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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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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의 최전선]무기화학자 이동환 서울대 교수 “화학자들이 생각을 검증하는 법은…”

최준석  선임기자 jschoi@chosun.com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MUGI(無機良品)’라고 쓴 종이가 방문에 붙어 있다. 지난 4월 22일 이동환 서울대 화학부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려다 문에 종이 몇 개가 붙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MUGI(無機良品)’는 일본 유통업체 ‘MUJI(無印良品)’ 브랜드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였다. ‘무인양품’ 속 ‘인(印)’을 ‘기(機)’로 바꿔 놓았다. 어쩌면 이 교수는 ‘무기양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교수를 찾아가기 전에 뒤져본 서울대 화학부 사이트에 따르면 그의 연구 분야가 ‘무기화학’ ‘재료’이기 때문이다. ‘무기양품’ 옆에는 ‘평평하지 않은 분자(Molecular Unflattening Project)’라고 쓴 종이도 붙어 있었고, 빨강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분자 모형 그림도 붙어 있었다. 그게 뭘까 궁금해하며,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이동환 교수는 대한화학회 학술부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한·일 무역분쟁 발생 때 화학의 중요성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모처럼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며 화학에 대한 일반인의 정서가 부정적인 걸 우려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필요로 하는 화학 소재와 정밀화학 제품 공급을 일본이 통제하면서 관련 업계는 비상이 걸린 바 있다. 이 사건이 주요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국인은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화학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이 교수는 “화학은 우리 주변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학문이다. 그 점에서 뿌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유해물질 유출, 대형 폭발 같은 사고는 화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주기율표 외우느라 힘들었던 기억들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라면서 웃었다.
   
   
   ‘측정, 모델, 만들기’가 화학을 대변하는 말
   
   이 교수는 “측정(measure), 모델(model), 만들기(make)라는 ‘3M’이 화학을 잘 대변하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측정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메커니즘을 찾아내고, 만들어본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make’는 화학이 갖는 매력이고,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와 차별성이 있는 지점이다. 화학자는 자기 생각이 옳은지를 검증하기 위해 분자를 만들어본다.” 물리학자도 물질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는 설명이다. 다양한 크기와 규모에서 ‘만들기’를 하며, 이로 인해 ‘합성화학’이라는 이름의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의 연구를 잘 표현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분자설계라고 말할 수 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다 하는 자영업자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학자로서 갖고 있는 의문은 무엇인가?” 이 교수는 약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그런 건 만들어 어디에 쓰나요라고 물어오면 말이 길어지고 버벅댄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 연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매우 지루하게 말하면 구조와 성질 사이의 관계를 알고 싶다고 하겠다. 그게 화학이기는 하다. 결국 구조에서 성질이 나오는 원리를 찾는 작업을 한다. 이 답을 안다면 원하는 성질을 얻기 위해서 어떤 모양의 분자를 만들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성질을 얻어내는 데 관심이 있을까? 그는 “풀고 싶은 문제가 계속 바뀌었다”면서 서울대 화학부의 ‘현대화학 세미나’ 과목 이야기를 했다. 서울대 화학부는 학부 학생을 대상으로 교수들이 뭘 연구하는지를 직접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한 학기 동안 화학부 교수 36명이 돌아가며 강의한다. 교수 숫자를 감안해서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25분. 그러니 매 시간 두 명의 교수가 학생들 앞에 선다. 이 교수는 이번 학기에 자신의 수업을 위해 준비한 이야기 제목을 ‘결정장애’라고 붙였다고 한다. 그는 “영어에 ‘mile wide inch deep’이라는 말이 있다. 폭은 1마일인데, 깊이는 1인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여러 분야를 연구했으나 깊이는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말이다. 그간 흥미를 느껴 연구했던 주제들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 교수는 “나는 서울대 화학과 1989학번”이라며 말을 시작했다.
   
