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 6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논의하고 있다. ⓒphoto UNHRC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 6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논의하고 있다. ⓒphoto UNHRC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 1950)는 ‘조선의 국보(國寶)’라는 평가를 받아온 역사학자이자 국학자이다. 위당은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 상하이 등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으며 광복 이후 연희전문·이화여전 등에서 한국사와 국문학을 가르쳤다. 광복절을 비롯해 삼일절·제헌절·개천절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가 1948년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간청으로 초대 감찰위원회 위원장(현재 감사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위당은 1950년 7월 말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에 피랍됐다. 당시 16세였던 위당의 막내아들인 정양모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인민군이 내려올 때 부친은 혼자만 피란 갈 수 없다면서 집에 머물렀다”며 “인민군이 한여름 홑바지 저고리 차림의 부친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북한 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위당은 1950년 9월 7일 황해도 서흥(신막)에서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반면 정양모 회장은 위당이 함경도까지 인민군에 끌려가다가 10월께 병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위당의 시신은 북한 정권이 평양에 조성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손해배상 소송 제기한 납북 피해자 가족들

정 회장을 비롯해 납북 피해자 후손들이 지난 6월 25일 서울중앙지법에 북한 정권과 김정은을 상대로 육체적·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6·25전쟁 납북 피해자 후손들이 북한 정권과 김정은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은 사상 처음이다.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은 손기정 선수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당시 일장기를 삭제한 이길용 동아일보 기자, 국내 등록 1호 변호사인 홍재기씨, 김윤찬 전 판사, 김명배 전 마포형무소 형무부장, 이남운 철도 기관사, 송종환 전 대한해운공사 총무과장, 강재성 전 사법서사, 이용준 대전 철도 사무원, 기업인 김영일씨 등 10명의 납북 피해자 후손 13명이다. 위당 등 납북 피해자는 북한의 기획 납북 의도에 따라 6·25전쟁(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7일) 당시 강제로 납북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말한다. 총리실이 2017년 4월 작성한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납북 피해자들은 총 9만4121명에 달한다. 이들은 북한 정권과 김일성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이 70년이 됐지만 지금까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의 법률 대리를 맡은 변호사 단체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은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 정권은 민간인들을 납치하고도 지금까지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행방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변은 “이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 제7조가 정하는 ‘강제실종’에 의한 반인도범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불법행위(인권침해)”라며 “전시 납북 행위는 전시 민간인의 강제연행을 금지한 제네바협약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태훈 한변 회장은 “납북 피해자 후손들은 지난 70년간 피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며 “정부의 대책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북한 정권과 그 대표자 겸 김일성의 상속인 김정은을 피고로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후손들은 총 3억4181만8000원을 청구액으로 제시했다. 한변은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낸 뒤 ‘웜비어식’ 배상청구에 나설 방침이다. 2015년 북한에 억류된 뒤 2년여 만에 혼수상태로 송환된 직후 숨진 미국 대학생 고(故)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미국 법원의 배상 판결을 근거로 북한 정권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고 있다.

지난해 6월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법원 출석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지난해 6월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단법인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법원 출석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연합

돌아오지 못한 한국군 포로 최소 5만명

6·25전쟁 납북 피해자 이외에 북한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들도 대부분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2월 발표한 보고서에 6·25전쟁 당시 8만2000명의 한국군이 실종됐으며, 이 중 5만~7만명이 북한 등에 포로로 억류됐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명시했다. 보고서에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휘한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한국군 포로 4만명을 데려갔다고 밝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COI는 보고서에서 정전협정으로 1953년 4월과 1954년 1월 사이 한국으로 송환된 국군 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면서 최소 5만명의 한국군 포로가 송환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COI는 이들 중 500여명의 생존자들이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국군 포로들 중 일부는 1994년 고(故) 조창호 중위의 귀환을 시작으로 1997년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탈북해 국내로 귀환했다. 국내 귀환한 국군 포로들은 2014년 4월 기준 80명이지만 현재 20여명만이 생존해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2000년까지 북한 정권에 납북돼 아직 송환되지 못한 억류자 역시 516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9년 12월 11일 KAL기 피랍 납북 피해자들(황원 MBC PD 등 11명)이 있다. 당시 김포에서 출발해 강릉으로 가던 KAL 여객기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됐으며 이후 승객 및 승무원 39명은 송환됐으나 11명은 끝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 이외의 납북자 대부분은 조업 중 납북된 어부들이다. 북한 정권은 또 2010년대 들어 중국 등에서 한국 국민 7명(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고현철, 김원호, 함진우, 신원미상 1인)을 납치했는데 이들 역시 송환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북한 정권이 한국 국민을 대거 억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권변호사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까지 김정은과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납북 피해자 문제를 거론조차 한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도 지금까지 남북 당국자회담이나 대화에서 납북 피해자 문제를 제기한 적이 거의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물론 노무현 정부 때와 비교해볼 때 문재인 정부가 인권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총리회담 및 장관급회담 등 최고위급에서 납북 피해자 문제의 해결 필요성을 총 18차례 제기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남북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 및 회담을 통해 같은 문제를 각각 3차례 제기한 바 있다.

