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김성기 IBS(기초과학연구원) 뇌과학이미징연구단 단장은 1991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할 때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미국 중서부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대학 방사선과의 카밀 우거빌(Kamil Ugurbil) 교수. 우거빌 교수는 MRI(자기공명영상) 연구를 위한 센터를 만든다며 합류할 걸 제안했다. 김 단장은 그때까지는 NMR(핵자기공명)이라는 분광분석기를 이용해서 연구해왔다. 그런데 우거빌 교수가 ‘인체 연구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자장이 큰 MRI를 구입했다면서 그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좋은 장비를 갖고 있으면 남들이 못 하는 연구를 해볼 수 있다. 우거빌 교수가 자랑하는 장비는 인체용 4T MRI였다.(T는 테슬라로 자장 강도다. 1테슬라는 지구 자장의 약 2만배.) 당시 병원 임상용 장비가 1.5T 정도였으니 3배 가까이 자장이 큰 장비다. MRI는 그때까지 김성기 박사가 연구하지 않은 주제였다.

4T MRI에 끌려 우거빌 교수에게 가다

지난 9월 13일 수원 성균관대학교 N센터 3층의 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 사무실에서 만난 김 단장은 “NMR과 MRI는 핵자기공명(Nuclear Magnetic Resonance)을 이용한다는 점은 같다. NMR은 분광분석기로, 분석화학자가 많이 사용한다. 가령 화학물질에 어떤 분자가 들어있는지를 확인할 때 쓴다. 반면 MRI는 생체조직의 구조나 고해상도 혈관 영상을 찍기 위한 도구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거빌 교수의 제안을 받고 미네소타대학 NMR연구센터(CMRR)로 가서 연구교수로 일했다. 우거빌 교수는 AT&T벨연구소에서 일하는 일본인 세이지 오가와 박사(1934년생)를 그에게 소개했다. 우거빌과 오가와 두 사람은 뉴저지의 벨연구소에서 같이 일한 게 인연이 되어 공동연구를 계속해왔다. 오늘날 오가와 박사는 ‘fMRI(기능성핵자기공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 그의 1990년 논문이 오늘날 fMRI의 출발점인데 당시 논문은 MRI 연구자들의 학회 학술지인 MRM(Magnetic Resonance in Medicine)에 실렸다. 김성기 단장의 설명을 들어본다.

“오가와 박사님은 생쥐를 마취시키고 실험을 했다. 생쥐에게 처음에는 공기를 들이마시게 했고, 다음에는 산소 100%인 기체를 마시게 했다. MRI로 찍으니 두 개의 조건에서 뇌 영상이 다르게 나왔다. 산소 100%인 기체를 들이마실 때는 뇌혈관이 보이지 않았으나, 일반 공기를 마실 때 찍은 사진에는 뇌혈관이 잘 보인다. 혈액의 산소포화도가 달라지면 물의 MR(자기공명) 특성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자기공명 신호에 변화가 온다. 오가와 박사님은 MRI로 뇌혈관의 산소포화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걸 이걸로 증명했다.”

당시 오가와 교수가 사용한 촬영법은 BOLD 이미징(Blood-oxygenation-level-dependent Imaging·혈액산소수준의존 영상)이라고 불린다. 1990년 논문 제목은 ‘혈액 산소포화도에 관계되는 뇌 자기공명 이미징 방법(Brain magnetic resonance imaging with contrast dependent on blood oxygenation)’쯤 된다.