   
   “나의 학문 여정이 보여주는 결정장애”
   
   이 교수가 화학과에 진학한 건 화학은 선택의 폭이 넓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화학은 한쪽 끝의 물리(물리화학)로부터, 다른 극단의 생물(생화학)까지 연구 범위가 크다. 학부 3학년 때 실험실을 정해 들어갔는데 유기화학 서정헌 교수 실험실이었다. 1994년 8월 석사과정에 진학하면서 인생 행로가 바뀌는 일이 일어났다. 지도교수가 어느 날 부르더니, 옆 연구실의 백명현 교수 밑에서 공부해 보라고 권했다. 백명현 교수는 서 교수의 부인이고, 무기화학자다. 유기화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고 별렀던 한 학생의 연구 분야는 이 일로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연구 분야의 첫 글자가 ‘유’에서 ‘무’로 달라졌다. ‘결정장애 1’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나 요즘이나 화학과에 진학하는 많은 학생은 유기화학을 공부하려고 한다. 인간생활에 쓸모가 있는 분자는 유기화학자가 주로 만들었다. 질병을 고치는 약도 유기화학자가 만들었고, 세상의 색을 바꾼 인공 염료도 19세기 유기화학자의 연구 결과다. 독일의 화학업체 BASF도 출발은 염료 생산이었다. 그러면 무기화학은 무엇인가. 유기화학 이외의 다른 모든 분야가 무기화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속, 세라믹 같은 딱딱한 것을 떠올릴 수 있지만, 사람 몸 안에도 많은 무기물이 있다. 요즘 한국에서 각광받는 ‘나노화학’도 무기화학에 속한다. 플라스틱은? 그건 고분자화학이라는 별도의 분야로 분류된다.
   
   이동환 석사과정 학생은 서정헌 교수 실험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백명현 교수 실험실로 옮겼다. 당시 백 교수는 니켈 금속이 갖는 무기화합물의 반응을 연구했다. 이 학생은 석사논문을 ‘니켈 아자 거대 고리 금속 착화합물의 반응’이라는 내용으로 썼다. 유기화학 학위 논문으로 제출했지만 내용은 모두 무기화학이었다. 이 교수는 “석사과정이 내 인생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로 1996년 여름에 박사 공부를 하러 떠났다. 박사 공부를 하러 어디로 갈까 궁리할 때 ‘유기화학’으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 했다. ‘결정장애 2’의 상황이다. 결국 석사과정 공부에서 재미를 발견한 ‘무기화학’을 하기로 했고, 당대 무기화학 분야의 대가가 가장 많은 MIT를 선택했다.
   
   이 교수가 연구실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왔다. MIT 은사인 스티브 리퍼드(Steve Lippard) 교수의 책이었다. 책 이름은 ‘생무기화학원리(Principles of Bioinorganic Chemistry)’. 그가 유학을 떠나기 전이고, 석사 공부를 하고 있을 때인 1994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리퍼드 교수의 실험실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 절반 정도씩 25명 정도가 있는 큰 실험실이었고, 연구 분야는 5개였다. 이동환 학생은 메탄가스를 메탄올(액체)로 바꾸는 방법을 연구하는 MMO(메탄산화효소·Methane monooxygenase) 모델 그룹에 들어갔다. 이 일은 리퍼드 교수의 오래된 연구 주제 중 하나였다. 메탄가스를 액체로 바꾸면 저장하기도 운반하기도 좋다. 자연에 있는 미생물 중에는 그걸 해내는 게 있는데, 사람은 아직도 그 기술을 익히지 못했다.
   
   
▲ 이동환 교수가 갖고 있는 머그잔. 겉면의 이미지는 박사과정 때 논문 초고를 스캔한 것이다. 당시 지도교수가 논문을 첨삭지도했고, 살아남은 문장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 머그잔을 만들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MIT에서 겪은 혹독한 훈련
   