한국인·일본인 납북자 즉각 송환 촉구

문재인 정부는 국제회의에서도 납북 피해자 문제는 물론 북한 인권조차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난 6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북한인권결의안을 표결 없이 ‘합의’로 채택했다. 북한인권결의안은 2003년 처음 채택된 뒤로 현재까지 18년 연속 통과됐다. 47개 회원국의 일원인 한국은 이번 결의안 채택에 찬성했지만, 결의안의 공동제안국에서는 빠졌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 이래 2008년부터 11년간 결의안 공동제안국이었지만 지난해부터 2년째 발을 뺐다. 특히 이번 북한인권결의안에는 사상 처음으로 북한이 한국인과 일본인 납북자를 즉각 송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결의는 “피랍자와 가족이 겪고 있는 오랜 시간의 고통과 북한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엄중한 우려를 표한다”고 지적했다. 결의는 이어 “북한이 강제 실종과 관련한 모든 의혹을 풀고, 피랍자의 생사와 소재에 대해 가족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고, 되도록 이른 시일에 전 피랍자와 관련한 모든 사안을 해결하며, 특히 모든 일본인과 한국인 피랍자를 즉각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결의도 납북 문제를 다뤘지만, 북한에 납북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행동을 촉구하고 ‘일본인과 한국인 피랍자’를 명시해 즉각 송환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당사국이자 피해국인데도 불구하고 결의안 공동제안국에서 빠졌다. 납북자 생사 확인과 송환은 국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책무임에도 문재인 정부는 이를 외면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규정한 헌법도 무시한 셈이다. 심지어 문 대통령은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취임 이후 4년 만에 처음 참석해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를 맞이했지만 북한에 살아 있는 국군 포로에 대해선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또 “우리는 두 번 다시 단 한 뼘의 영토, 영해, 영공도 침탈당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침탈의 주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6월 25일 ‘한변’이 6·25전쟁 납북 피해자들을 대리해 김정은과 북한 정권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25일 ‘한변’이 6·25전쟁 납북 피해자들을 대리해 김정은과 북한 정권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photo 뉴시스

한국, 유엔 북한결의안 공동제안국서 빠져

문재인 정부의 이런 입장에 대해 국제인권단체들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은 “한국은 한때 매우 중요하고 효과적인 북한 인권 개선 방안들을 만들어내는 유엔 회원국들의 비공식적 연합 가운데 핵심 일원이었다”면서 “문재인 정부는 한국의 그런 입지를 포기했다”고 밝혔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문재인 정부는 현재 김정은 정권을 달래는 데 온통 힘을 쏟고 있다”며 “한반도 통일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간의 통일이 아니라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인데, 문재인 정부가 이런 사실을 잊었다”라고 비판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 라이츠워치의 필 로버트슨 아시아 담당 부국장은 “문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은 그가 옹호해온 모든 인권 원칙을 저버리는 것으로 가장 잘 특징지어진다”면서 “북한 정권과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문 대통령의 부끄러운 유화책은 북한의 끔찍한 인권 기록에 책임을 물으려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진지한 노력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로버트슨 부국장은 “문 대통령의 소심한 대북 접근법은 북한 당국의 더 큰 경멸과 적대감을 불러왔을 뿐”이라면서 “문재인 정부는 당근뿐 아니라 채찍도 함께 갖춘, 그리고 북한 정권이 저지르는 끔찍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지지하는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또 문재인 정부가 ‘대북전단(삐라) 살포 금지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로버트슨 부국장은 “문재인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전면 규제하는 대신 북한 정권에 주민들이 볼 수 있는 것들을 검열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로버트슨 부국장은 “탈북자들의 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만큼 이를 존중하고 남북 주민들이 검열 또는 제한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줄 것을 촉구해야 한다”면서 “대북전단 살포 활동은 비교적 무해한 표현의 수단으로 문재인 정부가 이를 인권존중의 일환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슈아 스탠튼 미국 인권변호사는 “대북전단 살포는 비폭력적인 시위 형태로,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면서 “대북전단 살포는 세계인권선언 제19조에 보장된, 국경을 초월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은 “이들 탈북자 단체들이 문재인 정부로부터 부당한 조치를 당하게 된다면 국제인권단체들이 힘을 모아 이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잔 솔티 미국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지구상에서 한국보다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더 큰 도의적 책임이 있는 나라는 없다”며 “한국 대통령이 북한 주민들의 안전보다 김정은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임명도 안 해

문 대통령은 과거 정권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선 사과 및 국가적 보상을 약속해왔다. 하지만 북한 인권에 대해선 아예 침묵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탈북자나 납북 피해자 가족들을 면담한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외교부의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도 지금까지 임명조차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인권법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됐다.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북한 인권 실태를 조사하는 핵심 기관인 ‘북한인권재단’의 이사 추천을 미루고 있다.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은 “문 대통령은 현재 북한 인권 정책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면서 “비무장지대(DMZ) 북쪽의 수많은 주민이 김정은 정권의 폭정 아래 고통받고 있는데도 이런 상황을 걱정하거나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국제인권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과 북한 정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북한 정권과 김정은으로부터 상응한 선의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무튼 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세계인권선언문부터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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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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