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를 합친 말로 1980~2000년대 초반 출생한 20~30대를 아우르는 말
 ⓒ일러스트 허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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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한민국이 ‘지옥 같은’ 곳에서 갑자기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대신 등장한 신조어를 떠올려보자. ‘국뽕’은 헬조선이 과연 진짜 ‘헬(지옥)’인지 묻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증거다. 맹목적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가리킬 때 종종 ‘국뽕에 취했다’는 표현을 쓴다. 처음 이 단어가 생겨났을 때만 하더라도 국뽕은 그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하하기 위해서만 쓰였다.

그런데 점차 긍정적인 상황에도 국뽕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네 개의 상을 수상했을 때 ‘크, 국뽕에 취한다’라고 쓴다면 이것은 ‘도취할 만큼 기쁜 일이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이 즈음부터 ‘헬조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곳곳에 접두사 ‘K’가 붙었다. ‘K팝’ ‘K드라마’ ‘K영화’는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얻었다. 갑자기 ‘K컬처’는 대중문화의 주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애국심은 고취되었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나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떤 다른 나라 사람보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 ‘대한민국 국민인 게 자랑스럽다’고 밝힌 응답자는 전체의 80%에 달했다. 특히 동아시아연구원의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의 예술과 문화 수준이 ‘자랑스럽다’고 밝힌 사람은 82.8%로 높게 나타났다.

이것만 보면 한국의 MZ세대 역시 국뽕에 취해 애국심이 고취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조사 결과가 있다. 한국리서치와 한국일보가 지난해 시행한 ‘Z세대 의식 구조’ 조사 결과를 보면 ‘한류 문화 확산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응답한 20대는 의외로 적어 53%에 불과했다. X세대로 불리는 40대의 71%가 자부심을 느낀다고 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20대에 국한된 조사이기는 하지만 같은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MZ세대라면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리액션을 찾는 MZ세대

그렇다면 MZ세대는 국뽕에 취하지 않은 것일까. 이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할 만한 문화적 현상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유튜브나 소셜미디어에서는 ‘리액션 비디오’가 범람하고 있다.

리액션 비디오란 어떤 콘텐츠를 보고 반응하는 모습만을 찍은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를 시청하는 팬들의 모습을 찍어 ‘방탄소년단 뮤비 리액션’이라고 이름 붙여 보여주는 식이다.

한국 유튜브에는 이런 리액션 비디오가 수없이 많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마블(MARVEL) ‘어벤져스’ 시리즈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음식을 먹고 보인 반응을 찍은 동영상은 22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자랑한다. 시각장애인이 의식을 잃은 것처럼 연기했을 때 시민들이 보인 반응, 팔을 다친 고등학생을 발견한 초등학생들의 반응을 찍은 ‘사회실험’ 동영상은 각각 1400만, 13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국 전투식량, 한국 분식, 치맥 등을 먹고 외국인들이 보인 반응, 축구선수 손흥민의 골에 영국인들이 보인 반응, 중국 쿵푸와 한국 태권도를 동시에 본 외국인들의 반응, 가수 박효신의 노래를 들은 외국인이나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본 외국인들의 반응 같은 동영상은 수백만 조회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동영상의 주된 시청자는 한국인이다.

구체적으로 2021년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된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반응을 볼 수 있다. MZ세대들은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인기 있는지 체감하기 위해 부지런을 떤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외국 방송사 뉴스를 공유하며 번역하고, 외국 소셜미디어를 살피며 이 같은 내용을 정리해 게시물로 만들어 공유한다. ‘오징어게임’에 한한 일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이 호평을 받을 때처럼 자랑할 만한 일이 생기면 외국의 반응을 정리한 자료는 어김없이 온라인 공간을 순회한다.

코로나19 이후 급변한 선진국 이미지

이 현상을 이해한 후 한 통계자료를 보면 MZ세대와 국뽕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실마리를 얻게 된다. 한국리서치에서 ‘코로나19와 국가 자부심’이라는 주제로 조사한 결과가 있다. 2020년 4월 당시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교했을 때 미국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대답한 20대는 78%, 30대는 84%나 됐다. 독일·영국·프랑스 같은 유럽 주요국가에 대한 이미지도 부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응답한 20대는 82%, 30대는 80%에 달했다. MZ세대가 선진국에 갖는 이미지가 급격히 부정적으로 변한 것이다.

