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 이기석

1910년 3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에서 태어남

1926년 김포공립보통학교 졸업

1933년 김포금융조합 입사

1936년 협화약품양행 경리책임자로 입사

1953년 조선중외제약소 전무

1964년 대한중외제약 사장 취임

1975년 2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

성천(星泉) 이기석(李基石)은 생명존중의 경영철학을 표방해온 대한중외제약(현 JW그룹 전신)의 창업주다. 성천은 박한 이윤 탓으로 남들이 기피했던 수액제, 주사제 등 필수의약품 개발에 앞장섰던 제약업계의 남다른 공로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창업 초기부터 주사제 개발에 앞장서서 1959년 포도당 주사액과 혈액채취용액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후 각종 수액제품을 개발해 중외제약(현 JW중외제약)이 세계 5대 수액제 생산업체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공로로 사후에 한국경영자학회가 수여하는 창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의 역대 수상자로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 LG그룹의 구인회 회장, 교보의 신용호 회장 등이 있다. 이들이 모두 대그룹 창업주임에 비해 성천은 중견 제약업체 창업주라는 점이 신선해 보인다. 1998년 당시 창업대상 심사위원회는 “고 이기석 사장이 생명존중과 개척자 정신으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치료제 중심의 필수의약품 개발과 완벽한 품질보증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우수 의약품 생산·판매에만 고집스럽게 일관하는 ‘한우물 경영’으로 국내 제약산업을 선도했다”고 밝혔다. JW그룹은 현재 지주회사인 JW홀딩스와 JW중외제약, JW신약, JW생명과학, JW메디칼 등 자회사를 거느린 그룹사로 성장했다.

창업 초기 임원들과 함께 근무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기석 사장(가운데).
창업 초기 임원들과 함께 근무현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기석 사장(가운데).

“약은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데만 사용”

생전에 “하찮은 미물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며, 약은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데만 사용해야 한다”는 경영철학으로 우수 의약품 개발에 평생을 바친 성천은 1910년 3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감정리에서 한학자 이병두와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독자로 태어났다. 1926년에 김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7년간 한학을 공부하다가 1933년에 김포금융조합에 입사했다. 3년 후 협화약품양행으로 옮겨 경리책임자로 근무하다가, 광복 후에는 그 회사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중인 1·4후퇴 때 경영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협화약품양행을 정리했다. 1951년부터는 잠시 신광지기(紙器)공업사의 경영을 맡았으나, 6·25전쟁 와중에도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버릴 수가 없어 1952년부터는 또다시 제약업계로 돌아와 극동약품주식회사를 경영했다.

마침내 포성이 멎은 1953년 여름 어느날 동향 친구인 임용식 조선중외제약소 사장이 찾아왔다. 그는 회사가 도산위기에 처하자 성천에게 ‘구원투수’로서 투자를 제의해온 것이었다. 출범 당시부터 주사제만을 전문으로 생산해온 조선중외제약소는 여전히 가내수공업의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주사제품은 다른 제약업체의 제품에 비해 그 이윤 폭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수요의 거의 대부분이 병원 및 의원에 국한된 제품들이었기 때문에 기업을 운영하는 데 따르는 애로와 고충이 컸다.

당시 조선중외제약소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기에는 시설 수준이나 자본 면에서 모두 부족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급속도로 변신하고 있는 제약업계의 환경을 간파해낼 만한 경영인의 역량이 아쉬웠다. 제약업 자체가 엄밀한 시장 분석에 입각한 상품 계획에 따라 그 제품의 성공 여부가 좌우되는 업종이어서 다각적인 경영방식에 능숙한 경영인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중외제약소 임용식 대표는 제약경영의 달인인 성천을 맞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법인 설립과 함께 사장에 임용식, 전무에 이기석이 취임하게 되었다.

성천이 근무했던 협화약품양행은 일제 때 모르다인 주사제를 취급한 업체로 유명했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성천은 주사제 시장의 생리를 훤히 알고 있었고, 조선중외제약소의 운영방식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동안 경영 전반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은 새로운 법인체를 발족시키고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합성설비를 점검하고 있는 이기석 사장.
합성설비를 점검하고 있는 이기석 사장.

제2창업 터전을 마련하다

성천은 1953년 8월 8일 142만원의 납입자본금으로 증자를 마친 후 법인 설립과 함께 회사명을 대한중외제약주식회사로 바꾼 뒤 공장 신축에 착수했다. 광복과 함께 중외제약은 일본인이 제정한 상호 앞에 ‘조선’을 명기하여 조선중외제약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으나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명에서 ‘조선’을 버리기로 했다. 이 땅에 뿌리내린 반공 사상과 함께 북한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게 이유였다. 새로운 사명은 대한중외제약으로 정했다.