김성기 연구교수는 fMRI 연구를 시작한 다음해인 1992년, 이 분야에서 쓴 첫 번째 논문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오가와 박사와 공저자로 발표했다. 김성기 단장은 “fMRI를 사람에게 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인 논문”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시각피질이 대뇌 뒤쪽 후두엽에 있다는 건 생리학자 실험을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김성기 연구교수는 MRI 안에 사람을 누운 채 들어가게 하고, 불을 밝게 했다가 어둡게 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런 상황에서 후두엽의 시각피질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를 MRI로 촬영하면서 시각피질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생리학자들이 뇌에 전극을 삽입해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MRI로 찍어서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걸 보인 것이다. 김 단장은 “사람 뇌는 일반적으로 동물실험을 하는 것처럼 열어서 실험할 수가 없다. 하지만 fMRI로 사람 뇌혈관의 변화를 측정해서 얻은 뇌 이미지를 잘 해석하고, 또 정교하게 촬영하게 되면 침습적인 방법, 즉 뇌를 열어서 하는 연구와 유사한 정도로 뇌를 연구할 수 있다. 그래서 fMRI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fMRI를 개발한 네 연구자의 1994년 사진(왼쪽)과 25년 후인 2019년 사진. 왼쪽부터 우거빌, 오가와, 메논, 김성기 박사. ⓒphoto 김성기
fMRI를 개발한 네 연구자의 1994년 사진(왼쪽)과 25년 후인 2019년 사진. 왼쪽부터 우거빌, 오가와, 메논, 김성기 박사. ⓒphoto 김성기

MRI와 fMRI의 차이

이런 설명을 듣다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MRI와 fMRI는 어떻게 다른가? 김 단장은 “원리는 같고 촬영법이 다르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뇌를 이해하려면 구조와 기능, 연결을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구조’는 MRI로 주로 찍는다. fMRI는 ‘기능’을 주로 연구한다. fMRI는 이름 앞에 ‘f’가 들어가 있는데 ‘f’는 ‘기능(functional)’이라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다. 다시 말하면 MRI는 인체의 해부학적인 단면을 찍는다. 병원 의사들이 환자의 몸에 종양과 같은 질병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게 MRI다. 반면 fMRI는 뇌 연구자의 도구다. 뇌세포가 활성화되면 늘어난 에너지 소모를 충당하기 위해 피의 흐름이 증가한다. 그러면 핏속의 산소량이 증가하게 되고, 그 산소량의 증감을 이용해 fMRI는 영상을 얻는다. MRI는 카메라와 같이 정지 영상을 얻으며, fMRI는 동영상 촬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fMRI는 머리를 스캔하면서 빨리 반복해서 여러 번 찍어서 변화를 계산한다.”

1994년 그는 미네소타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이후 1995년 중요한 논문을 써서 1998년 부교수 승진과 정년을 보장받았다. 김 단장이 자신의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구글 스칼라’ 사이트에 들어가 보여주는데, 1995년 MRM에 발표한 논문은 혼자 쓴 단독 논문이었다. 요즘 보기 드문 당시의 단독 논문은 fMRI이미징에서 뇌 혈류량을 측정하는 방법론 연구였고, 촬영 방법과 조건에 따라 들쭉날쭉한 fMRI 데이터를 ‘정량화’해낸 게 핵심 성과였다. 김 단장이 모니터에 보이는 논문 제목(‘Quantification of relative cerebral blood flow change by flow-sensitive alternating inversion recovery (FAIR) technique: application to functional mapping’) 속의 ‘FAIR’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FAIR 기술을 개발한 게 핵심이다. FAIR는 MRI를 찍는 소프트웨어로, 사용하기 쉽다. 요즘도 고(高)자장에서 혈류량 이미징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된다”라고 말했다.

김 단장이 사진 두 장을 보여준다. 1994년 사진인데 네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 카밀 우거빌 미네소타대학 방사선과 교수, 세이지 오가와 박사, 라비 메논(Ravi Menon) 박사후연구원, 그리고 김성기 교수 등이다. 사진 위에는 ‘사람에 쓸 수 있는 최초의 fMRI를 개발한 미네소타대학 팀’이라고 적혀 있다. 김 단장은 “센터에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우리 넷이 주전 멤버였다”라고 말했다. 다들 NMR을 연구하다가 MRI 연구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피츠버그대 ‘폴 라터버 석좌교수’를 맡다

모니터 화면 속의 사진 옆에는 다른 사진이 한 장 더 있다. 네 사람의 25년 후 모습이다. 2019년 김성기 단장이 다른 세 명을 IBS연구단이 있는 수원으로 초청해 심포지엄을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34년생인 오가와 박사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다. 요즘은 일본으로 돌아와 센다이의 도호쿠복지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 70대인 카밀 우거빌 교수는 미네소타대학의 MR연구센터를 계속 이끌고 있다. 라비 메논 박사후연구원은 지금은 캐나다의 명문 연구중심대학인 웨스턴대학 교수이며 그곳의 MR연구센터장으로 일한다.

