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貨泉)’. 중국 신(新)왕조에서 발행되어 통용되던 동전의 이름이다. 이 화천에서 가야의 행보와 관련된 뜻밖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신(新)은 서기 8년 왕망이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다. 그는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다가 15년만에 죽음을 맞아 신 왕조도 끝났다. 이어서 후한 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금관가야를 맹주로 한 전기 가야연맹 국가들이 한참 융성하고 있을 때다.

왕망은 그 짧은 통치기간 중 화폐개혁을 4회나 시도했고, 화천을 비롯해서 23종류의 화폐를 발행했다. 그 중에서 화천이 그나마 많이 사용됐던 것 같다. 신 왕조부터 후한시대까지 총 26년간 쓰였다. 신의 화폐로 만들어진 화천이 왕조 자체보다 수명이 더 길었던 셈이다.

화천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바오지(寶雞)라고, 신나라 왕도였던 창안(長安)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지금으로 치면 공업단지 같은 곳에서 만든 것이다. 또 하나는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바오지 화천보다 더 폭넓게 출토되는 화천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듯, 이 두 범주의 동전은 ‘화천(貨泉)’이라고 새겨진 글자만 아니라면 같은 동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외관, 재질, 크기, 무게, 제조법 등이 크게 다르다.

다양한 곳에서 출토되는 화천. 김해 출토 화천은 실물은 남아 있지 않고 1920년대의 탁본만 남아 있다. 제공: 이진아
다양한 곳에서 출토되는 화천. 김해 출토 화천은 실물은 남아 있지 않고 1920년대의 탁본만 남아 있다. 제공: 이진아

바오지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화천을 주조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바오지는 신이 망하기 전 1~2년 동안 화천을 생산했다. 구리와 철의 합금 소재로 검은 빛이 돌며, 크고 투박해서 ‘병전(餠錢)’, 즉 중국 과자인 월병 같이 생긴 동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더 많이, 널리 쓰인 화천은 바오지 제품이 아닌 것들이었다. 바오지 화천보다 적어도 7년 전에 만들어졌고, 신 왕조가 망해 바오지에서 화천 제조가 끊긴 후에도 후한에서 17년이나 더 사용됐다. 이 화천은 은은한 노란 빛을 띤 황동 재질로, 무게도 바오지 화천의 10분의 1 정도였다. 글자가 제대로 새겨져 있지 않거나 한 면 글자가 아예 없는 등 불량품이 많은 바오지 화천과 달리 만듦새가 균일하고 정교하다. 이 화천은 제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중국 역사 전문가들은 사설 주조장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추정한다.

그런데 어디서 생산됐는지 모른다는 비(非)바오지 황동 화천이 뜻밖의 장소에서 출토되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 규슈의 해안 지방에서, 그것도 상당히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다음은 화천이 출토된 곳을 표시한 지도다.

화천이 출토되는 지역과 동아시아 해류. 제공: 이진아
화천이 출토되는 지역과 동아시아 해류. 제공: 이진아

한 눈에 화천 출토는 전기 가야연맹의 영역에 집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가야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화천 유물이 출토되는 양상은, 중국 황하 유역에서부터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일본 규슈에 걸쳐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가야는 그 교역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高)퀄리티의 화천은 중국 창안을 제외하면 한반도 서해안에서 남해안을 거쳐 규슈에 이르는 지역에서만 발견되며,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 이 지역에서는 화천만 출토되며, 다른 왕망의 화폐는 발견되지 않는다.(제주도만 예외다. 제주시 인근 산지항에서는 화천 포함, 왕망 화폐 3종과 후한의 화폐들이 발견됐는데, 이는 제주도가 가야연맹의 일원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해류를 보아도 제주도는 한반도 본토와는 별도로 직접 중국과 이어지는 흐름을 갖고 있다.)

왜 그럴까? 중국 상인들이 이 지역으로 갈 때 한결같이 고품질 화천만을 골라 가져다가 썼을 리도 없고, 이 지역들이 합심해서 중국에서 화천만 수입해다가 썼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중국에선 이 화천이 생산된 흔적이 없다.

혹시 이 황동 화천은 가야에서 생산된 게 아닐까? 고품질 화천의 소재인 황동은 구리, 주석, 아연의 합금으로 마치 황금 같은 은은한 노란색을 띤다. 이런 제련법의 황동 유물은 가야 근거지였던 경남 일대, 특히 화천 출토지 인근에서 많이 발견되며 기원전 7세기 것부터 나타나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신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이곳이 아주 오래 전부터 구리 광산 및 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하며, 지금까지도 “경남동광화대(慶南銅鑛化帶)”라고 해서 한반도 최대 구리산지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제조된 황동이 기원전 1세기 무렵에야 나타나며 유물이 그리 많지 않다. ‘고려사’ 및 중국의 ‘조선부(朝鮮賦)’ 등의 기록에서 한반도의 동제품들이 신라동,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일본에 많이 수출됐고, 선망되는 고급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 있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 조에 나오는 대목이다.

“(변진에서는) 중국과 같이 동전을 쓰는데, 또한 그것을 2군(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기도 한다.”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변진(弁辰)이 가야를 말한다는 건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따라서 낙랑군(평양)에서 출토된 화천은 가야에서 공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랑군 쪽이 기온이 낮아서인지 그곳 출토 화천이 좀 더 보존 상태가 좋을 뿐, 가야 일대의 화천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낙랑군에서 쓰는 동전을 가야가 만들어줬는데 중국에도 그랬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신 왕조와 후한 왕조에서 화천 제조를 가야에 ‘외주’로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그 화폐가 가야 교역대에서 널리 통용됐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어쨌든 화천 출토지를 지도에 표시해 놓고 보면, 동아시아 해상무역 중심지 가야의 위상이 더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당시 가야의 전반적인 국격과 직결된다. 당시 가야는 여러 모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온난기를 맞아 수심이 깊어진 낙동강을 따라 바다로 나오면 일본과 중국까지 왕복 뱃길을 수월하게 해주는 해류, 고대국가에서 부(富)와 권력의 최고 기반이었던 철광과 동광, 그리고 그걸 제련하는 데 필요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제공하는 풍부한 목재. 여기에 동아시아 최장의 왕조 유지 역사를 자랑하는 알찬 국가 부여 출신들의 금속 제련 노하우, 수로를 이용한 교역 경험, 고대국가 경영 능력이 더해져,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을 테고, 그 명성은 동아시아 범위를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국토가 좁다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다. 이 시리즈 앞에서도 여러 차례 나왔지만, 기후변화 온난기엔 내륙 및 해상의 수로 조건이 원활해지고 목재도 풍부해져서 다양한 규모로 교역이 활발해진다. 이럴 경우 국토가 좁더라도 배를 잘 만들고 뱃길을 잘 이용할 줄만 알면, 교역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단 것을 인류 역사의 여러 사례들이 입증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가야는 어떤 국가로서의 위용을 갖추었을까? 화천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 보면 이 질문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답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기사 '손권의 오나라 이전 양쯔강에 한민족이 살고 있었다'에서부터 추적해 왔으며, 박창범 교수의 고대 천문관측지도가 한 눈에 보여주는, 상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가 양쯔강 중류였을 가능성 문제로 다시 연계된다.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