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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에게해 ‘키오스’에서 절대 고독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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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생활
[2596호]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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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게해 ‘키오스’에서 절대 고독을 마주하다

▲ 터키 이즈미르로 향하는 배에서 바라본 키오스섬.
여행을 하다 보면 뜻밖의 장소에 던져진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스스로 벌인 일이지만 동도 트기 전 에게해 한가운데, 이름도 몰랐던 섬에 던져지니 당혹스러웠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 타고 1시간20분이면 될 것을 굳이 배를 타고 가겠다며 나선 길이다. 고생을 사서 한다.
   
   밤 9시, 니소스 사모스(Nissos Samos) 페리를 타고 아테네 피레아스항구를 출발했다. 막상 떠나려니 아련하다. 갑판에 서서 멀어지는 항구를 한참 바라보았다. 목적지는 터키 이스탄불인데 페리는 그리스 키오스(Chios)섬으로 간다. 내겐 미지의 섬이다. 배를 타고 터키로 가고 싶다는 말에 숙소 직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었다.
   
   “페리를 타고 8시간이면 키오스섬에 도착해요. 여기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터키의 체쉬메(Çeşme)로 간 다음에 이즈미르(İzmir)로 가서 버스를 타면 24시간쯤 후 이스탄불에 도착할 거예요. 아마 그럴 거예요. 이게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돈이 더 들 걸요.”
   
   
01 그리스 키오스섬 산중턱에서 그리스 본토는 안 보여도 터키 본토는 보인다.
02 중세시대에 생겼다는 아르몰리아 마을.
03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는 매스틱나무는 키오스섬에서만 볼 수 있다.
04 키오스섬의 난민캠프.
05 벽을 맞대고 지은 돌집들이 늘어선 메스타 마을.
06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

   신화의 바다, 에게해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기라도 하듯 감상에 빠져 아테네를 떠난다. 막막한 앞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배를 타고 에게해를 가로지르고 싶었다. 에게문명, 미케네문명, 미노아문명처럼 책에서만 본 고대 그리스 문화의 발상지를 언저리에서나마 느껴보고 싶다. 제우스가 흰 수소가 되어 페니키아(레바논) 바닷가에서 들꽃을 꺾던 처녀를 납치해 끌고 간 곳이 에게해의 크레타섬이고 이 처녀의 이름은 다름 아닌 ‘에우로페(Europe)’다. 여기서 유럽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지 않나.
   
   젊은 남성을 상징하는 신, 아폴론의 주 무대도 에게해의 델로스섬이다. 더욱이 이 바다의 주인은 포세이돈이다. 에게해 깊숙한 어딘가에 포세이돈의 황금빛 궁전이 있다지. 며칠 전 아테네 바닷가에서 ‘포세이돈호텔’을 보고 ‘아, 정말 그리스에 왔구나’ 싶었다. 미노아문명이건 미케네문명이건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200년경의 일이라 생각하면 도무지 가늠 안 되는 먼 세상 얘기 같지만 그래도 에게해를 가로지르면 뭔가를 느끼지 않으려나. 야간 페리라는 점이 아쉽지만 어차피 낮 페리는 없다. 에게해 한복판은 칠흑같이 어두울까. 달빛이 바다에 떨어지면 어떤 풍광이 펼쳐지려나.
   
   피레아스항구를 출발하고 두어 시간쯤 지나 갑판으로 나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세계에 빠져볼까 싶었는데 아이고, 어림도 없다. 바람이 몸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세다. 채 5분을 서 있는 게 힘들다. 게다가 춥다. 아니나 다를까. 갑판에는 아무도 없다. 신화고 포세이돈이고 카메라를 꺼내들 엄두조차 안 들 만큼 격랑이 인다.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바닷속을 향했나 보다. 삼지창이 위를 향하면 바다가 고요하고 아래로 향하면 거칠어진다지 않나. 포세이돈이 아름다운 여인 암피트리테를 강제로 끌고 간 곳은 에게해 남쪽 미코노스섬이다. 거칠고 무모한 자, 약탈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운 자, 한번 사나워지기 시작하면 사람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다. 삼지창을 들고 상체는 말, 하체는 돌고래 같은 해마를 타고 다니는 포세이돈을 머릿속에서 그려 보니 바다의 격랑이 예사롭지 않다. 동부 지중해의 파도는 거칠다. 흔들리는 객실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 키오스섬 서쪽의 메리코운타 비치 인근에는 올리브나무가 많다.

