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골프장 맞은편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태릉’. ⓒphoto 이동훈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골프장 맞은편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태릉’. ⓒphoto 이동훈

지난 8월 4일, 서울 노원구 태릉골프장에 아파트를 신규 공급하는 계획을 앞세운 ‘서울권역 등 수도권 주택공급 확대방안’(8·4대책)이 발표되면서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훼손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국방부, 서울시 등 관계 기관 합동으로 아파트 1만가구를 짓겠다고 발표한 태릉골프장 바로 앞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이 자리하고 있다.

태릉과 강릉을 비롯해 국내 18개 지역에 산재한 조선왕릉 40기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스페인 세비야 총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 중 문정왕후 윤씨의 무덤인 태릉은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조선왕릉 8기 중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중종 사후 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걸이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직후인 같은해 12월에는 태릉 초입에 ‘조선왕릉전시관’이 들어서기도 했다.

태릉 바로 옆에 자리한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의 무덤으로, 약 1.8㎞의 울창한 숲길로 이어져 있다. 태릉과 강릉은 최대 1만가구 아파트가 공급될 예정인 태릉골프장과 왕복 6차선 화랑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태릉골프장 아파트 조성 시 경관차폐

지난 7월 31일 찾아간 태릉 초입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이란 명성답게 서울에서 보기 드문 우거진 숲을 드리우고 있었다. 숲으로 우거진 길을 한참 올라가야 묘역의 경계를 뜻하는 홍살문이 등장한다. 높다란 봉분은 홍살문보다 한참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과거 인기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이기도 한 문정왕후의 무덤은 다른 왕릉보다 2배가량 큰 문·무인석들이 보호하고 있어 생전 권력의 크기를 가늠하게 했다. 이 왕릉 주변은 바로 앞 태릉골프장과 육군사관학교 덕분에 그동안 주변 개발이 지연돼 조성 당시와 다름없을 정도로 경관이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이곳 바로 앞에 최고 35층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경우, 경관훼손은 불보듯 뻔하다. 특히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며느리인 인순왕후가 묻혀 있는 바로 옆 강릉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 강릉은 봉분 기준 우측에 들어선 옛 태릉선수촌 스포츠정책과학원과 좌측의 삼육대학교로 인해 태릉에 비해 이미 경관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화랑로 건너편에 있는 솟아 있는 철탑도 왕릉의 품위를 훼손하고 있다. 노원구청의 한 관계자는 “전파연구원에서 사용하는 관측장비로 국가정보원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안다”며 “이 부지까지 포함해 아파트를 지으려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철탑보다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을 경우 경관이 어떻게 망가질지는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정부는 태릉과 강릉의 경관을 완전 차폐할 정도의 초고밀 개발을 예고한 상태다. 태릉골프장의 부지면적은 약 83만㎡. 여기에 짓기로 한 가구는 1만가구다. 2018년 3기 신도시로 지정한 창릉신도시(812만㎡)에 3만8000가구를 짓기로 했는데, 이를 역산하면 10분의 1 규모인 태릉골프장에는 3800가구 정도가 적당하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개서신을 보내 “노원구민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라며 “노원구의 베드타운화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같은 민주당 소속 우원식 의원(4선·노원을) 역시 “1만호 건설로 발표된 데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실제 태릉과 강릉에서 태릉골프장까지는 봉분을 기준으로 500m 남짓 떨어져 있을 뿐이다. 과거 공공주택 공급을 목적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에도 600~700m 남짓 떨어진 곳에 대규모 아파트촌(강남보금자리주택지구)이 들어섰지만 봉분 기준 좌측에 아파트가 들어서 정면 경관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헌릉에서는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태릉골프장에 들어설 아파트는 태릉과 강릉의 봉분이 바라보는 정남쪽에 위치해 왕릉 경관차폐 우려가 더 클 수밖에 없다. 이미 태릉과 강릉에서 1㎞ 남짓한 거리까지는 1만 가구 아파트숲(경기도 구리시 갈매지구)이 밀려든 상태다.

태릉골프장 건너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강릉’에서 바라보이는 관측 철탑. ⓒphoto 이동훈
태릉골프장 건너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강릉’에서 바라보이는 관측 철탑. ⓒphoto 이동훈

5130억원 들인 원형회복 노력 물거품

태릉과 강릉 바로 앞 태릉골프장에 1만가구 아파트숲을 조성하는 것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을 전후로 태릉과 강릉의 완전성 회복을 위해 들인 그간의 노력과 모순된다는 지적이다. 과거 태릉과 강릉 사이에는 태릉선수촌, 봉분 기준으로 태릉의 우측에는 태릉사격장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왕릉의 완전성 회복을 위해 이전한 상태다.

1966년 조성된 태릉선수촌은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의 산실이었지만 원래 하나의 공간이었던 태릉과 강릉의 사이에 위치해 모자(母子·문정왕후와 명종)의 무덤을 단절시킨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강릉의 경우 태릉선수촌으로 인해 봉분 기준 우측이 상당 부분 훼손된 터라 2014년에야 일반에 개방됐다.

