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연(38·한국명 연상엽)은 겸손해서 만나면 마음이 편하다. 그는 영상 인터뷰에서 맑고 밝은 표정으로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영화 ‘미나리’에서 1980년대 초 아내(한예리 분)와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아메리칸드림을 일구기 위해 아칸소주의 외딴 농장으로 이주한 가장 제이콥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한국계 감독(각본 겸)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의 자전적 얘기를 영상으로 옮긴 것으로,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오는 4월에 열리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도 여우조연상(윤여정) 등 몇 개 부문의 수상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제이콥의 장모 순자로 나온 윤여정은 LA영화비평가협회에 의해 2020년 최우수 조연 여우에 선정되기도 했다.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스티븐 연은 LA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미나리’는 한국에서 2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 당신의 부모도 캐나다로 갔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인데 영화 속 제이콥의 경우와 닮았다고 본다. 제이콥 역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일체감을 느꼈는가. “여러 면에서 제이콥과 일체감을 느꼈다. 이제 나도 아이들을 둔 아버지가 되다 보니 제이콥을 통해 내 아버지의 생각과 이상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름대로 아버지의 내면을 깨달았으나 커서 아버지가 되어 과거 내 아버지가 겪은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릴 때와는 전연 다른 관점으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선 제이콥과 나는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나라의 차이를 지닌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일체감을 느낀다. 더구나 난 미국의 중서부에서 자라 이런 공간을 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결론적으로 제이콥과 나는 이국에서 자기 길을 개척하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 영화를 찍으며 제이콥과 같은 이민자로서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는가. “과거의 기억보다도 영화를 만들면서 내가 직면했던 큰 문제는 내가 누구였으며, 또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다 큰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였다. 백인 위주의 미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고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면 때로 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한 정의를 이미 사회가 결정한 대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이를 내면에서 얼마나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랐다.

영화 ‘미나리’에서 한국 이민 가정 가장을 연기한 스티븐 연과 그의 장모로 나오는 윤여정.
영화 ‘미나리’에서 한국 이민 가정 가장을 연기한 스티븐 연과 그의 장모로 나오는 윤여정.

제이콥을 연기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아버지를 표본으로 삼지는 않았다. 내면으로부터 나의 개인적인 면들을 끄집어내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서 도대체 (한국인 이민가정의) 아버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진실된 인간으로서의 제이콥에게 접근하기 위해 한국인 아버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제이콥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봐야 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당신에게 문화적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한국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국적인 것이 점점 광범위하게 미국 사회 속으로 퍼져 들어가고 있다고 본다. 그중 하나가 한국 음식 축제다. 이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됐다. 데이비드 장이 이를 주도하고 있는데 그는 단순히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그것에 미국 음식을 섞어 만들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적 유산은 김치다. 김치야말로 최고의 한국적 유산으로, 늘 맛있게 먹고 있다. 이 영화의 특성은 한국에 대한 헌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새 영토를 밟고 들어서는 극중 인물들을 깊이 이해하려면 한국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 어릴 때 이민 와서 자라며 겪은 경험과 느낀 감정은 어떤 것인가. “깊고 깊은 고립감이었다. 정 감독은 아칸소주의 시골에서 자랐고 나는 미시간주에서 자랐지만 우리는 비슷한 과거를 지녔다. 부모의 구속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려고 애썼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가 없어 부모님과의 간극은 점점 더 넓어져 갔다. 부모님은 처음에 그들 시대의 고정관념과 정체성 안에 갇혀 살았다. 어릴 때 부모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에게 분명하게 연결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인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부모님도 더 이상 한국이라는 데 묶여 살지 않게 되었다.”

-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은 제각기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오는데 이민자 부모를 둔 당신의 ‘아메리칸드림’은 무엇인가. “나의 꿈은 나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 즉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자유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야말로 꿈이다. 우리가 미국에 왔을 때 아버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부모가 치른 희생과 노력으로 나는 영화인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삶을 제대로 살려고 애쓰는 인간들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꿈은 아버지, 어머니의 꿈의 연장선이다. 그것은 세대를 걸쳐 이어지는 자유라고 하겠다. 그래서 내 아들과 딸을 보면서 그들도 자신들의 인간성 속에서 보다 많은 자유를 찾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영화에서 입이 건 장모 순자로 나온 윤여정과의 관계와 조화는 어땠는가. “순자 역은 완벽한 배역이었다. 윤여정을 사랑하는데 그는 매우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이어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영화 속 제이콥은 한국에서 온 장모와 함께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장모가 싫어서라기보다 제이콥이 새 나라인 미국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기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장모가 오면 같은 한국인인 자기 속을 빤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 사람 간에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윤여정은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진 뛰어난 배우여서 걱정이 됐었다. 그래서 그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당신과 함께 일하다니 참 멋지네요. 제 한국어와 연기에 대해 솔직히 얘기해서 날 도와주세요’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게 여유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한 우아한 태도였다. 그와 함께 일한 것은 아주 재미있었고 정말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LA 자택에서 영상 인터뷰 중인 스티븐 연.
LA 자택에서 영상 인터뷰 중인 스티븐 연.

- 미국에서 아시안으로서 인간적으로 부정적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시안아메리칸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라는 두 지역 사이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집단과 개인 사이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데 때로 이 두 집단 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기 힘들다고 느끼곤 한다. 우리는 수용되기도 하고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불협화음 속에 산다는 것이 별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시안아메리칸이 늘 위협에 시달리거나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지워진 긴장과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인종차별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바라건대 점차 나아져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 AMC TV의 인기 좀비 시리즈 ‘워킹데드’를 통해 스타로 부상했는데 그동안 나온 ‘옥자’와 ‘버닝’ 그리고 이 영화 모두 다 한국인 감독의 작품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또는 자신이 선택한 것인가. “그렇게 계획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됐다. 난 굉장히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옥자’가 그 첫 영화였다. 미국에 살면서 내가 누군지 의문을 갖던 차에 한국에서 잠시나마 일하면서 내 자신이 누군지 어느 정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맡은 역이 실제의 나처럼 두 나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이어서 다소 고통스러웠다. 그 경험은 나의 한국 영화 출연 여정의 좋은 시작이었다.

‘버닝’은 마법적으로 주어진 역으로 내 생애 큰 축복이었다. 한국에서 일하려고 마음먹거나 한국인 감독 영화에만 나오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영화에 나오면서 나를 보다 충만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난 미국 감독 영화에도 나왔다.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에 충실하기보다는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역을 하고 싶다. 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역 말이다.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술가들과 함께 일하고자 한다. ‘버닝’과 ‘미나리’와 ‘옥자’에 출연한 것은 내 생애에 있어 믿을 수 없는 축복이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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