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는 차탈회위크 유적지. 기원전 7100년부터 기원전 5700년 사이에 조성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인위적 거주촌이다.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는 차탈회위크 유적지. 기원전 7100년부터 기원전 5700년 사이에 조성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인위적 거주촌이다.

24년이나 흘러간 영화지만, 가슴속에 선명히 간직한 명장면이 하나 있다. 1996년 아카데미상을 휩쓴 명화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속의 감동적인 한 컷이다. 캐나다 출신 간호사 한나(Hanna)가 인도 출신 영국 사병 킵(Kip)의 초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다. 킵이 불을 붙인 신호탄을 건네면서 한나의 몸을 밧줄로 묶는다. 한나가 공중으로 끌어올려진 순간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뭔가가 눈에 띈다. 신을 찬미하는 사제와 교회를 그린 벽면의 성화(聖畫)다. 공습에 살아남은 르네상스 예술이 마치 선사시대 동굴 벽화처럼 훤히 드러난다. 곡예를 하듯 밧줄에 매달린 채 벽화 사이를 오가던 한나의 기쁜 표정, 사랑하는 여인을 지지하기 위해 밧줄로 자신을 묶어 균형을 잡던 킵.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의 따뜻하고도 잔잔한 음악과 함께 필자의 인생에 각인된 러브스토리 장면 중 하나다.

당시 영화를 본 후 이 장면에 대한 감동과 함께 두 가지 사실을 새로 알게 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복을 입고 참전한 인도인이 무려 250만명에 달했다는 점과, 한나와 킵의 영화 속 촬영 장소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란 사실이다.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작은 정보지만, 이후 필자의 인생에 크게 공헌한 사실들이다. 인도인을 만나면 250만 영국 군복 인도인에 대한 얘기를 물어본다. 대부분이 놀라면서 반긴다. 역사 속에 사라진, 아무도 몰라주는 ‘2류 시민’ 250만명에 대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인도인의 가슴을 열기에 충분하다. 아레초는 이후 이탈리아에 갈 때마다 들르게 된 단골 명소다.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무려 50편이 넘는 영화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지만, 공간적으로 익숙한 곳에서의 장면이 한층 더 오래간다. 반세기 전 한국 영화의 거리 풍경을 통해 흑백시대 추억을 되살리는 식이다.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차탈회위크(Çatalhöyük)’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계기는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50대 프랑스인이다. 대화를 나누던 중 2012년 차탈회위크가 세계문화유산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신석기에서 청동기에 걸친 유물·유적이 발견된 곳이라는데, 인류가 발견한 최고(最古)의 집단거주촌이라는 설명이다. 동굴 같은 자연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집단촌이라고 한다. 도시 규모는 아니지만, 수백 명 단위의 거주지라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지정된 BC 7100년 유적지

차탈회위크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 속의 벽화다. 왠지 신호탄 불빛과 함께 드러났던 어둠 속의 벽화가 어두컴컴한 고대 집단촌의 이미지로 연결됐다. “기원전 71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고대 집단촌에도 인간의 그림이 있을까?” 필자의 궁금증에 대해 프랑스인은 엷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물론 있다. 동굴에 그려진 인류 최초의 그림은 기원전 4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인위적 집단촌에 그려진 그림은 터키 차탈회위크가 최초다. 직접 가서 보길 바란다.”

이후 차탈회위크는 필자의 인생에서 꼭 찾아가 봐야 할 ‘예정지’로 새겨졌다. 그러나 계속 미뤄왔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단 터키 이스탄불에 내려, 다시 에게해 고대도시 이즈미르(Izmir)로 날아가야 한다. 이후 자동차로 쉬지 않고 8시간 정도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달려야 만날 수 있다. 주변에 다른 관광지도 없기 때문에 아예 작정하고 가지 않을 경우 들르기 어려운 곳이다. 오래 미뤄왔던 생의 계획이 성사된 것은 전염병으로 인한 터키 망명생활 덕분이다. 그동안 중단됐던 이동의 자유가 허용된 지난 6월 초, 곧바로 차탈회위크로 달려갔다. 추정컨대 이곳을 찾는 방문객이 극히 드물 듯했다.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이 전염병 뉴노멀(New Noraml) 시대의 상식이다.