MZ세대와 국뽕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는 이 지점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 K컬처가 주류 문화가 되었다 해서 MZ세대는 마냥 국뽕에 취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K컬처를 향유하는 국가들, 특히 선진국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독 한국의 리액션 비디오 중에는 한국 사회의 우수함을 알리는 동영상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의 치안은 매우 안전한 수준이라는 점을 체험하는 외국인이 등장하는 동영상은 수백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곤 한다.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의 편리함을 보여주는 동영상의 조회수는 300만회를 넘었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 영상들은, 영상의 주 시청자인 MZ세대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준다. MZ세대는 선진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있다.

MZ세대와 한국 사회가 가졌던 선진국에 대한 ‘환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이 환상은 선진국 그 자체에 갖는 환상만은 아니었다. 선진국의 사회시스템, 정치구조, 경제성장에 대한 동경이 있었지만 온전히 그것만으로 환상을 갖지는 않았다. 그 환상에는 선진국에 대한 ‘경험’이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선진국에 대해 환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실 아무나 선진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업무차 선진국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거나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는 것, 짧게는 여행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 모두 상황과 자본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여행리서치 전문회사 컨슈머인사이트가 매년 시행하는 ‘여행 행태 및 계획조사’의 2019년 보고서를 보면 1년 사이 보통 한국인이 동경하는 북미 및 유럽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온 비율은 15%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선진국을 경험함’에 대한 환상은 일종의 계급적인 문제다. 이른바 ‘수저론’에 빗대자면 선진국에 대한 환상은 선진국을 경험할 수 있는 수저에 대한 환상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 진입하면 많은 사회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선진국을 경험하고 돌아오면 삶이 변화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선진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일부 ‘수저’들에 불과하다는 한계 때문에 더욱 강해져왔다.

이 환상은 MZ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균열이 시작됐다. 코로나19 사태는 선진국의 방역시스템이 한국의 시스템에 비해 오히려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준 계기가 됐다. 동아시아연구원이 2020년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에서 신설한 항목이 한국의 ‘보건의료 수준이 자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95.9%로 거의 대부분이었다. 방역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은 선진국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대해 ‘다시 보기’를 가능하게 했다.

MZ세대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알고 보면 의료기술 선진국인 미국의 의료체계는 의료 약자를 전혀 보호해주지 못하고, 질서와 규칙의 국가 독일의 행정시스템은 느리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널리 알렸다. 영국은 ‘섬 쪽발이’가 됐고, 프랑스는 ‘유럽 짱깨’로 비하당하기 시작했다.

전복된 세계에서 자부심을 느끼다

K컬처는 이 상황에서 ‘전복의 쾌감’을 알려줬다. 리액션 비디오를 보고 소셜미디어에서 ‘오징어게임’과 방탄소년단의 성공에 대해 찾아보는 것은 전복적인 즐거움을 알려줬다. 단지 국뽕의 문제가 아니다. 기성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았던 ‘이 좁고 작은 나라’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지는 쾌감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아가 선진국 환상이 전복된다는 것은 수저가 전복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 그따위 나라’라는 인식은 예컨대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별 볼일 없네’와 같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다만 수저의 전복은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리액션 비디오를 볼 때에만 순간적으로 오는 유희에 불과하다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이때 느끼는 쾌감은 분명 선진국과 금수저가 뒤집히는 전복의 쾌감과 닮아 있다.

때로는 이 쾌감이 애국심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지난해 8월 발표한 ‘세대별 국가 및 사회인식 비교 조사’ 결과를 보면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인정받을 때 ‘애국심을 느낀다’고 답한 20대는 29%, 30대는 23.3%로 다른 세대에 비해 많았다. 그러나 그 수가 10명 중 3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리액션 비디오를 열정적으로 찾아 보는 MZ세대가 국뽕에 젖어 있다고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전복된 세계에서 MZ세대는 자부심을 갖기 시작한다. 사소하게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해도 많은 사람이 알아듣게 된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 외에도 유학을 가고 이민을 가지 않아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은 K컬처의 성공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다. 단지 이 자부심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때로 애국심으로 연결된 자부심은 자민족 중심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른 사회를 비하하고 ‘K’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국뽕이 나타날 때도 있다.

MZ세대가 열심히 K컬처의 성공을 탐닉하는 이유는 단지 민족주의적 문제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선진국에 대한 견고한 환상에 구멍을 냈고, ‘오징어게임’에 대한 열광은 수저들과의 거리감을 서로 ‘다를 바 없는 깐부’로 바꿨다. 말하자면 MZ세대는 K컬처의 성공으로 기존 사회가 전복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가상으로나마 전복의 쾌감을 느낀다.

김서윤 하위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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