주식회사 체제를 갖춘 대한중외제약은 제2창업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주가이제약이 개설했던 경성지점 공장 옛터에 공장을 재건하기로 했다. 이후 건물 신축 작업에 들어가 1954년 3월 10일 이전을 마쳤다. 아울러 그때까지 답보상태였던 새로운 품목의 약품 개발을 본격화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당시 모든 의약품이 궁핍했던 만큼 중외제약은 법인 설립과 함께 미력하나마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기 위해 ‘성실근면 친절응대 규율엄수 융화단결 신속정확’을 사훈으로 제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러나 화려한 광고와 함께 인기 제약 품목을 시판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일반 약품 생산업체에 견줘 중외제약의 사세는 아직 미미한 것이었다.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제약을 통해 올바른 기업 이념을 구현하겠다는 경영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 직후의 여건은 중외제약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한 상황을 부가하고 있었다. 특히 보조자재의 품질이 열악했기 때문에 앰풀을 충전하는 과정에서 파손율이 높았고, 원료의 구입도 어려웠다.

그러나 성천에게는 이러한 어려움보다 필요한 때에 맞춰 바로 제품을 생산, 공급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안타까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러모로 어려운 일들이 계속되는 상황이었으나 중외제약은 성천이 경영에 참여하여 자본금을 증자시킴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기업으로 도약을 다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가내수공업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중외제약소는 사명을 대한중외제약으로 바꾸면서 현대적인 기업으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됐다. 특히 중외제약의 뿌리인 수액 부문의 산실 충무로 공장 시대를 열면서 큰 전기를 이뤘다.

1964년 6월 30일 공장 건설을 마친 중외제약은 여러 차례에 걸친 시설 확장을 통해 생산설비의 현대화를 실현해 나갔다. 인원도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경영 조직의 새로운 개편이 필요해졌다. 결국 임용식이 회장에 취임하고 성천이 사장을 맡음으로써 회사 경영 전반의 지휘 체계에 탄력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사장에 취임한 성천은 신제품 개발에 매진하고 추가로 항생제 생산에 대한 준비를 서둘렀다.

1972년 3월 세종호텔 해금강홀에서 개최된 아루사루민 학술세미나.
1972년 3월 세종호텔 해금강홀에서 개최된 아루사루민 학술세미나.

회사 살린 ‘쥐약’ 포기한 이유

성천은 성품이 부드러워 다른 사람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신 설득력이 매우 강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관철시켰다. 경영 전반의 업무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과 치밀한 계획성으로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한 그는 특히 초창기 경영진들과 함께 영업에 주력했다.

1960년대 중반 제3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쌀이 귀하기는 그 전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극성을 부리는 쥐를 퇴치하기 위해 중외제약이 시장에 내놓은 쥐약 ‘고양이표 후라킬’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기기 시작했다. 후라킬의 호황은 당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던 회사 재정에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잘나가던 회사에 갑자기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생활고로 쥐약을 먹고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바로 그 쥐약이 후라킬은 아니었으나 성천은 주사제 전문메이커인 중외제약이 동물을 죽이는 약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쥐를 퇴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중외제약이 생명을 죽이는 약을 앞장서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후라킬이 잘나가던 어느 날 성천은 긴급임원회의를 소집하고 후라킬 생산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자 반론이 거셌다.

“우리가 죽이는 것은 백해무익한 쥐가 아니겠습니까? 영화관에서 하는 대한뉴스에서도 전국적인 쥐잡기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쥐를 퇴치하는 국가시책에 우리는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덕분에 회사 형편도 모처럼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직원들과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이기석 사장(오른쪽).
직원들과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이기석 사장(오른쪽).

성천은 지그시 눈을 감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사정이야 잘 압니다. 그러나 쥐도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약을 만드는 것은 죽을 생명을 구하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 그 생명을 죽이는 독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자연은 자연에 맡겨야 합니다. 쥐에겐 천적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더 이상 살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다운 발언이었다. 그리고 정통 약업인다운 발언이기도 했다.

그즈음 일류제약업체에서 내놓은 자양강장제가 잘 팔리자 임원들은 그런 종류의 피로회복 드링크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품 개발계획을 보고하자마자 “야, 이놈들아. 내가 약 만들쟀지 사탕물 만들어 팔자고 했냐?”라며 당장 꾸중을 내릴 성천이 떠올랐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성천의 모습이었다.