차탈회위크 유적지의 벽화. 새가 인간의 머리를 뜯어먹은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차탈회위크 유적지의 벽화. 새가 인간의 머리를 뜯어먹은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맑은 물로 채워진 수로의 고장

차탈회위크는 터키 아나톨리아 한복판에 해당하는 코냐(Konya)를 거쳐 들어간다. 코냐는 비잔틴 유물과 터키 이슬람의 원형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도시로, 고대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였던 곳이다. 차탈회위크는 코냐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경운기용 좁은 농로 같은 길로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 차탈회위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0년대 초다. 영국인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됐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1세기 들어서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차탈회위크로 향하는 포장길이 들어선 것이 불과 2~3년 전이다. 관광지와 무관한, 소수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만 찾던 비밀스러운 오지가 차탈회위크다.

차탈회위크를 찾아가면서 인상 깊었던 풍경은 물이다. 코냐 근처의 척박한 지형과 달리, 곳곳에 긴 수로가 들어서 있다. 바로 마셔도 될 듯한 투명하고 신선한 물이 수로에 채워져 있다. 지구 모든 생명체 가운데 인간만이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미(美)다. 동물들은 아무리 ‘인간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미가 뭔지 모른다. 가까이 하고 싶고, 다시 한번 더 보고 아끼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오해하기 쉬운데, 미의 출발점은 이성(理性)과 무관하다. 인간의 오감에 기초한 감성적·감각적 기준에 의한 판단이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기본요소다. 머리가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맡는 것이 미를 이해하는 단서다. 이성으로서 미를 이해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에나 등장한 신학문이다.

인류가 최초로 느낀 미의 대상이 무엇이었을까. 지식·이성이 만들어낸 관념적 미를 제외할 경우, 들판의 꽃이나 밤하늘의 별 같은 자연의 신비가 떠오른다. 푸른색 보석이나 금장식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한참 뒤에 등장한 ‘권력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물(水)이야말로 인간 개개인, 나아가 집단이 느낀 ‘미의 원조’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가끔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365일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는 아름다움이 물이다.

거주하는 집 방바닥에 묻은 사자들

물은 인간 생존의 필수 요소다. 풀이 자라고 동물과 식량도 확보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우물 하나만 있어도 수십, 수백 명이 몰려든다. 따라서 문화·문명도 물과 함께 시작된다. 물은 소리도 동반한다. 더불어 맑고 깨끗한 형태로 흘러간다. 생명체의 기본 요소로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요소가 개입된 자연의 신비다. 한국인에게 맑고 깨끗한 물은 어디에 가도 접할 수 있는 흔하고도 넘치는 공기 같은 존재다. 터키나 이스라엘, 이집트 지역은 다르다. 물은 특별한 곳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신성한 존재다. 신이 내린 천국, 즉 파라다이스의 기본 조건이 바로 물에 있다. 물을 기반으로 한 자연과 동물의 조화가 천국의 모습이다.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투명하고도 잔잔한 물을 통해 우주의 비밀이 인간의 가슴속에 밀려들었을 것이다. 물론 깨끗한 물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육신과 정신도 정화될 수 있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한 자아의식도 생기게 된다. 이집트에서 보듯, 고대 인류의 대부분은 물을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미의 대상으로서의 물은 그 같은 체험과 과정 속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집단촌 차탈회위크 주변은 투명하고도 정결한 물로 채워져 있다. 아름다움을 이해한 고대 인류의 본능적 ‘심미안’이 배경에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허름한 공간’. 차탈회위크에 도착한 순간 느낀 첫인상이다. 곳곳에 유네스코 문양이 크게 새겨져 있지만,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철제 카페 메뉴판이다. 퇴색된 페인트로 장식된 메뉴판이 차탈회위크 입구 바로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그나마 카페는 폐업 상태다.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잊힌 인류의 흔적이다. 시골 곳곳에 버려진 폐가 같은 분위기가 차탈회위크 주변에 표류한다. 차탈회위크는 뻥 뚫린 언덕 위에 들어서 있다. 초대형 철제 보호장치가 언덕 위 차탈회위크 유적지 전체를 감싸고 있다. 크게 두 군데 유적지가 발굴된 상태다. 안으로 들어서자 고대 거주지의 흔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근처 충적지 진흙과 짚으로 구성된 집이다. 어릴 때 본 한국식 초가집과 비슷하다. 단층으로, 집과 집 사이의 틈이 없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큰 박스 안에 미로 같은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형태다.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집을 통과해야만 한다. 아예 지붕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따라서 개인 프라이버시와는 전혀 무관한 공간이다. 모두가 서로 잘 안다고 볼 수 있다. 전시용 사다리가 유적지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당연하지만, 큰 박스 같은 외부를 제외할 경우 창(窓)이 없다. 밤이 되면 곧바로 어둠에 빠져드는 생활을 했을 것이다.

