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클린룸 반도체 생산현장. ⓒphoto 삼성전자
삼성전자 클린룸 반도체 생산현장. ⓒphoto 삼성전자

미국 백악관이 인텔과 삼성전자, 제너럴모터스 등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와 완성차 업체들을 불러 4월 12일 긴급 대책회의를 연다. 반도체 공급 부족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다. 우리로 치면 국가안보실장과 경제수석이 함께 나서 반도체 공급 부족 문제를 다루는 셈이다. 사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전략 자산에 속한다. 반도체 공급 부족을 긴급한 국가 안보 문제로 보는 미국 백악관의 움직임은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미국의 산업생태계와 국가 안보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반영한다.

고민거리 된 지나친 메모리 의존도

글로벌 완성차 시장은 현재 심각한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겪고 있다. GM 북미 공장이 감산에 들어갔고, 폭스바겐과 포드, 도요타 등 주요 글로벌 완성차 업체도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하루 이상 생산을 중단한 자동차 공장은 전 세계 85곳에 달한다.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은 일본 반도체 공장의 화재와 갑작스러운 한파로 인한 미국 텍사스 공장의 가동중단으로 촉발됐다. 삼성전자도 그 피해를 봤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해외 반도체 회사들이 정보기술(IT) 기기용 칩 비중을 늘리면서 시작됐다. 글로벌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에서 70%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대만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가 생산량을 줄인 게 가장 큰 이유다.

자동차에 필요한 반도체는 갈수록 늘고 있다. 특히 자율주행자동차나 전기차는 고용량 메모리 반도체가 필수적이다. 반면에 차량용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업계는 완성차 시장의 반도체 수급난이 올 3분기까지 지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에서 파급된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는 스마트폰에서 PC, 가전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사실상 반도체가 필요한 모든 분야가 반도체 공급난이다. 사정이 쉽게 나아질 가능성도 없다. TSMC만 해도 최근 고객사에 보낸 서한에서 “지난 12개월간 모든 공장의 가동률이 100%를 상회했지만, 여전히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상태”라고 전했다.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은 반도체가 필요한 기업들에는 심각한 문제지만 반도체 제조업체들에는 유례가 없는 호경기를 의미한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는 올해 반도체 시장이 작년보다 6.4% 늘어난 4883억달러로 사상 최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시장 주력인 D램에서는 70%, 전원이 끊어져도 데이터를 보관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인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4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이나 SK하이닉스는 올해 모두 최대 실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 산업의 지나친 메모리 시장 의존은 업계의 고민거리다. D램 업황에 따라 실적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장규모도 그렇다. 메모리는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30%에 미치지 못하고 70% 이상이 비메모리 분야다. 업계에서는 시스템 반도체 수요가 앞으로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5세대(5G) 통신, 고성능 컴퓨팅(HPC),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사업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편중된 사업 구조를 바꿀 계획이다.

삼성전자가 목표대로 2030년 파운드리 사업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고, SK하이닉스도 일정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업황에 상관없이 일정한 수준의 호황을 누리는 기반을 갖게 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생산 방식부터 다르다. 메모리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든다. 반면에 시스템 반도체는 고객의 수요에 맞춰 다양한 형태와 콘텐츠를 담아야 한다. 같은 라인에서 여러 제품을 동시에 생산할 수 없다. 그래서 시스템 반도체의 생산 전략은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뀌어야 한다. 투자해야 할 자금 규모도 만만치 않다. 파운드리 사업의 지배적 사업자인 TSMC는 이미 앞으로 3년간 10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1월 발표한 올해 280억달러 투자계획까지 합치면 앞으로 4년 동안 144조원을 투자하게 된다.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10년 동안 시스템 반도체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규모가 133조원이다. 선두주자의 투자 규모가 더 크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에서 파급된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는 스마트폰에서 PC, 가전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photo 현대차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에서 파급된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는 스마트폰에서 PC, 가전 등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photo 현대차

