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로도(甘露圖)’. 18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200.7×193㎝. 국립중앙박물관
‘감로도(甘露圖)’. 18세기 중엽. 비단에 채색. 200.7×193㎝. 국립중앙박물관

오래전에 예정되었던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었다. 무기한 연기된 곳도 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사스 때나 메르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코로나19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평소에 동네 한 바퀴 도는 것 외에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는 생활이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반찬거리 사러 마트에 가는 것 외에는 전부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는 특별한 불편함 없이 나만의 왕국에서 안전하게 잘 살고 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1000명이 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바깥 세계의 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대문 밖에서는 전염병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나만 혼자 안전지대에서 여유를 부리는 느낌이다. 이런 나를 보고 있자니 보카치오가 쓴 단편소설 ‘데카메론’ 속에 들어가 있는 착각마저 든다. ‘데카메론’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의 별장에 모인 10명의 피난민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가면서 ‘썰’을 푼 것이 그 내용이다. 10명이 모두 10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어 100편의 이야기가 탄생하였다. ‘데카메론’은 그리스어로 ‘10일 간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들과 내가 차이가 있다면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인물이 10명인 것에 비해 우리 집에는 두 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으니 미뤄두었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염불을 한다. 조선시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요로운 사치를 누리고 있다. 눈부시게 발전한 의료기술과 통신시설 덕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시대를 사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혜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서 더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위로한 그림

농담이 아니라 우리 시대 사람들이 유사 이래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리 시절이 어렵다 해도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번 전염병이 돌았다 하면 전 국토가 거의 초토화가 되다시피 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통함은 어떻게 달랠 것인가. 이에 대한 역할은 불교와 무속이 대신했다.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한성과 지방에 여제단(癘祭壇)을 설치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먼저 그림을 보자. ‘감로도(甘露圖)’는 녹색으로 펼쳐진 산을 경계로 육도(六道) 중생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그림 중앙에 위치한 아귀(餓鬼)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교에서는 해탈하지 못한 사람이 육도를 윤회(輪廻)한다고 말한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의 여섯 단계의 세계다. 그중 아귀는 지옥과 축생 사이의 세계에 사는 존재다. ‘감로도’에 등장한 아귀는 기괴한 모습이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생명체. 그 아귀가 두 손으로 밥그릇을 들고 있다. 아귀도 밥을 먹는구나. 아귀의 몸은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불로 뒤덮여 있다. 그가 무슨 큰 죄라도 지어 화형시킨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아귀는 ‘목구멍은 바늘 같고 입은 거대하며 배는 크고, 몸에 난 털에서는 냄새가 나는 귀신’이다. 굶주리고 목마름에 허덕인 귀신을 형상화하다 보니 저렇게 괴상한 모습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화염에 휩싸인 모습은 무엇인가. 아귀는 그가 먹으려는 음식이 모두 불로 변해버리는 형벌을 받았다. 게다가 목구멍은 바늘처럼 가늘어 음식을 삼킬 수도 없다.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가 잔뜩 쌓여 있어도 먹을 수가 없으니 항상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식을 허겁지겁 먹을 때 ‘아귀처럼 먹는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만큼 배고픔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아귀 주위의 화염은 먹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불로 변하는 음식을 상징한다.

이런 아귀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하나 있다. 그것이 감로(甘露)다. 감로는 ‘단맛이 나는 이슬’이라는 뜻이지만 부처의 가르침(敎法)을 비유적으로 말한다. 감로를 마신 아귀는 더 이상 아귀가 아니다. 이런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감로도’다. ‘감로도’는 불교에서 수륙재(水陸齋) 때 쓰는 불교 회화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다. 원혼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행해지는 영가천도재(靈駕薦度齋)라 할 수 있다. 아귀로 대표되는 육도중생에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음식을 베풀어 허기를 없애주고 업을 깨끗이 닦게 만들어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의식이다. 말하자면 영가를 위한 진혼굿이자 씻김굿이고 해원굿이자 살풀이춤이라고 할 수 있다.

