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큰 병폐 중 하나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다.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냐, 아니냐. 노조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기준에 따라 처우가 하늘과 땅이다. 약 10%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의 정규직이면서 노조를 가진 특권적 노동자다.

일단 이 집단에 진입하면 전투적 노조를 앞세워 고용안정, 높은 임금, 다양한 복지 등이 보장된다. 이렇게 진입 자체가 거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 신분제의 특징이다. 신분제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여 사회의 역동성을 갉아먹는다. 이런 망국적 현상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를 차분하게 따져보려는 시도는 별로 없다.

마침 한 재외 한인 학자가 이 문제에 천착하여 아주 인상적인 연구서를 내놓았다. 바로 호주국립대 김형아 박사의 ‘한국의 숙련 노동자: 노동귀족을 향하여’(Korean Skilled Workers; Toward a Labor Aristocracy·2020)다. 이 책은 근대화 시대에는 산업 전사(industrial warriors)였던 숙련 노동자들이 민주화 시대에는 골리앗 전사(Goliat warrior)로, 오늘날에는 노동귀족(labor aristocracy)으로 바뀐 과정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동아시아의 발전론에서 ‘강력한 국가, 허약한 노동’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노동자의 역할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한국의 발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국가, 기업(특히 재벌), 노동의 역학관계를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1970년대에 방위산업을 필두로 대대적인 중화학공업정책을 펼치면서 대규모 기능인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그래서 정부는 기술고등학교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다양한 기술훈련기관을 세웠다. 또한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자체 기술교육제도를 의무화하기도 했다. 여기에 장학금 제공, 생활비 보조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한편, 졸업 후 군 복무를 대신하여 지정된 산업체에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산업 종사와 국방 임무를 동일시한 것이다. 여기로부터 나온 개념이 바로 산업 전사다.

당시 노동환경은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이었다. 그런데도 가난한 시골 출신의 청년들은 사회적 상승을 꿈꾸며 열악한 조건을 감내하고, 오히려 자부심을 가졌다. 실제로 그들은 국내외 산업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중산층으로 발돋움했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약 200만명이 각종 기술교육을 이수하고, 조국 근대화의 일꾼, 즉 산업 전사로 활약했다.

산업 전사들은 ‘잘살아 보자’는 일념으로 경제적 이해에 민감했다. 사실 그들은 어느 정도 체제의 수혜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焚身)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저항도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저항은 처음에는 수도권의 경공업에 집중되었다. 울산, 창원, 마산 등 산업 전사들의 중화학공업 지역은 198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 노동운동의 무풍지대였다.

전두환 정부는 노동에 강력한 억압을 가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노동운동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수도권의 경공업에 ‘위장취업’을 하거나 아예 ‘학출(學出)’ 노동자로 변신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취업조건이 까다롭고 지리적으로 격리된 중화학공업 지역에도 점차 위장취업자와 학출 노동자가 침투하여 노동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처럼 이론과 현장이 결합하면서 억압적 노동환경에 대한 산업 전사들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드디어 1987년 6·10 민주항쟁과 6·29선언을 계기로 중화학공업 지역에서도 민주화 열기가 불을 뿜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밀집생활을 통해 키워온 특유의 단결력을 바탕으로 대폭적인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대형 골리앗 타워에까지 올라가 강력한 투쟁성을 과시했다. 순응적인 산업 전사가 순식간에 투쟁적인 골리앗 전사로 변신한 것이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대규모 노동투쟁이 이어졌다. 그 기간에 임금상승, 노동시간 단축 등 처우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재벌들 역시 1980년대의 호황 덕분에 그런 부담을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그러나 곧이어 공산권 붕괴로 민주화운동이 방향을 잃고, 신자유주의 물결로 기업은 경쟁력 압박을 받았다. 이런 새로운 국면을 맞아 학출 노동자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 학계, 기업, 사회운동 등으로 옮겨 가고, 일부는 정치권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 정부는 세계화 캠페인을 벌이고 기업은 기업문화운동에 나섰다. 그것은 신경영 전략, 노사관계 재설정, 품질관리운동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발언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 우선(company-first)’ 사고다. 당연히 자본의 입지는 강화되고 노동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조는 광범위한 연대보다 회사별로 각각 실리 확보에 집중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런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의 처방전을 받아들여 더욱 강력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한국은 재벌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간의 국가 주도의 자본축적 시대는 재벌 주도의 자본축적 시대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해 재벌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었다.

한편 정부는 세계화 시대의 기업 경쟁력 제고라는 명분으로 사내 하청 노동 등 비정규직을 대폭 허용했다. 이 와중에 재벌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전투적 쟁의를 통해 임금인상, 고용보장, 복지향상 등 자기 이익을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런 풍족한 처우는 비정규직의 희생에 바탕을 둔 것이다. 비정규직은 고용보장 등 정규직의 이익을 위한 완충장치로 악용되었다.

1980년대 민주화 물결 속에서 탄생한 골리앗 전사들은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사회적 봉쇄(social closure) 전략을 채택하여 노동자 연대를 외면하고, 기업별로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는 데 골몰했다. 사회적 봉쇄란 자원을 독점하고 충원을 제한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화하려는 전략을 가리킨다. 이는 필연적으로 배제와 강탈에 근거하게 된다. 이런 특성이 바로 오늘날 이중적 노동시장의 적나라한 본질이다.

이 책의 초점은 ‘중화학공업의 남성 숙련 노동자’다. 그들은 시대에 따라 산업 전사에서 골리앗 전사로, 그리고 노동귀족, 즉 특권적 노동계층으로 변모했다. 특히 오늘날 노동귀족은 정부의 방관 아래 정규직 노동자와 재벌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산물이다. 이로 인한 이중적 노동시장은 한국 사회를 퇴행적 신분제 사회로 전락시켰다.

여기서 논의를 조금 확장해 보면, 전통적 숙련 노동자는 점차 퇴조하는 가운데 공무원, 공공기관 종사자, 교사, 전문직 등이 양대 노총(특히 민주노총)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이런 집단들도 명분은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사회적 봉쇄 전략에 편승했다. 더구나 역설적인 것은 이른바 진보정치가 그런 ‘귀족’ 집단을 핵심적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효과적인 공공정책이 나오기 어려운 노릇이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는 사회적 봉쇄와 승자독식으로 얼룩진 사회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다. 심지어 널리 연대를 추구해야 할 노동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이런 승자독식 구조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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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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