불어닥친 반도체 내셔널리즘

그렇지 않아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는 반도체 시장에 최근에는 ‘반도체 내셔널리즘’까지 대두하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당시 로버트 스완 인텔 최고경영자는 홈페이지를 통해 바이든 당선인에게 공개서한을 띄웠다. 세계 전체 반도체 생산능력의 80%를 아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미국은 12%에 불과하다는 점, 외국 정부의 보조금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큰 불이익이 되고 있다는 점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현재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산업정책에 반영되어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 반도체 자체 생산 확대를 위한 공급망 재편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올해 1월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켜 반도체 연구개발 및 투자에 연방정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2월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를 포함한 4대 핵심 제품의 공급망을 100일간 조사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공급망 재검토 행정명령을 승인하면서 미국 반도체 육성과 자립을 역설했다. 지난 4월 1일 발표된 2조달러 규모의 초대형 인프라 건설투자 계획에도 국립반도체기술센터(NTSC) 설립 등 반도체 투자비 500억달러가 포함돼 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미국 연방정부의 직접 지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행정부 때부터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 6월 미국은 ‘반도체 생산 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이라는 첨단기술에 대한 지원책을 발표해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촉진을 위한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 계획을 밝혔다. 핵심은 2024년까지 기존에 설치된 반도체 장비 또는 반도체 제조설비 투자 비용에 대해 40%까지 환급 가능한 투자세액공제 프로그램이다. 반도체 공장과 연구시설 건설에 최대 30억달러의 연방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미국 정부의 움직임에 기업들도 발을 맞춰 대응하고 있다. 미국의 종합반도체기업 인텔은 지난 3월 20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2개의 새로운 공장을 건설해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미국이 겨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중국일 것이다.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의욕은 여전하다.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지난 3월 초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10년 동안 단 하나의 칼을 갈겠다”고 강조했다. 그 핵심이 반도체다. 미국의 제재와 압박을 받으면서도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 속에서 위기에 처한 반도체 산업을 국가가 전부 떠맡음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해서는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에서는 2019년 말 기준으로 50개 이상의 반도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투자비만 280조원이다. 미국으로서는 이런 중국을 두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주목받고 있는 기업은 파운드리 부문의 선두기업인 대만의 TSMC다. 설계가 완료된 고객사의 칩을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TSMC는 5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애리조나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TSMC가 일본에는 반도체 후공정 기술 연구시설을 만든다. 미국은 일본·대만·유럽까지 포괄하는 반도체의 반중(反中) 연대를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로서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입장을 정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사실 반도체 산업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유럽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2030년까지 140조원을 투입한다.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다. EU는 유럽 내 반도체 생산량을 글로벌 20%까지 늘린다는 목표다. 지금의 2배 이상이다. 일본 정부도 해외에 의존해온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 체제 구축에 나선다. 기업들과 손잡고 미국, 대만과 긴밀한 협력을 추진해 2025년까지 첨단 반도체 개발과 양산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허울뿐인 ‘반도체 강국’ 명성

반도체 강국이라지만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빈틈이 많다. 핵심장비는 여전히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수입해야 한다. 아직 반도체 장비 국산화는 20%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 보니 투자를 늘려도 대부분은 해외로 빠져나간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 내 반도체 장비 투자 총 157억달러 중 126억달러가 해외로 나갔다. 차량용 반도체만 해도 우리나라는 90% 이상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기술 격차는 줄고 있거나 역전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마이크론은 세계 최초로 176단 낸드플래시를 출시했다. 삼성은 아직 128단이 주력이고 176단은 개발 단계다.

치열한 기술 경쟁과 고조되는 내셔널리즘의 흐름 속에서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없다. 정부가 밝힌 2030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 1위 목표라는 것도 삼성전자의 목표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에 불과하다.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의 후속 조치로 2029년까지 차세대 시스템 반도체 연구개발에 투자하겠다는 자금 규모도 2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의 투자 규모와 비교가 불가능하다. 돈만 부족한 게 아니라 사람도 부족하다. 업계는 앞으로 3년 안에 최소한 7000명의 전문인력이 필요하다는데 정부가 가진 인력 육성 계획은 연간 1500명 수준이다.

한국 경제는 수출의존형 경제다. 수출입 규모가 GDP의 80%를 넘어 교역의존도는 선진국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2017년부터 수출 증가의 대부분은 반도체가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가 우리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다. 반도체 수출을 제외하면 한국 경제는 이미 성장이 멈춘 상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전체 상장사 영업이익의 절반에 가깝다. 우리 경제는 반도체에 목을 매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흥망에 국가 경제가 걸려 있다. 당장은 반도체 시장의 호황이 즐겁다. 하지만 비상등에는 불이 들어왔다. 위협은 자칫 치명적일 수 있다.

김상철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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