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가 디지털달러를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 디지털통화는 미국인들이 돈을 사용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에 그동안 ‘더 천천히, 더 신중하게’를 고집했던 연준이었다. 하지만 지난 5월 20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이례적으로 영상 메시지를 올려 “올여름 디지털달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계획”임을 밝혔고 연준에서 금융안정과 결제시스템 관련 업무를 책임지는 라엘 브레이너드 이사가 재차 “미국이 국제적 기준을 개발하는 과정에 있어서 디지털통화는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속도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연준의 언급은 중국을 향한 견제구다. 국제결제은행(BIS)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국 중앙은행 열 곳 중 여덟 곳 정도는 이미 CBDC(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를 개념화하고 연구하고 있다. 가장 앞선 곳은 중국이다. 지난 5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린 더블파이브 쇼핑 페스티벌 당시 상하이와 인근 쑤저우(蘇州) 주민 18만1000명은 디지털 지갑 속에 55위안, 우리 돈 1만원가량의 디지털위안화를 지급받았다. 상하이 시민들은 쑤저우에서, 쑤저우 시민들은 상하이에서 이 디지털화폐를 쓸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한 도시 내에서 지급과 소비가 이뤄졌다면 이번에는 두 행정구역을 교차해 실시한 실험이었고 지난해 가을 실시한 테스트보다 약 10배 정도 큰 규모였지만 큰 문제없이 안정적으로 결제가 이뤄졌다. 중국 정부는 “이번 파일럿은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디지털위안화를 둘러싼 각종 테스트들

디지털 법정화폐를 가장 먼저 도입하는 국가가 어디일까를 묻는다면 모두들 중국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로드맵은 나오지 않았지만 향후 1년 안에 중국 국경 내 모든 땅에서 디지털위안이 사용될 거라는 전망이 많다. 연준이나 영국은행, 유럽중앙은행 등 서구권의 중앙은행이 프라이버시 문제나 상업은행에 미치는 영향 등을 우려하며 신중하고 느리게 추진을 고민하지만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중국이 퍼스트무버로 앞서간다는 건 기존 국제통화 질서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를 공백을 만든다. 특히 국제 결제와 관련한 문제는 단순 경제 문제를 넘어선다. 현재 서로 다른 통화들 간 이뤄지는 대부분의 거래는 미국 달러를 중개자로 사용하고 있다. 미 달러화의 수요가 화수분처럼 유지되는 이유다. 디지털위안화가 확산되는 건 이런 중간 과정이 사라진다는 걸 뜻한다. 또 달러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건 국제무역에서 달러 사용량에 영향을 준다. 현재 중국을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두고 있는 나라는 120여개국이나 된다.

최대 교역 상대국은 잠재적 디지털위안화의 우군이다. 2020년 9월 중국은 인도네시아와 양국 현지 통화 활성화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인도네시아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이다.

이 제휴로 중국 위안화와 인도네시아 루피화는 달러를 거치지 않고도 은행 간 거래가 가능해졌다. 직거래를 선택했으니 환율에서도 서로 유리하다. 동남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중국이 가장 큰 거래국이다. 실시간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 달러화를 외환보유액으로 활용해 거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이런 양국 간 제휴는 디지털위안화를 작동하려는 중국에는 매우 중요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이런 기틀이 마련된 뒤에 필요한 건 디지털통화를 활용하는 국제 결제 플랫폼이다. 이미 그런 프로젝트들은 중국을 축으로 가동되고 있다. ‘인타논-라이언록(Intanon-LionRock)’이란 프로젝트는 홍콩금융관리국(HKMA)과 태국중앙은행(BOT) 두 나라 간 디지털통화 결제를 시험한다. 백서에 따르면 홍콩 은행 2곳과 태국 은행 8곳이 참가해 디지털통화 기반 거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중이다. 두 국가를 넘어 다자간 결제 플랫폼도 시험 가동 중이다. 홍콩금융관리국은 지난 2월 “중국 인민은행과 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의 디지털통화 프로젝트가 이제 다중 중앙은행 디지털통화(m-CBDC) 브리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발표했다.

지금도 중국은 달러화와 싸운다는 이미지를 피하려고 한다. 디지털위안화는 국내용이라고 강조한다. 리보 인민은행 부행장은 지난 4월 한 포럼에서 “디지털 위안화 국제화 문제는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이 필요하다. 달러화나 다른 국제통화를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국제무역과 투자를 편리하게 하려는 수단이 디지털위안이라는 얘기다. 반면 서방에서는 디지털위안화의 속도전을 다르게 본다. 미국 중심의 패권을 해체하기 위한 하나의 축으로 해석하고 있다. 미·중 갈등이 한창 진행 중인 시점이라는 것도 이런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강력한 무기 ‘경제제재’의 회피술

현재 미국의 외교는 경제 제재가 주 무기다. 무력 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미국 외교의 힘은 경제 제재에서 나오고, 달러 결제 시스템은 그 제재의 근원이다. 2005년 마카오에 위치한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계좌를 미국 재무부가 동결했을 때 당시 북한 외무상은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했다. 지난 3월 미국 등 서구 주요국으로부터 신장웨이우얼 탄압을 이유로 경제 제재를 받은 중국 고위관리들도 미국의 시스템을 잠깐이라도 거치는 모든 자산이 동결되는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디지털위안화가 가동된다면 이런 제재를 우회할 수 있다.

달러 결제 시스템을 회피한다는 건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이 강한 제3세계 국가들에 매력적인 일이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달러 부채다. 수출입에 달러가 필요하니 달러를 빌려야 하는데 막상 달러를 공급받으면 자국 통화가치가 떨어지고 인플레이션 위협에 시달린다. 허약한 국내 경제 탓이지만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결제 통화가 생긴다면 갈아타고 싶은 동기는 많다. 이런 이유들 탓에 그간 “디지털통화로 중국을 잡아야 한다”는 요구가 미국 내에서도 있었다. 너무 느리게 대응했다간 디지털위안으로 달러의 위세가 약화될 수 있고, 이는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약하게 만든다는 우려가 많았다. 이번 연준의 디지털달러 계획은 그런 걱정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CBDC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은행 역시 관련 논의를 공식화한 상태다. 한은은 지난 5월 24일 “CBDC 모의실험 연구 용역 사업자 선정 공고를 냈다”고 밝혔다. CBDC의 발행·유통·환수 등 기본 기능과 오프라인 결제, 디지털 예술품 구매 등 관련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할 계획이다. 다만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며 도입을 전제로 하는 실험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키워드

#IT
김회권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