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 참 많이 늙었다. 얼굴과 목에 주름살이 가득한 이스트우드는 등을 약간 구부린 채 인터뷰장에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황야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에서 악인들을 사정없이 때려잡던 그가 호호백발 노인이 된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8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년 영화를 감독하고 출연하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중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개봉한 ‘리처드 주얼’의 감독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의 인터뷰가 최근 LA 비벌리힐스 포시즌스호텔에서 있었다. ‘리처드 주얼’은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당시 공연장에 놓인 폭발물을 발견, 관중을 신속히 대피시켜 큰 인명 피해를 막았으나 오히려 테러 혐의자로 몰려 곤욕을 치른 경기장 경비원 리처드 주얼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이스트우드는 인터뷰에서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농담과 유머를 섞어가며 질문에 자세하게 대답했다. 인터뷰 후 필자와 사진을 찍을 때 필자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다”라고 소개하자 그는 “응, 사우스 오브 보더”라면서 노래 ‘사우스 오브 보더’를 흥얼대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가 뭔가. “마리 브레너가 잡지 ‘배너티페어’에 쓴 리처드 주얼의 얘기 ‘미국의 악몽: 리처드 주얼의 발라드’를 읽고 큰 흥미를 느꼈다. 영웅적인 행동을 하고서도 범죄자로 몰려 인생을 박탈당하다시피 한 사람의 얘기야말로 좋은 영화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의 각본을 쓴 사람이 따로 있어 영화로 만들기까진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뒤 주얼의 얘기가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집념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지 비로소 5년이 지난 뒤에야 결실을 맺은 것이다.”

- 주얼 역의 폴 월터 하우저는 어떻게 골랐는가. “그가 나온 ‘아이, 토냐’를 보고 결정한 것이다. 그는 이 영화 끝부분에 작지만 매우 중요한 역을 맡았는데 연기가 아주 좋았다. 그는 실제 주얼과 너무나 닮았다. 마치 주얼 역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를 만나봤더니 매우 소박하고 단순해서 좋았다. 만나자마자 우린 마음이 통했다. 그를 잘 뒷받침해주기 위해 좋은 배우들을 조연으로 기용했다.”

- 영화에서 이 사건을 보도한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지’의 여기자 캐시 스크럭스(올리비아 와일드 분)가 사실보다 특종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는데 당신의 언론관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다 언론이 정확하기를 바란다. 주얼을 마치 진범처럼 대서특필한 스크럭스가 처음부터 마음먹고 주얼을 범인으로 몰고 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도 진실을 보도하려고 했지만 철저한 사실 확인을 소홀히 한 것이 문제다. 그도 사실 확인을 생각하긴 했지만 너무 서둘렀다. 당시 폭탄이 발견된 것은 올림픽이 시작된 지 며칠 후여서 법집행 당국이나 언론 모두 사건이 빨리 해결되지 않으면 경기가 취소될 수 있다는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스크럭스로 하여금 다소 무모한 보도를 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대중과 언론이 정확성 문제로 갈등을 빚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베테랑 영화인으로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어떻게 보는가. “난 그런 것과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난 구세대여서 모든 새로운 것들은 다 생소하다. 그러나 이제 스트리밍인지 스크리밍(비명)인지 하는 것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언젠가는 따라가야 할 것 같다.”

- 요즘 언론들이 가짜뉴스를 양산해 신빙성을 잃었다고 보는가. “요즘 언론들은 큰 제목용으로 성급히 결론에 뛰어드는 감이 있다. 무슨 그럴싸한 얘기가 한마디만 나오면 너도나도 그에 대해 확인도 안 하고 보도하는 바람에 터무니없는 보도가 아래로 구르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이다. 주얼의 얘기는 진실이 결여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이런 일이 정상적이 되면 우리 사회는 끔찍한 것이 될 것이다.”