아귀라는 귀신은 사람들과 사는 세계가 겹치지만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비명횡사했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은 윤회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사람 곁을 떠다니며 인간사에 개입한다. 이런 상태를 흔히 ‘귀신이 들러붙었다’고 표현한다. 객사나 횡사를 당해 거두어줄 사람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은 인간에 대한 간섭이 더 심하다. 분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冤魂)과 고혼 등의 객귀(客鬼)도 마찬가지다. 아귀는 제사를 받아야 할 영가를 의미하지만 무명과 탐진치의 세계에 갇힌 사람 등의 모든 존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감로도’는 원래 상단·중단·하단의 삼단 구조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단 구성의 등장인물(혹은 신과 귀신)은 수륙재에서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으로 재구성된다. 이시동도법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상황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기법이다. ‘감로도’의 상단에는 죽은 자들을 구제할 불보살(佛菩薩)이, 중단에는 공양물이 올려진 재단과 의식을 거행하는 법회 장면이, 하단에는 아귀와 고혼 등의 숙세의 삶이 그려진다. 숙세는 전생 또는 과거생이니 고혼 등이 죽기 전에 살았을 때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감로도’에서는 특이하게 중단이 생략되고 그 자리를 아귀가 차지했다. 이것은 굶주림의 표상인 아귀가 감로를 받는 구체적인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16세기 이후 거듭된 전쟁과 기근, 전염병 등으로 인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이 아귀처럼 변하는 모습을 경계하려는 의미도 크다. 그렇다면 도대체 조선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때의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감로도’의 하단에 그려진 고혼들의 과거생, 즉 그들이 살았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질병과 굶주림이 조선을 뒤덮어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했더라면 원한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죽어도 싸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이 세상에 죽어도 싼 죽음은 없다. ‘감로도’의 하단부에는 수륙재가 필요한 고혼들의 억울한 죽음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 곁에는 그들이 죽게 된 사연이 제목으로 적혀 있다. 왼쪽 하단의 ‘노년무호(老年無護)’라는 제목의 그림은, 노년에 보호해주는 사람이나 의탁할 자식이 없이 죽은 고혼이다. 반대로 의지할 곳이 없어 어린 시절에 죽은 ‘유년무의(幼年無依)’도 있다.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복지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으로는 장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쌍맹복사(雙盲卜士)’는 지팡이에 의지해 점술에 종사하는 맹인 부부의 생전 모습이다. 병으로 죽은 영혼의 생전 모습도 보인다. 오랜 지병으로 죽은 고혼은 ‘구병전신(久病纏身)’으로, 침과 뜸 등의 의료사고로 죽은 고혼은 ‘오침살인(誤針殺人)’과 ‘구료(灸療)’로, 열악한 환경에서 출산을 하다 죽은 산모나 영아의 고혼은 ‘자모구상(子母俱喪)’으로 표현했다.

이밖에도 길을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죽은 고혼,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어 죽은 고혼, 도박이나 잡기 등으로 허송세월하다 죽은 고혼, 연희패의 떠돌이 광대로 죽은 고혼 등도 등장한다. 형벌사건에 관련되어 죽은 경우도 있다. 그림에는 주인이 노비를 때려죽인 사건과 반대로 노비가 그 주인을 때려죽인 사건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무고한 죄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다 죽은 경우, 매질을 당하거나 형틀에 묶여 채찍질을 당하다 죽은 경우, 손발이 묶인 채 몽둥이질을 당한 경우, 머리가 잘려 죽은 경우 등도 있다. 특이하게 간통을 하다 발각된 경우도 있다. 간통한 여자는 얇은 하의만 입은 채 손발이 뒤로 묶여 있고, 남자는 하의만 입은 상태에서 손발이 뒤로 묶여 있으며 여인의 남편인 듯한 남자가 간통남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 조선시대 같은 근엄한 유교국가에서도 불륜과 치정 같은 스캔들은 비일비재했다. 이밖에도 그림에는 강물에 익사하거나 우물에 빠져 죽은 자, 집이 무너져 깔려 죽거나 불길에 휩싸여 죽은 자, 호랑이나 독사에게 물려 죽은 자, 말에서 떨어져 말발굽에 차이거나 바위에 깔려 죽은 자, 산에서 떨어져 죽은 자 등도 보인다. ‘감로도’의 하단부에 등장한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에 빈번하게 발생했던 사건·사고와 형벌제도, 복지 상황 등등의 풍속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이 아무리 억울하다 해도 전쟁이나 전염병에 의한 죽음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전염병은 한번 발병했다 하면 대량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하다. 짧은 기간 많은 사망자를 내는 악성 전염병을 역병(疫病)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역병으로는 두창, 염병, 마진, 홍역, 콜레라 등 다양하다. 역병은 발병 원인과 해결책을 알 수 없어 단지 괴질(怪疾) 혹은 돌림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 돌림병이 돌면 조선의 국토는 삽시간에 괴질의 공포에 빠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29년(1447) 6월에 발생한 돌림병으로 40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현종 12년(1671)에는 한 해 동안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 조선 땅 곳곳이 버려진 송장으로 넘쳐났다.

