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대웅전과 뒤쪽의 매봉.
진관사 대웅전과 뒤쪽의 매봉.

조선시대 서울의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 4군데의 호위 사찰이 있었다. 동쪽에는 불암사, 서쪽에는 진관사(津寬寺), 남쪽에는 삼막사, 북쪽에는 승가사이다. 이를 사고사찰(四固寺刹)이라고도 한다. 4군데서 도성과 궁궐을 지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서쪽에 있는 진관사. 근데 이름이 좀 특이하다. 나루 진(津)에 너그러울 관(寬)이다. 산속에 있는 절 이름에 어찌 나루 진(津) 자가 들어가는가? 고려 때 진관대사(津寬大師)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진관의 뜻은 ‘너그러운,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피안의 세계, 또는 이승에서 저승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물을 건너야 한다. 물을 건널 때는 배가 필요한데 불가에서는 이 배를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고 한다. 지혜의 용이 이끌어 주는 배이다. 지혜가 없는 배는 피안에 도착하지 못한다. 지혜가 그만큼 필요하다. ‘너그러운 나루터’라는 작명에는 피안으로 이끌어줄 배가 많이 접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중생을 구제하는 큰 배, 즉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대기하고 있는 나루터, 항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호등은 백만불짜리

어찌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을까. 고려 8대 임금인 현종(顯宗)이 1010년에 진관대사를 위하여 여기에다 절을 지었다. 현종이 유년(대량원군·大良阮君) 시절 정치적 반대파의 압박에 의하여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 진관대사가 현종을 절에다 숨겨서 보호해주고 키워줬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현종이 자기 스승이자 왕사인 진관대사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스승의 이름을 딴 절을 지은 것이 진관사이다.

고려 초기 당시에 전국에서 명당으로 꼽히는 3군데의 절터가 후보로 올랐다고 한다. 오대산 상원사 터, 진관사, 그리고 해남 대흥사 터였다고 한다. 현종은 제안하였다. “스님이 원하시는 장소를 정하시죠.” 진관대사는 서울 삼각산 줄기의 진관사 터를 지목하였다. “여기에다 짓고 싶다.” 서울 삼각산의 큰 줄기가 서남쪽으로 내려와 문수봉이 되었고, 그 주봉이 다시 서남으로 내려가 승가사(僧伽寺)가 되었다. 이 줄기가 다시 남쪽으로 뻗어 비봉(碑峰)을 이루었다. 문수봉의 다른 한 줄기는 서북으로 꺾어서 기운이 뭉친 봉우리가 바로 매봉이다. 이 매봉은 400m 정도의 높이지만 정상 부근도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기운찬 봉우리이다. 이 매봉의 바위 맥을 타고 떨어진 지기(地氣)가 진관사 ‘大雄殿(대웅전)’ 현판 글씨의 ‘雄’ 자 지점으로 떨어졌다고 주지스님은 설명한다.

바위 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도 줄이 있고 선이 있다. 그 줄에 맞춰서 기도를 하면 기도발을 받는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릴 때도 이 에너지가 흐르는 전기선을 깔고 앉아서 기도를 하면 효과가 속발한다. 종교 신심은 역시 기도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기도발은 바위를 타고 흐르는 땅의 에너지를 받느냐에 핵심이 있다. 진관사 대웅전은 이 매봉을 등 뒤로 하고 있으니 진관사는 매봉의 기운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 앞으로도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 감싸고 있다. 여러 겹을 감싸고 있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기운을 품어주기 때문이다. 추울 때 옷을 한 겹 입은 것보다 여러 겹을 껴입는 게 보온에 훨씬 도움이 되는 이치와 같다.

진관사 터에서 특히 보기 좋은 점은 백호등(오른쪽 맥)이다. 대웅전의 오른쪽 지맥이 절 가운데를 흐르는 계곡물을 감싸주고 있다. 계곡물이 빠져 나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청룡이나 백호의 지맥이 이 물을 감싸안아야 기가 안 빠진다. 백호등이 이 계곡물을 조릿대처럼 감싸안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백호등이 백만불짜리이고, 역대 진관사에 머물렀던 선지식들이 이 백호등을 특히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특히 백호등의 맨 끝이 바위로 되어 있어서 힘이 뭉쳐 있다. 끝에 바위가 있으면 백호의 발톱이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도교의 도관(道觀)이라면 이 바위에 호랑이를 새겨 놓았겠지만, 불교 절이니까 백호등 끝자락의 바위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놓았다. 진관사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은 서울 삼각산 바위 산들의 매력과 기세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다. 서울 산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터라는 점이다. 가장 한국적인 풍광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뷰를 가지고 있다.