- 젊어서 TV 웨스턴 시리즈 ‘로하이드’에 나올 때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나. 이렇게 크게 성공한 영화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나. “그때 꿈은 ‘로하이드’를 빨리 그만두는 것이었다. 내가 성공한 것은 운이 좋아서였다. ‘로하이드’를 떠나 이탈리아에 가서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괜찮았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서 만든 영화 몇 편도 흥행이 잘됐다. 이 영화들을 만든 것은 내 꿈을 좇아가는 작업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매편 제작이 도박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은 도중에 수많은 의문에 봉착하게 되는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아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영화 제작은 골프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잘나가다가 갑자기 엉망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 ‘#미투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회의 흐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가도 막상 알고 보면 무지하다는 걸 깨닫곤 한다. 그 질문에 대해선 이 나이에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만 답변하겠다.”

영화 ‘리처드 주얼’의 한 장면.
영화 ‘리처드 주얼’의 한 장면.

-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의 반응을 미리 생각하는가. “난 감정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것을 영화로 만든다. 영화 만드는 일은 지적 작업이라기보다 감정적 작업이다. 난 내 느낌에 따라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들도 내 작품에 호응해주길 바란다. 때론 호응을 받기도 하고, 때론 부정적 반응을 받곤 한다. 부정적 반응을 받으면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반성하면서 검토한다. 그런데 호응을 받는 것도 운에 달렸다.”

- 트럼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통령직이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일 것이다. 트럼프에 대한 나의 견해는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추한 놈’(이스트우드 출연의 영화 제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셋 모두가 될 수 있다. 여하튼 매일 놀라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것에는 동의하기도 한다.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를 비롯해 모든 정치인은 다 마찬가지다. 때론 좋은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론 멍청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요즘 신문을 들춰보면 어느 한 신문은 그를 진짜 멍청이로 보도하는가 하면 다른 신문은 그를 칭찬하고 있다. 매일같이 다르다. 난 정치적으로 어느 한편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것이 어떤 것인지는 보면 아는데, 요즘 그런 것을 무수히 많이 본다.”

- 곧 90세가 되는데 여전히 꾸준하게 영화를 만들 생각인가. “내 나이에는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덕분에 아직도 이렇게 일하고 있을 뿐이다. 가끔 이 나이에 왜 다른 노인들처럼 집에 있지 않고 아직도 일하느냐고 자문할 때도 있으나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도 앞으로 만들 영화 한두 편에 관해 구상 중이다. 지금으로선 ‘리처드 주얼’이 정말로 좋다. 영화에 나온 폴 월터 하우저와 샘 록웰, 올리비아 와일드와 캐시 베이츠 등도 좋아한다.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많은 영화에 출연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람들이 연기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감독이 된 이유 중 하나다. 이제 내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기에는 피곤하다.”

- 당신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사회로부터 오해를 받는 외톨이인데 왜 그들에게서 매력을 느끼나.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좋다. 사람이 오래 살고 활동하다 보면 자연히 자신에게 어필하는 것에 이끌리기 마련이다.”

-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가. “난 1930년대 경제공황 시대에 태어났다. 모두들 가난에 쪼들렸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장난감이 없으면 막대기와 돌을 갖고 놀았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아이들은 영화와 TV와 스트리밍으로 볼 것이 많지만 그때 아이들은 작은 것으로도 크게 감사했다. 흥미 있던 시절이었다. 난 지나간 옛날을 무척 사랑한다. 좋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 요즘 좋은 것은 무엇인가. “스토미 대니얼스(트럼프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한 포르노 여배우)다.”

- 배우 선정은 어떻게 하는가. “영화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역에 딱 맞는 배우를 고르는 것이다. 주얼 역의 폴 월터 하우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 본능을 사용해 역에 맞는 배우들을 고른 뒤 그들의 아이디어를 연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모든 배우들이 최선을 다 하도록 애쓴다. 그래서 좋은 연기가 나오면 그것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버린다. 연기란 두뇌와는 상관없이 직관적이요 자연적으로 나와야 한다. 영화가 지적 매체였다면 난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본질은 영감에 있다.”

- 법에 의해 곤욕을 치르는 주얼의 얘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렇다. 서부영화를 비롯해 어떤 장르의 영화로도 만들 수 있는 좋은 소재다. 어느 곳에서나 그 누군가가 늘 사회의 오인(誤認)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리처드 주얼이 그 궁극적 본보기다. 그것이 내가 영화를 만들기를 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얘기는 진짜로 비극적인 것이다. ‘위대한 미국의 비극’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런 얘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 속에 늘 있어온 것이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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