깔린 시간인데도 공중도시로 향하는 행렬이 길다. 겨울 토스카나는 한기가 뼈에 스며들 정도로 춥다. 영하 1도라고 하지만,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10도로 느껴진다. 어디 하나 숨을 곳 없는, 공중의 광야에서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강풍이다. 고공 공포증을 갖고 있기에 다리도 떨렸다. 도착 지점 100m 앞부터는 철제다리가 약 30도 급경사로 이어진다. 큰 목소리로 떠들면서도 빠르게 걷는 이탈리아 실버 세대들의 체력에 놀랄 뿐이다. 다리에서 벗어나 육지에 올라서는 순간 큰 성문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것은 로마군 차림의 두 군인이다. 활활 타는 장작불과 함께 성문을 지키고 있다. 로마 콜로세움 입구에서 만난 검투사가 생각나 관광객들을 위한 사진 찍기용 캐릭터인가 생각했다. 그럴 경우 카메라를 들이대면 5유로가 기본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성문을 지키는 로마군은 공중도시 바뇨레조가 선사하는 무료 캐릭터다. 셀카 인증용 합동 촬영도 무방하다. 촬영은 무료지만 공중도시 입장료 5유로는 따로 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중세마을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과정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이 핵심이다. 결과 자체가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가 한층 더 흥미롭고 오래간다. 평지에서 공중도시 바뇨레조까지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둡고 추운 데다 고공 공포증까지 겹쳐 많은 시간을 보낸 듯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인데도 성문에 도착했을 때 왠지 벅찬 감동이 일어났다. 공중도시를 접한 기쁨만이 아니라 ‘20분간의 고생’ 끝에 마침내 목표지에 도달했다는 안도, 자신감이 이유일 듯하다. 수백㎞ 성지순례의 마지막 코스가 인생 최고의 감동이자 긍지가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비행기를 타고 한순간에 에베레스트 산정상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목표지까지의 고생과 기억이 생생할수록 감동의 무게와 깊이도 한층 축적될 것이다. 홈 스위트 홈,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한다. 반대로 전혀 새로운 환경에 맞춰 나가는 여행, 즉 몸과 마음 고생이 시작되는 일상에서의 탈출은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최적의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

성 안으로 들어가 접한 바뇨레조 심장부는 콩나물 시루 속 같았다. 관광객 때문에 산책을 즐길 공간도 여유도 없다. 11명이 거주하는 소도시라고 하지만 평소에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중세마을이다.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가 외국인 관광객으로 넘칠 동안, 이탈리아인들은 바뇨레조와 같은 산속 깊이 숨겨진 중세마을로 달려가는 것 같다.

바뇨레조 성 안은 도시 전체가 돌로 채워진 중세마을이다. 100여명 규모가 입장할 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50여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전부다. 1층은 레스토랑, 카페 등 상가로 활용되지만, 그 위층 건물 대부분은 소등된 상태다. 때마침 연말연시 특별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2020년 전 예수 탄생 당시 이스라엘을 재현하는 이벤트다. 이맘때쯤 유럽 전역에서 열리는 이벤트이기도 하다. 작은 인형들로 예수 탄생 순간을 재현하는 이른바 ‘프레세페(Presepe)’다. 좁은 길 곳곳에 당시 이스라엘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무대도 펼쳐져 있다. 초를 만드는 장인, 양고기를 파는 푸줏간, 양털로 옷을 만드는 여인들, 손자와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 할아버지, 지하감옥에 갇힌 죄인과 감시병, 수십여 병의 향신료를 파는 상인, 길바닥에 드러누운 나병환자…. 성문의 로마군 캐릭터도 이스라엘 재현 이벤트의 부속품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예수 탄생 무대는 2020년 전의 이스라엘을 되살리는 하이라이트인 셈이다. 바뇨레조 중심지가 아니라 교회 뒤쪽 한구석 마굿간에서 펼쳐진 소박한 이벤트다. 요셉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가 막 출산한 예수를 응시하고 있다. 소, 노새, 닭도 없는 단출한 무대지만, 붉은 조명과 요셉·마리아 부부의 ‘열연’ 덕분에 성스럽게 느껴졌다. 관광객 모두가 달려들어 사진 찍기에 열심인 것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곳곳의 유령도시들

시타 판타스마(Citta′ fantasma). 이탈리아어로 유령도시(Ghost city), 즉 버려진 도시란 의미다. 사실 이탈리아는 유령도시 천국이다. 인구감소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탈리아 특유의 거주 형태인 언덕 위 주택도 원인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 문화, 문명권의 특징으로, 많은 거주지가 산이나 높은 언덕 위에 들어서 있다. 외적의 침입에 맞선 방어수단이자, 태양이 비치는 높은 곳에 신전을 두려고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관이 만들어낸 결과다. 보통 돌로 구축된 튼튼한 거주지다.

오랜 전통에 기초한 언덕 위 도시들이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유령도시로 변해간다. 높은 곳에 살면 불편한 점이 하나둘이 아닌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작은 언덕 위 도시의 경우 학교나 병원도 없다. 눈이 오는 겨울에는 아예 전면 통제다. 관광객이야 한번쯤 들르고 싶은 낭만적인 곳이지만, 매일 생활하는 현지인 입장에서는 불편하고도 불안하다. 지진은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다. 결국 모두 평지로 이주하면서 ‘시타 판타스마’가 급증한다. 자동차로 스쳐 지나면서 만나는 언덕 위 중세풍 집이나 마을의 상당수는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에 불과하다. 11명 거주에다 침하 붕괴로 당장 내일도 보장하기 어려운 공중도시 바뇨레조. 언젠가 다시 들르겠지만 그때까지 무사히 남아 있기를 기원해 본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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