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상표와도 같은 덥수룩한 수염을 한 영국 태생의 액션스타 제라드 버틀러(50). 그는 우렁찬 음성의 악센트 있는 발음으로 질문에 엄숙할 정도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마치 도사가 교훈을 말하듯이 의연했는데, 인자한 마음을 지닌 거인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최근 재난영화 ‘그린랜드’에서 지구를 초토화할 혜성들의 추락을 피해 가족과 함께 안전한 피난처인 그린랜드로 도주하는 존으로 나온다. 버틀러는 LA의 자택에서 영상 인터뷰에 응했다.

- 지금 세계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 낙관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가.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삶 전반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다. 코로나19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하지만 대형 산불과 같은 환경문제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심히 우려된다. 지금 우리는 이외에도 인종차별과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이 저지르는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앞으로는 시련 끝에 이런 모든 문제가 긍정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 당신은 역경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개인적으로 재난을 많이 경험했다. 9·11테러와 태풍이 뉴욕을 덮쳤을 때 그곳에 있었고 영국에서 연쇄 폭탄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런던에 있었다. 또 말리부(LA 인근 해변 마을로 스타들이 많이 산다)의 집도 화재로 전소됐다. 이번에 코로나19 재난으로부터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이만한 것이 다행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 상황보다 더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역경을 만났을 때마다 투사의 정신으로 대처했다. 비록 대참사가 우리를 덮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긍정적으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우리는 비극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우린 한배에 타고 있는데 왜 서로 증오하고 반목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다.”

- 재난을 만났을 때 어떤 짐을 꾸려 피했는가. 또 누구를 데리고 달아났는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불이 났을 때는 먼저 불길을 피해야 한다. 혜성이 떨어질 경우 지구 저편으로 도주해야겠으나 그것도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번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와 가장 가깝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 가족과 함께 피할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때도 난 가족과 함께 자연을 찾아갔다. 바위와 강과 숲이 있는 곳에서 자연과 삶의 균형을 이해하게 됐고 내가 굉장한 그 무엇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잊었다. 진짜로 파괴적인 혜성이 지구로 떨어진다면 도시를 헤매지 않고 자연을 찾아가 거기서 위엄과 우아함으로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 영화에서 존은 훌륭한 지도자 역할을 하는데 스스로를 실제로도 지도자로 생각하는지. “지도자란 자신에게 책임을 지고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한다. 나로 말하자면 영화에서 역경에 의연히 대처하는 지도자, 투사 노릇을 자주 했는데 실제 내 삶의 여정이라고 봐도 좋다. 나는 역경에 처했을 때마다 투사 정신을 배우곤 했다. 그리고 실제의 삶과 허구의 삶이 겹치면서 연기에도 도움을 주었다. 내가 영화 속 역할에서 배운 것은 부정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한 역할 중에 가장 본받을 만한 투사는 ‘300’의 주인공인 스파르타의 투사 레오니다스다. 그를 연기하면서 고대의 투사가 지녔던 명예와 존엄을 깨달았다. 그를 연기하면서 레오니다스가 내 몸속으로 뜨겁게 파고드는 느낌을 경험했다. 자신의 소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야말로 위대한 지도자다.”

‘그린랜드’의 한 장면.
‘그린랜드’의 한 장면.

-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사후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코로나19 재난 중에 나는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졌는데 너무나 힘들었다. 그 와중에 병까지 앓았다. 지난 3년간 갖가지 건강문제로 시달려왔다. 첫 수술이 잘못돼 7번이나 재수술을 해야 했고 오토바이 사고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보면서 감동하고 고취되고 또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든 행운아라고 생각하다가도 저 어딘가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배우가 아닌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더 많이 도와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난 영화 만드는 것을 사랑하나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 이 영화는 현실도피이면서 아울러 은유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어릴 때 영화를 보면서 이 두 가지 요소를 다 깨달았는가. “영화란 모험 속으로 들어가는 현실도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험 속 영웅의 여정을 함께 걷곤 한다. 역경에 맞서면서 보다 고매한 목적과 믿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이 되는 것인데 대표적인 사람이 재난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진 해크만이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크게 압도당한다.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 가곤 했다. 우리는 이런 영화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에 대해 정의를 내리게 되고 또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나서게 된다. 내게 있어 영화란 늘 무언가 창조적인 것을 찾도록 촉구하는 매체이다. 또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환상·모험·액션영화인 ‘혹성의 위기(Krull)’ 때문이다. 비록 환상영화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었는데 꿈을 꾼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에게 ‘난 영화배우가 되고 말 거야’라고 말했다. 내게 영감을 깨우쳐준 영화 속의 영웅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보다 좋고 용감하고 또 고상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영화 속 배역을 마음속에 간직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내려놓는가. “촬영이 끝나도 2~3주간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함께 일한 사람들과 내가 연기한 인물, 그리고 영화를 촬영한 장소와 집과 같은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아니야 나는 그 친구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도 잠재의식 속에는 극 중 인물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극 중 인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영적 청소가 필요하다. 영화를 찍은 후 가장 심한 후유증을 겪은 경우는 ‘오페라의 유령’ 때였다. 영화를 찍고 어찌나 지치고 우울했는지 완전히 나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킨 뒤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