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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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툰’과 ‘월스트리트’ 등을 감독하고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각기 세 번과 다섯 번이나 탄 올리버 스톤(74)의 자서전 ‘빛을 좇아서(Chasing the Light)’의 출간에 맞춰 스톤과 영상 인터뷰를 했다. 스톤이 “자서전이라기보다 회고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말한 책은 그의 40세까지의 삶을 다뤘다. 스톤은 나이보다 젊어 보였고 건강하고 늠름했는데 가끔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스톤의 부인은 한국계로 둘 사이에는 25세의 딸이 있다.

최근 출간된 올리버 스톤의 자서전 ‘빛을 좇아서’.
최근 출간된 올리버 스톤의 자서전 ‘빛을 좇아서’.

- 책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내가 40세가 될 때까지의 성장기와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는 꿈의 실현, 그리고 23세부터 시작한 영화인으로서의 경험과 무엇이 나를 작가, 각본가, 감독으로 만들어주었는지에 대한 얘기다.”

- 과거를 상세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데 자신의 일상을 적어놓기라도 했는가. “물론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다. 아버지가 매주 어떤 주제에 관해 글을 쓰면 돈을 주곤 했다. 그래서 늘 글을 쓰거나 메모를 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매일 꾸준히 일기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1982년 이전의 글은 짤막짤막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기록한 것들은 수십만 쪽에 이른다. 미주알고주알 다 적어놓았다.”

- 어느 영화로 자신이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갖고 있다고 감지했는가. “‘플래툰’을 만들면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감지했다. ‘플래툰’이 만들어진 데는 직전에 감독한 ‘살바도르’가 큰 영향을 주었다. 그전까지는 감독 수련기라고 하겠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을 다룬 ‘살바도르’를 찍기 위해 중미에 가서 미국이 자기 영향력을 위해 이곳에서 전쟁을 사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해하게 됐다. 따라서 ‘살바도르’로 인해 어떤 수고라도 감수하고 베트남전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플래툰’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투쟁이었다.”

- 책의 속편을 쓸 예정인가. “앞으로 40년간의 얘기 말인가.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난 이 책을 출판해 행복하다. 너무 긴 책은 잘 읽히지도 않는다. 내 삶의 첫 40년간의 일들을 300여쪽으로 썼다.”

- 어떤 부모 밑에서 자랐는가. “내 부모는 서로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 어머니(프랑스인)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반항자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래서 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반면에 아버지는 규칙대로 행동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규칙을 어기곤 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함께 공존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둘의 관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두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와 닮았다. 결국 둘은 이혼했는데 책에 내 부모의 얘기를 쓰는 것은 마치 신화를 쓰는 것과도 같았다. 나도 이혼을 두 번 했는데 현재 아내와는 20여년을 좋은 조화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 관계는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도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난 가족의 가치와 남녀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매우 값지게 생각한다.”

- 그럼 사랑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때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난 40대가 지나서 뒤늦게 배웠다. 종종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느냐는 것에 대해 묻곤 한다. 이 물음은 내 책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 당신은 위험을 두려워 않는 사람이라고 알려졌는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이다. 19살 때 무작정 미지의 아시아에 처음 가서 세계에 대해 눈을 떴고 21살 때 군인으로서 남들이 다 피하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전쟁에 참전한 것은 그때 내가 안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결혼해 잠깐 편안했으나 28세 때 이혼했다. 그때 영화 만드는 꿈과 함께 내 영혼도 죽어가고 있었다. 30세 때 할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당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였다. 할리우드에서의 경력이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영국인 제작자와 함께 돈을 투자해 만드는 ‘살바도르’를 찍기 위해서 엘살바도르로 갔다. 미국 영화사들은 영화 내용이 미국의 뒷마당 얘기여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영화를 만드는 매일은 위험의 연속이었다.”

- 당신은 조지 W. 부시와 케네디와 닉슨에 관한 영화를 비롯해 여러 편의 정치영화를 만들었는데 트럼프에 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는가. “그 제안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는 현재 진행 중이어서 때가 이르다. 그는 어느 영화 속 인물보다 더 극적인 사람이다. 그는 불행하게도 지나치게 극적인 사람의 요소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때로 진실과 허구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의 활동이 아직 끝나지 않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점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미묘한 일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인데 영화를 만들 때마다 논란을 자아내고 있는 내가 그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아이고 맙소사’라고 해야 할 일이다.”

- 당신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창작의 굶주림을 느낀다고 말했는데 지금도 그 허기를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 그 허기는 항상 있다. 허기는 내가 만들 영화의 주제에 달려 있다. 2016년에 만든 ‘스노든’도 창작의 큰 허기를 느낀 결과다. 그 영화는 미국에서는 투자하기를 꺼려 독일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자금으로 만들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좋은 영화다. 그러나 내가 요즘에 느끼는 창작에 대한 허기는 내 초기 성공작들인 ‘살바도르’와 ‘플래툰’을 만들 때 느낀 허기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내가 감독으로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느낀 허기를 생애 끝까지 갖고 갈지에 대해서는 나도 찾아봐야 할 명제이다.”

- 각본가와 감독을 동시에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각본을 쓴다는 것은 혼자 하는 일이다. 내 안에는 늘 각본가가 들어앉아 있다. 이에 반해 감독은 내 어머니처럼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외향적인 일이다. 각본가로서 감독의 측면을 갖고 있다는 것은 편안한 일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는 안목을 지닌 좋은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감독으로서 자기가 쓴 각본을 고쳐 써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미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어떤 때는 편집을 하다가 각본을 수정하기도 하는데 편집이야말로 다시 각본가가 되게 만드는 작업이다.”

- 당신은 미국의 해외 정책에 관해 매우 비판적인데 미국이 과거로부터 해외에 분쟁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라고 보는가. “물론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이론이다. 우리는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2차대전 후에도 미국이 소련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세계사는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또 공산체제가 붕괴된 후 더 이상 미국에는 적이 없었는데도 우리는 적이 필요해 이란과 이라크를 큰 야수로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 악몽을 만들고 있다. 이는 자기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핵의 파괴 능력을 감소시켜 좋은 목적으로 쓸 수 있는데도 이를 마다하고, 또 우리 사회를 보다 공정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이 지경이다. 이것은 다 나쁜 지도자 탓이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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