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수스전투 모자이크 벽화. 수많은 창을 뚫고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기습공격에 말을 돌리는 다리우스가 묘사돼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수스전투 모자이크 벽화. 수많은 창을 뚫고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기습공격에 말을 돌리는 다리우스가 묘사돼 있다.

8월 초 오랫동안 꿈꿔왔던 인생의 숙제 하나를 풀었다. 기원전 333년 벌어진 ‘이수스전투(Battle of Issus)’ 현장 방문이다. 지중해 동부 끝 바다에 인접한 터키 이스켄데룬(Iskenderun) 지방이 2353년 전 역사의 주 무대다. 이스켄데룬이란 지명 자체가 알렉산더를 의미한다. 이수스전투는 에게해와 그리스 수준에 머물던 알렉산더를, 페르시아 나아가 아시아와 인류 모두에게 각인시켜준 역사적 대사건이다.

당시 알렉산더의 상대는 세계 최고의 대제국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다. 현재의 이란, 즉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제국이다. 왕 중의 왕이라 불린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던 중 알렉산더의 기습공격을 받고 황급히 도망간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전투(Battle of Gaugamela)에서 알렉산더와 재격돌한다.

결론은 왕조의 멸망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통합한 헬레니즘시대가 이후 전개된 역사다. 따라서 이수스가 헬레니즘시대 도래의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역사가에 따르면, 이수스전투 당시 병력은 알렉산더가 4만, 다리우스가 40만 정도였다고 한다. 1 대 10의 싸움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알렉산더 4만, 다리우스 6만 정도가 정확한 병력이었다고 추정한다. 이 싸움의 결론은 알렉산더 5000명, 다리우스 2만명 사상(死傷)이다. 2300년여 전 역사라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 얻어낸 적지에서의 대승리라는 점이다. 알렉산더가 아버지 필립 2세를 잇는 마케도니아의 왕에 정식 등극한 것도 이수스전투 승리 이후다. 잠정 통치자에서 명실상부 마케도니아의 진짜 지도자로 인정받은 테스트 현장이 이수스였다.

알렉산더는 대왕이란 호칭과 더불어 영웅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인물이다. 어린이에게 영웅은 벌의 꿀에 비견될 수 있다. 팔방미인 아이돌도 없고 배트맨, 슈퍼맨을 만날 텔레비전이나 영화도 귀하던 반세기 전 얘기다. 유년기 기억이지만, 어깨의 망토를 대신해 긴 수건을 등에 걸친 채 영웅 알렉산더를 흉내 냈다. 이순신, 역도산, 안중근에 앞서 알렉산더가 마음속의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알렉산더는 인류 최초의 실존 영웅이다. 정복 전쟁 10년 끝에 32살 나이로 한순간 세상을 뜬, 신성(神性)을 겸비한 영웅은 동양에도 전무하다. 알렉산더 이전에 통하던 영웅으로 아킬레스, 헤라클레스 같은 인물을 거론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신화나 전설을 통해 탄생한 그리스 세계관의 산물일 뿐이다. 반면 알렉산더는 생전의 행적이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고 이후 서방 지도자들이 생의 모델로 삼은 ‘젊고 친근한’ 영웅이다.

사모스 박물관서 만난 알렉산더 두상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스 조각상 보유 여부야말로 박물관의 수준을 가늠할 기준 중 하나일 듯하다. 예술의 순위를 정할 수는 없겠지만, 달콤하고 환상적인 인상주의 화가 작품 100점보다 그리스 조각상 하나에 더 눈이 간다. 그리스 조각상 하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월드 클래스 박물관이 될 수 있다. 기원전 4~5세기 작품이란 희소성도 이유겠지만, 대리석 곳곳에 표류하는 ‘혼(魂)의 목소리’야말로 그리스 조각상이 갖는 권위의 근본적인 이유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알렉산더 조각상은 그리스 예술 세계의 최대 걸작품 중 하나다.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알렉산더 조각상은 어디에 가더라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다. 필자의 환상이겠지만 조각상 근처에 가는 순간 “내가 알렉산더 대왕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젊음을 상징하는 긴 머릿결, 뚜렷한 이목구비, 큰소리로 뭔가를 외치는 듯한 모습이 특징이다. 2년 전 그리스 섬 사모스(Samos) 박물관에서 만난 알렉산더 두상이 떠오른다.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현존 세계 최대 규모의 그리스 조각상 쿠로스(Kouros)를 만나러 갔다가 구석에 전시된 두상 하나를 발견했다. 태양의 신 아폴로인지 알렉산더인지 논의 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필자의 눈에는 신이 아닌 인간 알렉산더로 느껴졌다. 보는 순간 빨려들어 갔다. 유년기 기억의 연장선이겠지만, 눈앞에 등장한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따를 영웅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백전백승 무용담이 필수요건일 듯하다. 그리스·페르시아·이집트·인도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승무패 기록의 보유자인 알렉산더는 그 같은 영역 속의 인물이다. 백전백승과 더불어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전쟁터 ‘최일선에 선’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리스 사모스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알렉산더 두상.
그리스 사모스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알렉산더 두상.