김 단장은 미네소타대학에서 11년 일하고 2002년 피츠버그대학으로 옮겼다. 카밀 우거빌 교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연구 중심지를 마련한 셈이다. 피츠버그대학에서 그의 보직명은 폴 라터버(Paul Lauterbur) 석좌교수. 폴 라터버는 MRI를 발명한 공로로 200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 화학자다. 라터버 교수는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는데 피츠버그대학은 그걸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석좌교수 자리를 만들었다. 김성기 교수가 그 자리를 맡은 것이다. 피츠버그대학은 그에게 멋진 뇌이미징센터 건물을 지어주었다. 김 단장은 “내가 건물 두 개를 지었다. 피츠버그에서 실험실과 사무실을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했다. 그리고 그 도면을 한국에 갖고 와서 두 번째 건물을 지었는데 그게 성균관대 N센터 건물이다”라고 말했다.

미네소타에서는 사람을 촬영하는 fMRI 연구를 했으나, 피츠버그에 가서는 고양이를 이용한 동물 실험을 주로 했다. 김 단장을 따라 성균관대학 N센터 1층에 내려가니 MRI 4대가 있었다. 그중 두 대는 동물용, 다른 두 개는 사람 촬영용이다. 동물용은 촬영 대상이 들어가는 구멍이 사람보다 작다. 도넛 모양의 구멍에는 빙 돌아가며 자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구경이 작다 보니 더 높은 자장이 가능하다.(김 단장의 연구단이 갖고 있는 MRI는 동물용의 경우 9.4T와 15.2T이고, 사람용은 3T와 7T 크기다. 15.2T MRI는 아시아에서 가장 자장이 센 장비이고, 현재 세계에 모두 5대가 있다. 사람 촬영용 7T MRI는 미국 식품의약청(FDA)이 승인한 것으로, 도입 당시 아시아에서 처음이었다.) ‘동물용 MR’이라고 쓰여 있는 방에서는 세 명의 연구자가 흰색 쥐(rat) 촬영을 마치고 있었다. 흰색 쥐가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김성기 단장이 피츠버그대학에서 2000년에 발표한 논문들은 고양이를 대상으로 생리학적 변화를 측정한 실험 결과들이 담겨 있었다. 이를 통해 fMRI 해상도의 한계를 탐구했다. 김 단장은 “피츠버그에 가서는 10년간 fMRI 해상도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다”라고 말했다. 장비의 하드웨어를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촬영법을 개선하고, 데이터 해석을 잘하는 게 연구 방향이었다고 한다. 김 단장은 “일반적으로 2~3㎜ 공간해상도로 뇌 기능을 측정했다. 기능이 유사한 신경세포들이 기둥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는 약 1㎜ 크기의 구조를 측정하기 위해서 촬영법을 개발해 1㎜ 이하 크기를 찍을 수 있게 했다”라고 말했다. 측정법을 개선하고 촬영해서 얻은 데이터를 잘 해석하려면 세포의 반응과 뇌혈류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해야 했다. 혈관 구조와 혈관의 조절 기전을 동료 교수와 같이 연구했다. 2006년 학술지 ‘뉴로이미징’에 발표한 논문은 모세혈관 신호를 잘 보이게 한 연구였다. 종전에는 큰 뇌혈관을 봤으나, 모세혈관 위주로 fMRI를 촬영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와 함께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MRI로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하는 연구를 병행했다.

그는 처음에는 화학자로 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부에서는 화학(경북대 응용화학과 76학번)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에서 박사공부(지도교수 조셉 에커만·Joseph Ackerman)할 때는 물리화학을 연구했다. 그런 배경이 있기에 그는 MRI를 갖고 생체의 pH(수소이온농도지수) 측정법을 알아내고(2013), 뇌에서 포도당 신진대사를 측정하는 방법(2014) 등등을 개발했다.