태릉사격장은 1971년 서울에서 개최한 제2회 아시아사격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피스톨 박’ 박종규 전 대한사격연맹 회장(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국제사격장으로 징발한 땅이다. 이후에는 야외수영장, 골프연습장 등으로도 무단전용됐는데, 총소리 등으로 경건해야 할 왕릉의 분위기를 해치는 문제도 있었다.

이 시설들은 2009년 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전후로 조선왕릉의 완전성 회복을 위해 체육계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충북 진천 등지로 대부분 이전해 간 상태다. 당시 태릉선수촌 이전 사업에 투입된 예산만 5130억원에 달한다. 태릉 인근에서 40년을 거주한 주민 한모씨는 “태릉과 강릉을 합친 대규모 공원을 조성한다면서 수천억원을 들여 태릉선수촌까지 내려보낸 마당에 바로 앞에 아파트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이 같은 반대여론에 노원구를 지역구로 둔 민주당 소속 우원식(4선·노원을)·고용진(2선·노원갑)·김성환(2선·노원병) 의원과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최근 “직접 살펴본 태릉골프장은 분명 보존 가치가 있는 땅”이라며 “이곳을 콘크리트로 채우기보다 녹지공원으로 개조해 더 많은 시민이 애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당 소속 정치인으로는 이례적으로 반기(反旗)를 들었다.

태릉 앞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석. ⓒphoto 이동훈
태릉 앞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석. ⓒphoto 이동훈

유네스코 “도시개발 유적 경관 영향”

국내 소재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2009년 6월이다. 당초 정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등 9개 능이 모여 있는 조선 왕실 최대 왕릉군인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東九陵)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다가 조선왕릉 전체로 확대 지정을 추진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당시 ‘완전성’ 평가 항목에서 “도시개발이 몇몇 유적의 경관에 영향을 미쳤다”며 능 조성 당시와 주변 환경이 현저히 바뀐 선릉, 헌릉, 의릉 등이 걸림돌로 지적된 바 있다. 이 같은 지적은 ‘조선왕릉’을 소개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의 경우,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로 빌딩숲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되면서 외딴섬처럼 고립됐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과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은 각각 비닐하우스촌과 옛 중앙정보부 청사(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위를 둘러싸면서 왕릉으로서의 완전성이 훼손된 바 있다.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의 경우, 국가정보원이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어느 정도 경관을 회복했으나,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인 헌릉의 경우 여전히 홍살문 바로 앞까지 비닐하우스가 들어차 있어 정남쪽에서는 진입이 아예 불가하다.

유네스코가 적시하지 않았지만 선릉 옆의 정릉(靖陵), 헌릉 옆의 인릉도 경관이 크게 훼손된 서울 시내 조선왕릉이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무덤인 인릉은 국가정보원의 담벼락과 마주해 있고, 왕릉 앞 부지는 국정원 주차장으로 쓰이는 실정이다. 재실(齋室)마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중종의 무덤인 정릉의 경우 강남의 빌딩숲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지만 조성 당시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 무덤 앞에는 러브호텔과 유흥주점이 대거 밀집해 왕릉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 중종의 부인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해질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 30% 경관훼손 우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주택 공급 등을 이유로 조선왕릉 인근을 아파트 부지로 낙점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태릉과 강릉 바로 앞 태릉골프장은 물론, 앞서 2018년 9월 3기 신도시로 낙점해 총 3만8000가구를 공급하기로 한 창릉신도시 역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서오릉(西五陵)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서오릉은 창릉, 익릉, 경릉, 홍릉, 명릉의 5개 무덤을 통칭하는 말이다. 서오릉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일컫는 능(陵)급 무덤 5기 외에도 그 한 단계 아래의 원(園)과 묘(墓)급 무덤도 즐비하다. 장희빈이 묻혀 있는 ‘대빈묘’가 있는 곳도 서오릉이다.

결과적으로 국내 소재 조선왕릉 40기 중 도시개발로 경관이 훼손됐다고 유네스코가 적시한 3기(선릉·헌릉·의릉)를 비롯해 그 주변 2기(정릉·인릉), 2018년 왕릉 주변이 신도시로 지정된 5기(창릉·익릉·경릉·홍릉·명릉)에 더해 태릉골프장 바로 앞 2기(태릉·강릉)까지 도합 12기의 조선왕릉이 개발 압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40기)의 30%에 달하는 숫자다. 이는 유네스코의 조선왕릉 원형회복 권고에도 역행한다. 북한 개성에 있는 조선왕릉 2기(제릉·후릉)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도 열외돼 있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는지 알 길도 없다.

조선왕릉 관리를 전담하는 문화체육관광부나 문화재청 등 관련 부처들은 청와대와 국토부의 독주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함구 중이다. 오히려 예비역 군(軍) 장성 모임인 성우회(星友會)에서 “2009년 태·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며 “태릉 일대와 화랑대(육사)는 역사적 가치와 국가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요한 지역으로 아파트 몇 채와 바꿔서도 안 되며 훼손되어서도 안 된다”며 문제제기를 하는 형편이다. 역사학계의 한 관계자는 “문화대혁명 때 베이징의 명(明)십삼릉을 봉건 잔재라고 파괴한 홍위병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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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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