차탈회위크 거주지에서 주목할 곳은 집의 바닥 부분이다. 깊이 50㎝, 길이 1m 내외의 긴 구멍이 곳곳에 있다. 시체를 파묻은 곳이다. 차탈회위크 집단촌의 특징이지만, 죽은 사람은 자기 집 방바닥에 매장했다. 병사한 부모는 물론 사산한 자식도 묻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배경에 있을 듯하다. 차탈회위크의 기반은 원래 언덕이 아닌 평지다. 고대 인류가 죽은 사람들을 자신의 방 안에 묻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방바닥이 위로 올라갔다. 대략 평지에 비해 20m 정도 올라간 상태다. 따라서 언덕 아래 땅을 파들어갈 경우 지하 어딘가에 또 다른 고대 집단촌이 나올 수 있다. 현재는 두 군데만 발굴된 상태지만, 앞으로 100년 뒤에는 수십 군데로 늘어날 수도 있다. 차탈회위크는 터키어로 사람의 ‘차탈(Çatal)’과 집단촌의 회위크(höyük)를 결합한 조어다. 대략 기원전 7100년부터 기원전 5700년 사이의 유물·유적이다. 무려 1400여년간이나 이어진, 인류의 최장수 거주지 중 하나다.

차탈회위크 유적지 인근의 야생 밀밭.
차탈회위크 유적지 인근의 야생 밀밭.

새가 머리를 뜯어간 그림의 의미

차탈회위크에서 특히 눈여겨본 것은 벽화다. 프랑스인의 말처럼 집단촌 곳곳에서 벽화가 발견됐다. 보호·보존을 위해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진 상태지만, 복제된 벽화가 차탈회위크 전시관에 들어서 있다. 기대했던 대로, 손바닥 그림이 눈에 띈다. 손바닥은 인류 초유이자 전 세계 고대인이 남긴 공통의 예술이다. 동물 그림도 있지만, 인도네시아, 프랑스, 스페인, 남미 어디에 가도 볼 수 있는 인류 공통예술이 손바닥 그림이다. 손바닥에 칠을 하거나 숯을 뿌린 뒤, 곧바로 벽이나 천장에 밀착해 남긴 예술이다.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행위예술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예술활동이었던 것 같다. 신에 대한 기도와 건강을 기원하는 주술적 이유가 손바닥 그림 탄생의 배경일 듯하다. 물론 인간 개개인을 상징하는 자아의 상징이자 영역 확인의 의미라는 점도 있다. 손바닥은 21세기 생체인식에 동원되는 수단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미 수만 년 전 인류가 행했던 ‘본능의 부활’일지 모르겠다.