한국의 뇌과학 발전 위해 귀국

피츠버그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멋진 건물과 함께 일하는 조교수 네 명이 있는 실험실, 풍족한 연구비 등 부족할 게 없었다. 2011년 한국의 성균관대 서민아 교수(현 글로벌바이오메디컬공학과)와 다른 교수 두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한국에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생기고 곧 연구단장 모집공고가 나온다. 성균관대가 IBS연구단을 유치하려고 한다. 그 연구단의 단장으로 지원해 달라. 연구단장에 선임되면 연구단 설립에 필요한 시설을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달리 부러울 게 없는 연구생활이었으나, 한국의 뇌과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했다. 2013년 IBS의 3차 연구단장 모집 때 연구단장으로 선정됐다.

성균관대는 김 단장이 이끌 IBS연구단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N센터라는 새로운 8층짜리 건물도 지었다. 이날 취재하러 가서 보니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그리고 100억원이나 나가는 7T MRI를 김 단장 연구를 위해 사줬다. 김 단장은 “성균관대에 시설투자를 많이 요구했는데 학교에서 다 들어주겠다고 해서 놀랐다”라고 말했다. 고가의 MRI를 사들인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연구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면 남들이 갖지 못한 장비를 확보하는 게 가장 쉽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실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이 시애틀에 있다가 1991년 미네소타대학으로 옮겨 간 것도 미네소타대학의 카밀 우거빌 교수가 좋은 MRI를 샀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김 단장은 처음 2년간은 성균관대와 미국 피츠버그대학을 오가며 두 군데에 실험실을 유지했다. 그러나 피츠버그대학 실험실은 한국의 관련 규정에 따라 접어야 했다. 피츠버그대학 실험실에는 우수한 인력이 많았으나, 그가 피츠버그를 떠난다고 했을 때 한국에 따라오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한국은 세계 학계에서 보면 여전히 변방인 것이다.

성균관대의 IBS연구단에서 그는 동물과 사람을 같이 볼 수 있는 fMRI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는 fMRI를 갖고 미네소타대학에서는 사람을, 피츠버그대학에서는 동물인 고양이 실험을 주로 했으나, 한국에서는 생쥐 실험을 시작했다. 김 단장은 “사람과 동물을 같이 보는 플랫폼은 생각과 달리 같은 곳에 만들기 쉽지 않다.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시설을 갖추기가 어렵다. 우리 연구단처럼 한 건물에 동물과 사람을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곳이 흔치 않다”라고 말했다.

N센터 지하에는 동물 실험 관련 특별한 공간이 있다. 동물과 사람을 같이 볼 수 있는 시설, 즉 종간(cross-species) 실험 시설인데 그는 이게 중요하다고 했다. 김 단장은 “동물 연구는 사람을 이해하는 게 큰 목적이다. 사람에서 이해가 안 되는 건 동물 실험으로 확인한다. 그걸 위해 MRI를 기본 플랫폼으로 삼고 있다”라고 말했다. 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은 MRI라는 플랫폼을 개발하고,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은 그 플랫폼을 이용해 자신의 주제를 연구한다. 그의 연구단에는 그 자신이 직접 이끄는 fMRI그룹 말고도, 신경혈류그룹 신경회로그룹, 인지신경맵핑그룹, 계산신경과학그룹 등이 있다.

김 단장은 인터뷰를 끝내면서 “지방국립대 출신이고 내가 스토리가 많아 글을 쓸 게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를 미국으로 이끈 건 경북대 76학번 전자공학과 동기인 부인이었다. 부인이 1981년 먼저 미국에 컴퓨터과학을 배우러 일리노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 단장은 군대 갔다 와서 부인을 따라 1983년 미국에 갔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 세인트루이스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부인의 공부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석사 학위만 따고 나 때문에 공부를 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도 꼼짝 못 하고 산다”라고 답했다.

최준석 선임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