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 ⓒphoto 뉴시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 ⓒphoto 뉴시스

지난 6월 1일 취임한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약 보름간 쏟아낸 파격적인 이슈 제기로 정치권이 들썩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보수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진보보다 더 앞선 진취적인 정당이 될 것”이라고 말해, 야권에서 보수 정체성과 관련한 논란이 일었다.

정치권을 뒤흔든 ‘김종인발(發) 기본소득제’는 취임 사흘 만에 시동이 걸렸다. 그는 6월 3일 초선의원 공부 모임에서 “배고픈 사람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보고 먹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다. 그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냐”며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라고 했다. 수권정당이 목표인 김종인 비대위의 과제가 기본소득 등 소득지원책이란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본소득은 부자든 가난하든, 일을 하든 안 하든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을 지속적으로 지급하는 돈이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 도입 움직임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실행한 나라는 아직 한 곳도 없다. 스위스는 2016년에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가 77%가 반대해서 무산됐고, 핀란드는 2017년부터 2년간 실험적으로 2000명을 대상으로 매달 70만원 정도 지급했는데 고용률 부진 등의 문제로 중지했다.

“좌파 어젠다 선점으로 좌파 무용지물”

그래도 김 위원장이 진보의 전유물이던 보편적 복지를 강하게 들고나온 것은 야당이 긴급재난지원금 등 정책 이슈에서 여당을 뒤쫓기만 하거나 ‘정부·여당의 발목만 잡는다’며 역공을 당했던 상황의 반전을 위해서다. 독일 유학파인 김 위원장의 벤치마킹 대상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끌어온 중도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독일의 기민당을 보라. 보수정당이지만 좌파의 어젠다까지 선점하여 좌파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비대위가 출범하자마자 ‘약자와의 동행’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등 진보 의제를 내놓은 것과 맥이 닿는다. 김 위원장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하태경 통합당 의원은 “사회주의자 덩샤오핑도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며 흑묘백묘(黑猫白猫)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의 보수가 중국 사회주의자보다 경직돼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야당이 이념을 떠나 불평등 해소 등 민심과 코드를 맞추는 게 급선무란 얘기다.

실제로 우리 국민은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다. 지난 1월 KBS·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소득 불평등 상황이 ‘심각하다’(66%)가 ‘심각하지 않다’(7%)를 압도했고, ‘보통이다’는 26%였다. 이 조사에선 소득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평가가 진보층(76%)뿐 아니라 중도층(66%)과 보수층(60%)에서도 과반수였다. 김 위원장이 ‘보수’란 말을 안 쓰겠다며 통합당이 가지고 있던 색깔 빼내기 작업에 나선 것도 갈수록 보수 유권자가 감소하는 분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국갤럽의 6월 첫째 주 조사에서도 본인의 정치 성향이 ‘보수’(21%)란 응답이 ‘진보’(31%)에 비해 낮았고, ‘중도’(32%)와 ‘모름·무응답’(16%)을 합한 수치가 48%였다. 이에 비해 2016년 1월 갤럽 조사에선 ‘보수’(32%)가 ‘진보’(23%)보다 많았고, ‘중도’(33%)와 ‘모름·무응답’(12%)이 45%였다. 약 4년 전 박근혜 정부 때와 비교하면 보수층 규모가 확연히 줄어든 반면 진보층의 증가가 뚜렷했다.

또 김 위원장은 “우리 사회의 주역인 3040세대에 호소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차기 지도자는 젊고 신선한 인물이 돼야 한다” 등 청년층을 겨냥한 발언을 반복했다. 9명으로 꾸려진 통합당 비대위에는 30대 비대위원을 3명이나 포함시켰다. 그는 최근 비대위원들에게 “호남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로는 안 된다”며 호남 민심 잡기에도 나섰다. 광주(光州) 군공항과 무등산 방공포대 이전, 광주·전남 지역 의대 설치 등 호남권 정책 개발에도 나설 방침이다. 그동안 장·노년층과 영남에만 안주해왔던 통합당의 지지 기반을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6월 첫째 주 갤럽 조사에서 통합당 지지율이 30대에서 5%, 호남권에서 1% 등 초라한 성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행보다.

김 위원장이 연일 ‘충격 요법’으로 정치권을 흔들고 있는 것은 대중에게 소외됐던 통합당 쪽으로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개혁 이슈로 시선을 모으며 호감도와 지지율을 끌어올려서, 붕괴 수준인 당을 정상화시켜 다음 대선을 치를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는 계획이다. 지난 4월 총선 직후 메트릭스가 실시한 정당 호감도 조사에서 통합당에 대한 비호감(73%)은 민주당(37%)의 두 배 정도였다. 정당 지지율도 최근 갤럽 조사에서 통합당(17%)은 민주당(43%)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쳤다.

연말까지 지지율 35% 달성이 관건

하지만 허진재 한국갤럽 이사는 “특정 정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 정당이 못해서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이 오르는 경우가 더 많다”며 “지지율은 워낙 다양한 변수로 움직이기 때문에 김 위원장의 ‘좌클릭’만으로 지지율이 오른다고 확신하기 어렵다”고 했다. 기본소득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국민의 평가도 아직 유보적이다. YTN·리얼미터가 지난 6월 5일 기본소득제 도입에 대한 입장을 조사한 결과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위해 찬성한다’(49%)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고 세금이 늘어 반대한다’(43%)가 비슷했다. 이념성향별로는 진보층의 63%가 찬성한 반면 보수층은 67%가 반대했고, 중도층에선 찬성(49%)과 반대(42%)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대여(對與) 이슈 선점’에선 일단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빵 먹을 자유’가 불 지핀 기본소득 논의가 정치권 전체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여권에서도 경계심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에선 “기본소득은 보수적 버전과 진보적 버전이 다르다”며 김 위원장을 겨냥해 공세에 나섰지만, 김종인발 기본소득 프레임에 점차 빠져들고 있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김 위원장의 ‘파괴적 혁신’이 제대로 시선을 끌었다”면서 “약자 동행론으로 ‘강남 부자당’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시도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배 소장은 “전례를 보면 여야가 지지율 선두 경쟁을 벌일 때엔 35%가량에서 각축이 치열하다”며 “현재 20% 안팎인 통합당 지지율이 연말까지 35%를 달성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라고 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김 위원장은 어차피 보수층이 계속 지지해줄 것으로 보고 제3의 길을 추진하고 있다”며 “9월 정기국회 열리기 전까지 약 100일간 당 안팎에서 확고하게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지 여부가 혁신의 성패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했다.

홍영림 조선일보 여론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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