   1996년에 시작해 2001년 10월 박사 논문 심사를 받을 때까지 메탄가스-메탄올 전환을 연구했다. 메탄가스를 메탄올로 바꾸는 건 효소다. 자신은 소모되거나 바뀌지 않으면서 화학반응을 빠르게 하거나, 특정 방향으로만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효소는 거대한 단백질이나, 화학자가 주목하는 반응은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부위에서 일어난다. ‘활성 자리’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그 활성 자리의 3차원 구조를 알아내고 합성분자를 만들어 기능을 재현하는 게 연구 목표였다. 자연에 있는 걸 그냥 잘 흉내 내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 된다. 이동환 박사과정 학생은 고생 끝에 금속(철)이 들어 있는 효소의 활성 자리와 거의 똑같이 생긴 분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작 메탄올로 변화시키는 마법을 그가 만든 분자는 보이지 못했다. 비법의 책이 있는 산에는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교수보다 앞선 사람들도 다 실패했다. 그의 뒤에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 그 산에 들어갔다가 실종된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다른 봉우리를 찾아 올라갔다. 이동환 박사과정 학생은 등정에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걸 보게 되었다. 정상을 향하는 등반에서 알게 된 게 많았다. 유기합성, 무기합성, 구조화학, 분광학, 전기화학, 모델링, 반응속도론 등. “합성하는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테크닉을 직접 배울 기회는 흔치 않다”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리퍼드 교수는 엄격했다. 유학 갔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그는 매일 아침 7시에 연구실에 나와 저녁 6시에 퇴근하였고, 집에서는 학술지 편집자로 저녁 일과를 시작했다. 미국인 기준으로 보아 예외적일 정도로 엄했다. 이 교수가 연구실 한쪽에서 머그잔을 갖고 왔다. 머그잔 겉면에 영어로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다. 이 교수의 논문을 리퍼드 교수가 첨삭지도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문장이 없었다. 컴퓨터로 작성한 원고를 프린트해서 교수에게 주었고, 리퍼드 교수가 펜으로 문장을 하나하나 고친 것이다. 이 교수는 그때를 기억하기 위해 원본을 이미지로 만들어 머그잔에 새겨서 늘 옆에 두고 있다고 했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이 교수는 “제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걸 보여준다”라며 웃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대부분 그 학교를 떠난다. 그런데 개인 사정으로 보스턴을 뜨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MIT에 남았다. 대신 다른 연구 주제를 찾아, 새로운 선생 아래로 들어갔다. 박사 때는 생체모사를 하는 무기화학을 했다면, 이번에는 ‘전도성 고분자’ 연구를 시작했다. 전도성 고분자는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 전도성 고분자는 2000년 노벨화학상을 발견자 세 명에게 안겼다. 지도교수인 팀 스와거 교수는 전도성 고분자를 갖고 형광 센서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미국 국방부 연구 과제로 개(犬) 만큼이나 폭발물(TNT)을 잘 찾는 센서를 만들기도 했다. 전도성 고분자를 하는데 유기화학적인 게 많았다. 그래서 이동환 박사후연구원은 유기화학 합성도 이때 많이 했다. 무기화학에서 외도를 한 ‘결정장애 3’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박사후연구원 2년이 지났을 때인 2003년 가을, 미국 인디애나대학(블루밍턴 소재) 교수가 되었다. 인생 첫 실험실을 여는 자금으로 55만달러를 학교로부터 받았다. 어떤 연구에 써도 된다는 조건 없는 돈이었다. 물론 책임은 따른다. 신임 교수는 5년 후 정년 보장(Tenure) 심사를 받아야 한다. 심사에서 떨어지면 보따리 싸고 학교를 떠나야 한다. 이 교수는 “정년 심사는 조교수로 일하면서 논문을 몇 개 썼느냐를 보는 게 아니다.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었느냐를 본다. 박사 때 연구와 박사후연구원 때의 연장선상 연구로는 정년을 보장받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정년 심사를 통과하려면 조교수 부임 첫해에 3명의 똑똑한 학생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2008년에 정년 심사를 통과했고 10년을 블루밍턴에서 살았다. 그리고 서울대로 2013년에 옮겨 왔다.
   
   블루밍턴 시절부터 새롭게 하는 연구 주제는 ‘형광성을 갖는 작은 분자’다. 형광성 분자는 빛을 내기에 눈에 보인다. 그 특징을 이용해 세포영상 촬영 등 응용할 분야가 많다. 이 교수는 “당장에 쓸 수 있는 연구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분자가 빛을 내놓고, 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연구한다.
   