알렉산더가 종횡무진 누빈 아나톨리아 지방

최고 정예부대의 보호하에 멀찌감치 떨어져 지휘하는 구름 속의 지도자가 아니다. 직접 칼과 창을 들고 공격 최일선에 나서는, 땀과 피가 뒤섞인 아날로그 스타일 지도자다. 알렉산더는 그 같은 조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웅이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라면 그런 영웅에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진짜 영웅이 존재하는 한, 휘하의 조직이나 부하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사모스에서 접한 알렉산더 두상은, 상상컨대 최전선으로 달려가 적을 압도할 때의 한 장면으로 느껴진다. 질주하는 말(馬)과 함께 “나를 따르라”라면서 우군과 적 모두에게 알리는 모습이다. 우군에게는 힘이, 적에게는 공포로서의 알렉산더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이수스전투에 관한 기억이 유년기부터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떻게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기억 밖이지만 이순신의 한산도대첩보다 더 깊이 새겨진 추억 속의 역사다. ‘이수스 최전선에 선 백전백승 알렉산더’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길러온 ‘영웅 판타지’의 전모다.

이수스 현장까지 가는 데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비행기를 타고 근처에 내려 곧장 찾아갈 수도 있지만 알렉산더가 보여준 정복사와 삶의 궤적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찾아가는 것이 좋다. 바이러스와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겠지만 발과 땀을 통한 아날로그 체험이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 동방원정에 나선다. 아버지가 암살된 지 2년 만에 단행한, 22살 때의 역사다. 원정과 더불어 페르시아 치하의 에게해 주변 항구도시를 하나씩 점령해 나가면서 다리우스의 숨통을 조여간다. 2300여년 전 알렉산더의 흔적은 그리스 문명·문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알렉산더의 어제를 보러 간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리스 역사 현장에 들러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알렉산더를 발견해낼 수 있다. 기원전 329년 중앙아시아 원정 이전의 행적으로, 현재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지방 전체가 알렉산더 무대다. 해안과 내륙 도시를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동서 정복 역사를 창조해냈다. 당시 페르시아의 통치는 지방 실력자를 통한 간접적 지배로 이뤄졌다. 페르시아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지방 정권이 함께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지방 주요 도시를 하나씩 점령해 나가면서 페르시아를 서서히 공략해 나갔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지방은 광대하다. 도로 사정도 안 좋았던 당시 수만 명 군대를 이끌고 동서남북 행진한 알렉산더의 궤적이 믿기지 않는다. 부럽지만 무모하게 느껴지는, 20대 청년만이 할 수 있는 청춘의 역사가 알렉산더 정복사의 실체일지 모르겠다.

이수스전투 현장은 항구도시 이스켄데룬에서 북쪽으로 43㎞ 떨어진 바닷가에 있다. 당시 역사서에 따르면 피나루스(Pinarus)강을 중심으로 전선(戰線)이 펼쳐졌다고 한다. 강의 남쪽이 알렉산더, 북쪽이 다리우스 군대가 포진한 곳이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하를 보내 다리우스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 나서던 중 북쪽에서 페르시아 군대가 밀려든 것이다.

이수스 전쟁터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관한 문제는 고고학계의 오랜 과제 중 하나였다. 피나루스 흔적을 찾는 것이 기본이지만 강의 물줄기는 시간과 더불어 변한다. 크기나 깊이도 변하고 토사가 쌓이면서 주변 지형도 달라진다. 터키 정부가 이수스전투 현장으로 지정한 곳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는 얘기도 분분했다. 결과적으로 이수스 실제 현장은 구학설·신학설에 따라 이분화된다.

구학설에 따른 이수스는 이미 개발된 관광유적지다. 엘진(Erzin)이란 작은 마을이 현장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레몬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서자 벽돌로 세워진 높이 7m 정도의 고대 수도관이 눈에 띈다. 이수스전투 당시 상황과 전혀 무관한, 비잔틴대제국의 흔적이다. 비잔틴 역사는 4세기부터 시작된다. 이수스전투는 비잔틴이 생기기 700여년 이전의 역사다. 역사에 무심한 관광객에게는 비슷하게 보이겠지만, 십자군전쟁에 아이패드가 등장하는 식의 풍경이다. 피나루스의 흔적인지 폭 1m 정도의 작은 시냇물도 볼 수 있다. 비잔틴 수도관을 넘어서면, 10만 이상이 격돌했을 듯한 넓은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과 염소의 방목도 접할 수 있는 목가적인 풍경이다.

이스켄데룬에서 북쪽으로 43㎞ 떨어진 엘진이란 작은 마을 주변에서 만난 비잔틴시대 수도관 유적지. 엘진 마을이 이수스전투 현장이라는 학설도 있다.
이스켄데룬에서 북쪽으로 43㎞ 떨어진 엘진이란 작은 마을 주변에서 만난 비잔틴시대 수도관 유적지. 엘진 마을이 이수스전투 현장이라는 학설도 있다.