   호메로스의 고향
   
   새벽 4시, 나를 키오스섬 항구에 떨군 페리는 이내 어두운 바닷속으로 떠나버렸고, 승객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에게해를 8시간 가로질러 왔지만 목적지인 이스탄불은 아직 멀었다. 주변은 깜깜하고 날은 차갑다. 무작정 발길 가는 대로 항구 주변을 걸었다. 어둠이 언제 가실까 싶었지만 초조하진 않다. 뭐 오늘 바로 터키로 넘어갈 수도 있고, 하루 이 섬에 머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불 밝힌 카페가 있어 잠시 몸을 녹이며 커피를 마셨다. 카페를 나와 다시 걸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여명이 밝아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집 앞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본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띤다. 춥고 쓸쓸한 새벽, 그녀가 나를 위로한다. 이름조차 몰랐던 이 섬에서도 사람들은 이리 살아간다.
   
   키오스섬은 에게해 북동부에 위치한다. 크레타섬, 미코노스섬처럼 키오스 또한 신화의 섬이다.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 고향이 키오스섬이고, 섬 북쪽에는 레스보스섬이 있다. 보들레르는 시 ‘레스보스(Lesbos)’에서 이 섬을 ‘사랑과 미의 성지’로 표현했지만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음란한 여인들의 섬’이었다. 음란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고대 그리스의 시인 사포가 태어나 살았던 곳이고, ‘레즈비언’이란 말이 유래한 섬이 레스보스다. 레즈비언으로 알려진 사포는 도덕 대신 사랑과 본능을 좇으며 사랑으로 죽고 살다 레스보스섬에 묻혔다. 신화 같은 인생이다.
   
   키오스 성벽을 따라 바닷가를 걷다 보니 저 앞에 후줄근한 텐트들이 보인다. 영락없는 빈민촌 행색이다. 텐트에 쓰인 ‘UNHCR’ 글자를 보고 알았다. ‘난민캠프’라고 하면 그래도 좀 보호를 받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바닷가에 버려진 이들 같다. 더 이상 텐트 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저들을 동정하면서도 저들을 경계했다. 내 행색도 추레하지만 내 모습이 저들에겐 팔자 좋은, 돈 많은 아시안 관광객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돈이 있건 없건 나는 팔자 좋은 여행자구나…. 신화의 세계에서 느닷없이 비정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키오스섬뿐만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레스보스섬에도 난민캠프가 있지만 그들 처지도 매한가지다. 주민들은 난민 때문에 관광객이 줄었다고 불평했고, 난민들과 섬주민들은 종종 충돌했다. 2016년 키오스섬의 난민캠프는 화염병 공격마저 당했다. 에게해에서 ‘난민’은 저주받은 주홍글씨다.
   
   나는 그리스 신화를 운운하며 그저 호기심으로 에게해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바다를 목숨 걸고 건넌다.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그것도 내가 탔던 페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고무보트로 거친 바다를 나아간다. 나는 한가로이 돌아보는 동부 지중해의 섬이 이들에겐 목숨 걸고 지나야 할 경유지다.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의 난민이 에게해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일부는 성공하고,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키오스섬, 레스보스섬 인근에선 침몰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희생자들 중에는 특히 어린아이가 많았다. 내가 지금 바라보는 저 바다 어딘가에는 표류 중인 난민보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에게해의 비극’은 난민들만의 몫이 아니다. 1822년 터키 오스만투르크 군대는 키오스섬에 쳐들어와 주민 2만5000명을 학살하고 5만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 현재 키오스섬 인구가 5만3000명 정도라는 걸 상기하면 그 당시가 어땠을지 짐작된다. 이를 계기로 영국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키오스섬의 학살’이란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키오스섬의 아이들(L’ Enfant)’이란 시에서 키오스를 이렇게 표현했다.
   
   ‘터키인들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가자 모든 게 파괴되고 흐느끼네/ 서어나무의 그늘이 드리운 키오스, 큰 나무 숲이 비친 파도의 키오스/ 와인의 섬, 키오스는 캄캄한 암초로 변해버렸네’.
   
   키오스섬은 터키 체쉬메에서 겨우 8㎞ 떨어졌다. 터키가 진짜로 코앞이다. 키오스섬 중턱에 오르면 그리스 본토는 안 보여도 터키 본토는 보인다. 키오스섬을 비롯한 인근 섬 대부분이 잦은 외침에 시달리며 기나긴 세월 동안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이유다. 빛나는 신화와는 다른 에게해 섬들의 실제 운명은 기구했다.
   
   “키오스섬의 닭 우는 소리가 들려요.”
   