   
   화학자가 추구하는 생체모사
   
   원자 속의 전자가 에너지를 얻으면 바닥 상태에서 들뜬 상태로 에너지준위가 달라진다. 그리고 전자는 들뜬 상태에서 바닥 상태로 다시 내려오는데, 이때 빛을 내놓는다. 이건 원자물리학자의 발견이다. 화학자는 원자가 아닌, 분자 차원에서 빛이 나오고, 나오지 않도록 조절한다. 분자는 무수히 많은 원자가 모여 만든 것이니, 전자가 대단히 많다. 그러니 들뜬 상태의 전자도 많다. 전자들이 들뜬 상태에서 바닥 상태로 내려오는 과정을 화학적으로 통제해서 빛이 나오도록 만들 수 있다. 분자 안의 전자들이 바닥 상태로 내려오는 경로를 외부에서 넣어준 자극을 이용해서 바꾸면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이동환 교수가 내 취재수첩에 그림을 하나 그렸다. 그가 만든 형광성 분자 구조다. 가운데 동그란 게 있고, 그 주변을 역시 동그라미 세 개가 둘러싸고 있다. 주위의 동그라미에는 기다란 팔이 두 개씩 달려 있다. 팔들은 옆의 다른 동그라미의 팔들에 닿아 있다.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하는 것 같다. 이 교수의 설명은 이랬다. “한 사람이 오른팔을 아래로 내리면 그가 잡은 옆 사람의 왼손이 내려가고, 반대로 그 사람의 반대편 팔은 위로 올라간다. 그런 식으로 하면 연쇄반응이 나타난다. 상호의존성이 있다. 이건 기계적인 상호작용이다. 기계적인 움직임이 있고, 움직이는 부분들 사이에 상호의존성이 있으면 기계적인 상호작용으로 분자 내의 작은 힘이 큰 구조 변화로 증폭된다.”
   
   이 교수는 그런 현상을 잘 드러내는 분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결국 화학신호가 기계신호로 바뀌고, 기계신호가 다시 전자신호로 바뀌었다. 내 꿈은 이렇게 여러 가지 신호를 변환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분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또한 화학자가 하는 생체모사의 한 경우이다. 에너지, 정보, 물질의 상호 변환과 교환이 생명현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과정 때 한 연구도 생체모사였다. 결정장애로 돌고 돌았는데, 결국 다시 제자리로 온 셈이다.
   
   이동환 교수의 또 다른 연구 분야는 초(超)분자화학이다. 작은 분자들이 모여서 큰 구조체가 되면, 개별 구조 하나하나에서는 볼 수 없던 현상이 나타난다. 이게 초분자화학 현상이다. 1987년 노벨화학상의 키워드였고, 2016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분자 기계’도 초분자화학의 산물이었다. 생명체도 어떻게 보면 복잡한 초분자화학 현상이다.
   
   그의 방 창가에는 종이 커피잔 슬리브들이 수북하게 놓여 있다.<76쪽 사진> 커피가 뜨거우니 종이 커피잔을 쥔 손이 뜨거움을 덜 느끼라고 골판지와 같은 걸 덧댄 게 슬리브다. 알록달록한 슬리브들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그가 슬리브들을 갖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슬리브는 위아래로 꼭 낀다. 위로 쌓은 것들은 잘 빠지지 않을 정도로 결합이 강하다. 속이 빈 원통의 위아래 반지름을 아주 약간만 다르게 해서 경사를 주면 아주 높이 여러 개를 쌓을 수 있다. 이 결합은 방향성도 갖는다. 슬리브로 만드는 기둥은 한쪽으로만 자란다. 화학에서는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고 한다. 요철처럼 서로 맞물린 모양도 상보성이고, 전자가 많은 분자가 전자가 부족한 분자를 좋아하는 상보성도 있다. 초분자화학이 이 같은 상보성을 이용한다. 비공유결합을 제어하는 게 초분자화학이다. 인접한 분자가 전자를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으면 상보성을 띤다. 이런 순서를 프로그래밍해서 서열정보를 만들 수 있으면 약한 힘을 갖고 여러 가지 구조체를 만들 수 있다. 최소한의 빌딩 블록으로 거대한 구조체를 만들 수 있다면 다양성과 효용성이 뛰어날 것이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분자 도선(molecular wire)’이다. 분자들을 조밀하게 쌓아올리면 전자나 에너지가 흐를 수 있다. 현재의 반도체 집적회로는 큰 걸 작게 깎아내는 방식으로 만든다. 이동환 교수는 이와는 반대로 상향식(bottom-up) 접근으로 분자를 쌓아 도선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깍지 끼는 모양으로 자가조립(self-assembly)하는 분자를 쌓아서 도선을 만들거나 반도체 제작에 응용할 수 있다면, 극한의 정밀성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게 그의 또 다른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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