진관사 경내
진관사 경내

질 바이든도 반한 진관사 밥상

근래에는 진관사가 한국 사찰음식의 본가처럼 주목받고 있다. 주지인 계호 스님이 수십 년 동안 사찰음식의 전통을 잘 보존해 온 결실이다.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불가 음식의 전통을 고수한 것도 대단한 수행에 속한다. 그 수행의 결과물이 시절인연을 만나니까 서구의 왕족들과 명사들이 진관사의 사찰음식을 맛보기 위하여 줄줄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가 대표적이다. 바이든이 부통령 시절인 2015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질 바이든 여사는 진관사를 찾았다. 한국 사찰음식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던 것이다. 백악관의 부주방장인 샘 카스로부터 “한국에 가거든 진관사 사찰음식을 한번 맛보세요”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문재인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해 진관사에서 보낸 선물을 질 바이든 여사에게 전달했을 때에도 영부인이 아주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부주방장인 샘 카스는 2014년에 진관사에 들러 이미 맛을 본 상태였다. 백악관의 주방을 책임질 정도이면 당대의 요리사 반열에 든 수준일 텐데 어떻게 한국의 진관사 사찰음식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 대답을 계호 스님 밑에서 요리를 배우고 총무를 맡고 있는 법해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1940~1950년대에 유럽의 학자들이 인도에 가서 동양의 종교, 사상을 연구하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불교에 주목하게 되었죠.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뻗어나가기는 동남아시아로 간 것을 알게 되었고, 동남아시아 불교를 연구하다 보니까 다시 한국 불교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 학자들이 1980년대에 한국에도 와서 불교 사찰들을 돌아보았어요. 한국 불교 사찰에서 숙박도 하고 밥도 먹다 보니까 ‘발우공양’이라는 전통이 이색적이었고, 발우에 담겨 나온 음식들이 채식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고 해요. 당시 냉장음식에 대한 부작용, 식재료에 대한 오염, 육식에 대한 반성이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었을 때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어떤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 사찰에서 채식요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사찰음식은 대부분 나물과 채소 아닙니까. 시래기 같은 것도 냉장이 아니라 말린 것이죠. 말린 시래기에 방부제가 들어간 것은 아니죠. 그리고 된장, 간장, 고추장과 버무려 먹죠. 장독대에서 발효시키는 된장, 간장도 서구인들 시각에서 보면 흥미로웠어요. 방부제가 없는 천연발효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나물과 채소에 맛을 내주고요. 유럽 연구자들이 한국의 사찰음식을 유럽의 실험실에 가지고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다고 하네요. 그 분석 결과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각종 학술지, 논문에 게재되었어요. 데이터로 사찰음식의 우수성이 입증된 셈이죠. 이 연구 결과 데이터를 보고 세계 유명 셰프들이 한두 명씩 개인적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방문합니다. 유명 셰프들이 왔다갔다하면서 차츰 입소문이 유럽과 미국에 납니다. ‘한국 가면 절에 가서 나무 발우에 담겨 나오는 나물 요리들을 한번 맛봐라. 냉장음식, 육식문화에 대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라는 소문 아니었을까요. 유명 셰프 다음에는 유럽의 왕족을 비롯한 상류사회에까지 소문이 납니다. 오염되지 않고 발효가 잘된 먹거리야말로 삶에서 중요한 가치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백악관 부주방장도 한국에 오게 된 것이고, 부통령 시절의 질 바이든 여사도 오게 된 것입니다.”

태국 공주, 세계적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 벨기에 여왕인 마틸드 필리프, 부탄 공주, 리처드 기어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 외국의 정치인들, 외국 건축가, 한국 사람은 그 유명도를 잘 알지 못하는 유명 셰프들이 진관사를 많이 다녀갔다.

진관사가 지닌 장점은 위치에도 있다. 서울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진관사가 지방에 있었으면 외국 유명인사들이 인천공항에 내려 또 몇 시간을 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있으니까 접근성이 좋다. 거기에다가 삼각산의 풍광이 절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다가 진관사가 여자 스님들이 사는 비구니 도량이다 보니 사찰이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다. 진관사에 들어서는 순간 매우 깔끔하고 쾌적한 넓은 자연 정원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주지인 계호 스님의 내공과 사찰음식 주방인 향적당 등이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진관사 음식이 좋은 이유를 꼽는다면 어떤 것을 꼽겠습니까?” “물이 좋다는 점입니다. 비봉과 문수봉, 매봉을 비롯한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이 진관사 앞으로 모입니다. 팔방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모이는 셈이죠. 이 물이 화강암반을 통과해서 나오는 물이기 때문에 맛이 좋습니다. 이 물맛이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곳

진관사는 고려 때는 진관대사라는 왕사가 머문 사찰이었지만, 배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수륙사(水陸社)’가 설치된 국립사찰의 역할을 하였다. 국가 차원의 수륙재를 지내던 사찰이었다. 물과 땅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천도하는 제사가 수륙재이다. 이성계는 이씨조선 창업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종친들이었던 왕씨들과 귀족들을 많이 살육하였다. 살생을 많이 하면 꿈자리가 사납기 마련이다.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불교국가에서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그 과보를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이성계도 꿈자리가 사납고 살생에 대한 업보가 두려웠다. 그 업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 성대한 수륙재를 열어 죽은 왕씨들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성계가 직접 지시하여 저승에 못 가고 헤매는 원혼들을 달래는 수륙재를 지내게 하였고, 그 장소를 진관사로 지정하였던 것이다. 진관사가 국가적 규모의 수륙재를 지낼 만한 사격(寺格)이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수륙사가 설치되었다. 조선조가 불교 탄압정책을 유지하였지만 진관사의 수륙재만큼은 국가적으로 예산 지원을 하는 예외적인 행사였다. 진관사는 수륙재의 원형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사찰음식과 수륙재는 한류의 중요한 콘텐츠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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