우리가 태평성대로 기억하는 영조 때(1750년 5월)도 역병으로 30여만명이 사망했다. 그때의 상황 역시 현종 때와 다르지 않았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역병의 발생이 추위와 굶주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를 길에다 내버리기도 하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살길을 찾지 못하던 유민 일가족의 가장이 처자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는 등’ 반인륜적인 일이 발생했다고 전한다. 또한 ‘유랑의 과정에서 6~7세가 된 어린 자식을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기근의 참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돌림병에 걸린 소를 살처분해 땅속에 파묻게 하자 굶주린 백성들이 ‘밤에 몰래 파내어 먹고 감염되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영조 때 발생한 역병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숙종 23년(1697) 8월 14일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평안도에 사는 두 여자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둘이 모의하여 같은 마을의 여인을 짓눌려 살해한 후 그 고기를 먹었다’고 전한다. 인육을 먹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아무리 무서운 전염병도 굶주림보다 무섭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감로도’의 중앙에 굶주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아귀를 그려 넣은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순조 21년(1821)에 발생한 괴질은 호역(虎疫)이라고 불렀다. 조선에서 처음 발병한 콜레라였다. 호질은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고통을 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병에 걸리면 10명 중 8~9명은 죽었다고 전한다. 당시 상황에서는 콜레라의 원인과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환자들을 격리시키고 죽은 자는 불태우고 마을을 봉쇄하는 것이 전부였다. 질병을 치료해주는 혜민서와 활인서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약값은 양반들이 사기에도 비싸 어지간한 금수저 집안이 아니고서는 서민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원을 찾는 대신 무속인과 점쟁이에게 매달리며 병이 낫기만을 기다렸다. ‘감로도’를 그려놓고 수륙재를 지낼 때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위안을 생각해보라. 그래서 종교화는 단순한 감상화가 아니다.

전염병은 국내에서 자체로 발생한 경우도 있지만 외국에서 유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국내로 전염병이 전파되는 주요 루트였다. 현종 12년에 발생한 전염병은 국내에서 자체 발생한 경우다. 그러나 순조 21년(1821)의 콜레라는 중국에서 전파되었다. 이번 코로나19도 중국의 우한(武漢)에서 발병해 국내에 유입된 것처럼, 조선과 교역이 빈번했던 중국은 질병의 주요 전파국이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따르면 ‘신사년 가을(1821)부터 이 병이 유행하였는데, 열흘 동안에 평양(平壤)에서 죽은 자만 수만 명이요, 도성에서 죽은 자가 13만명’이었다고 적혀 있다. 1817년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1820년에 중국을 거쳐 1821년에 조선에 도착한 전염병의 경로를 추정할 수 있다. 1894~1895년 청일전쟁 중에는 만주 지역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조선에 전파되기도 했다.

감로도에서 배우는 역사

그렇다면 역병이나 괴질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코로나19의 발병원인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다만 도시로의 인구집중에 따른 위생 문제가 전염병 발생의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양은 주요 도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로가 오물로 넘쳐났다. 이런 오물들은 비나 홍수에 의해 개천으로 흘러들어가 물을 오염시켰고, 공동식수로 사용하는 우물물조차 분뇨로 오염되기 일쑤였다. 코로나19 예방법으로 손을 자주 씻으라고 하는 이유도 그만큼 위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위생시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잘 먹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 못지않게 배고픔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가렴주구까지 겹치면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본거지를 떠나 호구지책으로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이 되었다. 18세기에 대규모의 반란이 자주 발생했던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민심은 곧 그 시대를 반영한다.

조선시대에 전염병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우리가 복 받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TV를 켤 때마다 공포스러운 소식이 매일 들려오지만 우리는 잘 이겨낼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질병과 싸우는 모든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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