   바다 건너 반대편 터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패배한 후 키오스섬은 그리스에 합병됐지만 한때 자기들이 지배한 섬에 대한 터키 사람들의 향수는 여전하다. 이들은 호메로스의 고향마저 키오스가 아니라 터키의 이즈미르라고 말한다. 그리스인, 터키인, 난민들 그리고 나,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키오스를 기억한다.
   
   
▲ 키오스섬에서 겨우 8㎞ 떨어진 터키 체쉬메.

▲ 키오스섬의 출입국사무소는 돌집이다.

   정처 없는 길, 바가리
   
   스쿠터를 빌려 키오스섬을 종일 달렸다. 이따금씩 지나는 마을에는 몇백 년은 되었을 법한 돌집뿐이다. 5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지금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은 되나. 전기는 들어오나. 의문마저 든다. 마을을 거닐어 보지만 좀체 말을 걸 만한 이조차 볼 수 없다. 어디를 가도 인적을 찾아보기 힘드니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가 싶다. 휴가철이 아니라 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키오스섬에는 이런 식의 오래된 마을이 스무 개가 넘는데 여기 집들은 장장 중세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니까 14~15세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세마을’이다. 집들만 보면 여기가 그리스인지 터키인지 잘 모르겠다. 커피를 곱게 갈아 가루째로 작은 포트에 넣고 끓이는 그릭(Greek)커피만 봐도 오스만투르크 커피와 다른 점을 모르겠다.
   
   키오스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피르기(Pirgi)’의 집 출입구 정면부에선 ‘크시스타(Ksista)’라 불리는 장식을 볼 수 있었다. 크시스타는 석고 위에 긁은 것 같은 기하학적 패턴이다. 피르기 남쪽의 또 다른 중세마을 메스타(Mesta)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마을로 통하는 문은 하나밖에 없는 데다 돌집들이 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지붕 위를 걸어 다녀야 할 것 같다. 메스타와 인근 올림포이(Olympoi) 마을이 타워로 성벽을 잇는 요새의 형태를 갖춘 건 해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10월 말의 키오스섬은 어디를 가나 썰렁하고 차갑다. 집들은 방치된 듯 낡았는데도 인적 없는 골목을 자꾸만 걷고 싶다. 레스보스섬도 키오스섬과 비슷하지 않으려나. 아무리 레스보스섬이라도 겨울에는 사랑을 하기에 너무 차갑고 추울 것 같다. 아니, 반대로 너무 추워 사랑을 하고 싶으려나. 키오스섬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할 수 없이 쓸쓸했고 고독했다. 무작정 달리다 보니 산을 넘어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다. 키오스섬 서쪽의 메리코운타(Merikounta)비치다. 주변에는 올리브나무가 많았다. 올리브는 유럽에서 수천 년 전부터 ‘생명의 양식’으로 간주돼온 열매다. 몇 달간 비가 오지 않아 다른 나무들이 전부 말라비틀어져도 올리브나무만은 왕성하게 은녹색잎을 휘날리고, 가을이면 가지가 축 처질 만큼 열매가 열린다. 올리브나무가 그리스의 신성한 식물이자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흔히 등장하며, 고대 올림픽 월계관을 만드는 데 쓰인 이유다. 황무지처럼 마르고 거칠고 삭막한 키오스섬에서 올리브나무를 보고 잠시 숨이 트였다.
   
   겨울 해는 키오스섬에서도 짧다. 아침 10시부터 남쪽을 대충 달렸을 뿐인데 오후 6시도 안 돼 하늘이 어두워졌다. 150여㎞를 달렸지만 결국 북쪽으론 가지 못했다. 이름 모를 산중턱에서 저 멀리 키오스 시내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침에 스쿠터를 빌릴 때 렌터카 사무실 남자가 말했다. 나로선 그 말 때문에 더 가고 싶었다. 다음에는 항구에서 북쪽으로 달려봐야지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문득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 같다.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시내로 내려와 숙소를 잡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기 시작했다. 불을 끄고 뿌연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더 이상 허름할 수 없으리만치 초라한 몰골이다. 일상에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낯선 대지를 떠돌 때 ‘나는 여기서 뭘 하나’ 종종 되묻는다. 내딛는 발바닥을 통해 대지를 느끼며 이내 사라질 족적을, 기억을 쌓아갈 뿐이라고 했다. 때로 환희에 가득 차건 때로 서럽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다. 때로 삶이 쓸쓸하고 덧없듯 여행 또한 그러하다. 라틴어로 ‘정처 없는 방랑’ ‘헤매는 여행’을 의미하는 ‘바가리(vagari)’처럼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정답 없는 길을 가는 게 여행이다.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으면 무슨 재미로 그 길을 걸을까. 계속 나아갈 뿐이다. 숙명 같은 내 바가리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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