벽화 가운데 인상 깊은 것은 큰 새와 인간에 대한 그림이다. 10m는 됨 직한 익룡(翼龍)에 준하는 새가 큰 날개를 편 채 인간을 공격하는 그림이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새의 날개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놀라운 것은 공격당한 인간의 모습이다. 머리가 없다. 마치 새가 인간의 머리를 낚아채 잡아먹은 듯한 느낌이 든다. 설명문을 보니까 시기적으로 인간의 머리를 뜯어먹을 만한 큰 새는 없었다고 한다. 익룡은 6600만년 전에 생존한 동물이다. 그렇다면 왜 새와 인간의 묘한 조합이 ‘구체적’으로 그려졌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죽음을 조류로 연결한 고대 인류의 세계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머리가 떨어져나간 인간의 몸을 보자. 움츠리고 바짝 오그라든 상태다. 고대 무덤의 특징이지만, 몸을 펴지 않고 움츠린 상태로 땅에 묻는다. 땅을 넓고 깊게 팔 만한 도구가 없었던 시대란 점을 감안하면, 힘들게 땅을 판 뒤 제한된 공간에 거의 쑤셔박듯이 매장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은 인간이 새와의 접점을 통해 하늘로 날아간다는 상상력의 결과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머리는 왜 없을까?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죽은 부모나 자식의 머리만 따로 보관해 방 안에 전시해뒀다고 한다. 영혼이 집 안에 항상 떠돈다는 생각이 지배했을 것이다. 육신은 하늘로 올라가지만, 영혼은 후손들과 함께한다는 세계관이다. 인류 최초의 예술은 ‘펀(Fun)’과 전혀 무관하다. 신, 죽음, 자연에 대한 경외가 전부다. 사냥 장면을 담은 차탈회위크의 다른 벽화를 봐도 마찬가지다. 무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큰 동물을 사로잡으려는 인간의 ‘거룩한 생존기’가 표현돼 있다. 사냥 중 하이에나에게 물리는 장면도 있다. 하루하루가 생존인 것은 물론, 신과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하지만 치열한 삶이다.

새들과 공생하는 야생 밀밭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은 밀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곳곳에 뿌려진 야생 밀이 인류 먹거리의 출발점이다. 사방팔방 자라는 야생 밀 덕분에 차탈회위크 집단촌도 가능했을 것이다. 100%는 아니지만, 들판의 야생 밀을 통해 어느 정도 먹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끝없는 밀밭은 차탈회위크 언덕 주변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자세히 보니 한국의 논밭과 다른 풍경 하나가 눈에 띈다. 밭 곳곳에 작은 나무들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논밭에서는 나무를 찾기 어렵다. 쌀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공간을 차지하는 장애물들은 전부 없앤다. 터키를 비롯한 에게해, 지중해 밀밭은 다르다. 곳곳에 활엽수 나무가 들어서 있다. 왜일까? 인간과 밀밭 사이 나무에서 쉬려는 새나 동물을 배려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귀를 기울이면 밀밭 전체가 새소리로 시끄럽다. ‘국민학교’로 불리던 유년기 시절, 논밭의 참새 쫓기가 가을철 야외수업 중 하나였다. 추수 후 떨어진 곡물 줍기도 연례행사였다. 즐거운 추억이지만, 당시 새는 곡물을 쪼아먹는 해로운 동물이었다. 야생 밀이 넘치는 아나톨리아에서 보면 여유와 배려가 없는 문화로 비칠 수도 있다. 9000여년 전 차탈회위크 주민들은 물론, 2020년 터키인 역시 새와 공생한다. 사후 인간 모두가 새처럼 하늘로 올라간다는, 까마득한 시대에서부터 이어진 ‘본능적 신앙’이 공생의 이유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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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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