결국 성천은 1964년 의료 활동의 기초이자 필수인 수액·전해질류(電解質類)의 국산화에 앞장서 성공하여 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오늘날 중외제약의 기반을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에는 중외제약 성장의 기틀이 된 리지노마이신 합성개발을 단행하여 이듬해 발명의 날에 국무총리 발명상을 획득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는 영국 약전에도 기재되어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막대한 투자를 무릅쓰고 세계적으로 앞선 신항생제 피바록신 원료합성에 성공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후 피바록신 원료를 대만에 제공함으로써 명실공히 우리 의약 기술의 우수성을 내외에 두루 과시하였다. 1972년에는 자회사로 의료기기 전문업체인 대한중외상사(현 JW메디칼)를 설립하여 오늘날 국내 의료기관의 의료시설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학술행사에 참석한 이기석 사장(앞줄 가운데).
학술행사에 참석한 이기석 사장(앞줄 가운데).

버스 타고 다니며 종이 한 장도 아껴

성천에 대한 주위의 회고담은 아직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추운 겨울날이면 이따금 군밤, 호떡, 군고구마 등을 사가지고 오셔서 함께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많았다. 주례를 맡았던 원앙의 가정은 반드시 찾아가서 돌보아 줬다. 그런 따뜻한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셨기 때문에 여러분들로부터 존경받는 사장님이 되셨다고 생각한다.”(사원 민대홍)

“이사장은 겸손하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고 골프도 잘 치지 못하면서 친구들이 가자고 하면 ‘No’라고 못 했다. 인간적 성품이 부드러워 타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대하지 못한다. 그러나 설득력이 매우 강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이 설득력으로 자기 의견에 굴복하게 하는 힘이 강한 사나이였다. 한편 친구의 일이라면 자기 일보다 더 걱정했다. 때로 회사의 말단사원이나 고향에서 올라오는 불우한 사람들이 병을 앓는다거나 하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뿐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숨기려는 갸륵한 마음을 자주 보았다.”(1977년 당시 순천향병원 민광식 박사)

“1965년 입사하여 처음 뵈었을 때부터 검소하신 분이라는 점을 느꼈다. 사장님의 위치라면 택시를 타고 다니셔도 지나치지 않으시련만 늘 버스를 타셨다. 종이 한 장이라도 아끼고, 문화인답게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고 공중도덕을 지키라고 지적하는 등 세심한 성품을 갖고 계셨다.”(1977년 당시 이용휘 경리부 차장)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친절하며, 부지런하고 정열적으로 생명존중에 앞장서온 제약인 성천은 1975년 2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김포군 감정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성천의 가계

성천은 허존씨와 사이에 장남 영호(작고)씨와 JW그룹 명예회장인 차남 종호(90·동국대 법대 졸업)씨를 두었다. 종호씨는 삼락증권 총무이사로 재직하다 1966년 대한중외제약 기획실장으로 입사하여 이듬해 전무에 취임, 사실상 경영 전반을 주도해 왔다. 그는 성천의 뒤를 이어 대한중외제약 사장, 회장직을 지냈다.

성천의 차남 종호씨는 홍임선(85·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3남1녀를 두었다. 장녀 진하(61)씨와 장남 경하(59·성균관대 약학과·미 드레이크대 경영학 석사)씨와 차남 동하(57·개인사업)씨, 3남 정하(51·개인사업)씨가 있다.

성천의 장손 경하씨는 JW그룹 회장으로 장선영(56·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성은(27·대학원생), 민경(27·대학원생)씨 자매와 아들 기환(25·대학생)씨를 두었다.

내가 본 성천 이기석

김정규 전 JW중외제약 감사

이기석 사장님은 팔기 쉬운 약을 만들기보다 환자가 필요한 약,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약, 치료제의 제조가 중외제약이 할 수 있는 사명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분이다.

평소 온화하고 겸허한 인품을 보였지만, 수익성이 박한 제품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서슴지 않고 생산에 착수하는 결단력을 보였다. 또 경영이 악화되어도 치료제 개발을 위한 투자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1959년 수입에만 의존해 오던 5%포도당 수액제의 국산화에 성공한 후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장이식 수술이 시도될 때도 복막 관류액 인페리놀을 개발하겠다고 지원을 자청했던 일들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깨끗이 살다 깨끗이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사장님은 최고경영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사치도 용납하지 않았던 분이기도 했다. 직원들을 위해 곰보빵 2개와 멸치국수로 국내 최초의 사내급식을 시작하였으며, 회사가 부도 직전에 몰린 상황에서도 일수 빚을 내어서까지 직원들의 월급을 가장 먼저 챙겼다.

이 같은 사장님의 인품과 업적은 우리 약업계와 JW그룹의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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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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