석유비축시설이 들어선 전투 현장

신학설에 따른 이수스 현장은 엘진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키네트(Kinet)라는 마을에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농로를 통해 접근했다. GPS를 이용해 찾아 나섰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200m 앞에서 멈췄다. 초대형 가스저장탱크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신학설의 현장은 2020년 현재 에너지 저장탱크 집산지로 활용되고 있다. 가스만이 아니라 석유비축시설도 길게 늘어서 있다. 앞으로 나갈 수 없기에 뒤로 돌아가서 살펴보기로 했다. 자동차에서 내려 가스저장탱크 뒤쪽으로 통할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저장탱크 뒤는 끝없이 이어진 레몬밭이다. 섭씨 40도에 가까운 해안가 태양 아래서 30분 정도 헤매다가 마침내 GPS가 포착한 신학설의 현장에 도착했다. 높이 20m 정도의 낮은 언덕이 증거다. 무성한 잡초와 레몬나무로 인해 정확한 형체도 파악하기 어려운 언덕이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승기를 잡은 곳으로 통한다.

알렉산더는 기병을 이끌고 전선의 맨 오른쪽 앞자리를 지킨다. 페르시아 다리우스는 이중 삼중의 보호 속에서 중앙에 들어선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23살 알렉산더는 기병 전사로, 47살 다리우스는 지휘관으로 나선다. 양측이 대치한 전선의 길이는 약 2㎞에 달했다. 전투 발발과 함께 알렉산더의 열세가 두드러진다. 병력 규모도 딸리고, 때마침 비가 내려 5m나 되는 긴 창을 주 무기로 한 알렉산더의 보병이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전선 왼쪽을 지키던 기병 역시 페르시아의 압도적인 규모에 눌려 물러선다. 알렉산더 자신은 3000명의 기병과 함께 페르시아 왼쪽 공격에 나섰다. 공교롭게도 페르시아 왼쪽 전선은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 지대였다. 공격 도중 알렉산더는 얼떨결에 높은 언덕을 차지하게 된다. 고지에 서면 눈 아래 적들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순간적이지만 알렉산더는 언덕 아래 다리우스 측의 방어망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방어망이 빈 다리우스의 급소를 발견해내고 곧바로 집중 총공격에 나선다. 정예부대에 둘러싸여 있다고 하지만 급소만 찌르면서 쳐들어오는 알렉산더 기병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위협을 느낀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의 기습에 놀라 곧바로 기수를 돌린다. 승리를 눈앞에 둔 페르시아였지만, 다리우스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순간 허물어진다.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가면 이수스전투 당시 상황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창을 뚫고 단독으로 전진하는 알렉산더와, 기습공격에 놀라서 말을 돌리는 다리우스의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돼 있다.

엘진 마을에서 10㎞ 정도 떨어진 키네트 마을 인근의 레몬밭. 이곳 평원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군대가 격돌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엘진 마을에서 10㎞ 정도 떨어진 키네트 마을 인근의 레몬밭. 이곳 평원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군대가 격돌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진짜 이수스전투 현장은 어디인가

왕이 도망간 전쟁의 결과는 뻔하다. 대패다. 당시 다리우스는 승리를 장담하며 자신의 부인과 딸도 진지 근처에 데려왔다. 어둠이 깔리면서 알렉산더의 다리우스 추격전은 멈추지만, 다리우스의 부인과 딸이 포로로 잡힌다. 훗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딸과 정략결혼을 한다.

GPS가 찾아준 언덕은 다리우스의 급소를 짚어준, 백전백승 알렉산더 신화를 만들어낸 ‘행운의 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직접 올라가 눈 아래 형세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3m 높이로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잡목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려웠다. 지중해 주변의 잡초와 잡목은 고슴도치 가시만큼이나 날카롭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옷을 뚫고 들어와 마치 바늘에 찔리는 느낌이다. 현재 고고학계가 신봉하는 ‘진짜’ 이수스전투 현장은 신학설에 근거한 키네트 마을 주변이다. 2300여년 세월과 더불어 모든 것이 변했지만, 알렉산더에게 행운을 안겨준 언덕을 통해 신학설이 주류로 정착하고 있다.

‘신이 사랑하는 인간은 일찍 세상을 떠난다.’ 고대 그리스인이 믿던 사생관이다. 나이가 들면서 닥칠 질병과 내로남불의 추한 세상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일찍 저세상으로 데려간다는 의미다. 영웅이 존재하고, 영웅이 보여준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그리던 시대의 세계관이다. 동방 원정에 나섰던 알렉산더는 기원전 323년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고향 마케도니아가 아닌, 바빌로니아에서의 객사(客死)다. 최전선에 서서 가장 먼저 적을 향해 돌진한 젊은 지도자. 백전백승 정복자로서만이 아니라, 지도자로서 청춘으로서 가야 할 정도(正道)를 모두에게 보여준 인류의 영원한 영웅이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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