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담라르카 주디산 근처에 있는 티무르 유적지. 위쪽이 티무르 군대가 사용했던 우물이고, 아래쪽은 ‘티무르의 발톱’이라고 불리는 언덕이다. ‘티무르의 발톱’은 티무르 군대가 저승사자처럼 휩쓸고 간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터키 담라르카 주디산 근처에 있는 티무르 유적지. 위쪽이 티무르 군대가 사용했던 우물이고, 아래쪽은 ‘티무르의 발톱’이라고 불리는 언덕이다. ‘티무르의 발톱’은 티무르 군대가 저승사자처럼 휩쓸고 간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세대차를 실감할 수 있는 말로 ‘실크로드(Silkroad)’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40대 중반 이상에 해당할 듯하지만, 실크로드라는 말은 ‘여행과 자유’라는 의미로 와닿는다. 1984년 KBS를 통해 방영된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그 배경에 있다. NHK가 10여년간의 준비 끝에 만든 시리즈인데 한국에서 방영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기타로(喜多郎)의 전자오르간 테마뮤직과 함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여행 본능을 자극했다. 대통령이 저세상으로 가도 레퀴엠(Requiem) 하나 없는 척박한 나라가 한국이다. 개인적 감상이지만, 한반도 최고 수준의 레퀴엠을 고 노태우 대통령에게 바치고 싶다. 이유는 수천 년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바다 밖 세상으로 향하게 도와준 ‘최초’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노 대통령 집권기인 1989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용무나 특별한 신분의 사람만이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여권을 가진 시민 모두에게 열린 해외 자유여행은, 한반도 역사에서 경천동지 사건 중 하나다.

실크로드에 대한 추억

1991년 구소련 붕괴, 1992년 중국과의 국교수교와 더불어 한국인의 해외여행 열기가 더 구체화됐다.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방영-노태우 대통령의 해외여행 자유화-소련 붕괴-중국과의 수교’가 한반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등장한 해외여행의 서막이었다. 유럽·미국 방문은 그 이후에 나타난 여행사(史)다. 그러나 실크로드에 얽힌 기억은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전혀 달라진다. 1980년대 다큐멘터리 방송을 접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나타나면서 ‘실크로드=수많은 여행지 가운데 하나’로 변한다. ‘여행과 자유’는 실크로드만이 아닌, 전 세계 해외 여행지로 확산된다. 50대 장년의 부모가 20대 자식에게 실크로드 비경을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해외 여행에 굶주렸던 세대와, 태어나면서부터 외국행이 자유로운 세대와의 차이인 셈이다.

실크로드의 중심에 들어선 나라들은 ‘스탄(stan)’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이다.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중간에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이어진 땅이다. 동의 중국, 남의 인도, 서의 유럽을 엮는 중개무역지로 실크로드 중간지점에 해당한다. 16세기 유럽 주도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인류 상거래 중심지로 활약한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다.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지만, 흔히들 중앙아시아 무역이라고 하면 중국의 비단을 유럽에 넘기는 중개상 정도로 보기 쉽다. 낭만적인 음악과 함께, 중앙아시아 낙타부대가 엄청난 양의 비단을 싣고 유럽으로 향하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전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으로, 실제보다 엄청 과장·왜곡된 풍경에 불과하다. 비단은 수많은 교역상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 중국 이외 지역에서 구입한 물건들이 실크로드의 주된 교역품이었다. 비단이 엄청 고가에 팔리는 상품이기는 했지만, 실제 교역품의 대부분은 비취·은·금과 같은 중앙아시아 내 지하자원과 수많은 인도산 향신료들에 집중됐었다.

‘실크로드’라는 말 자체가 등장한 것이 19세기 중반부터다. 1877년 독일 고고학자 페르디난도 폰 리히토펜(Ferdinand von Richthofen)이 자신의 고고학 저서에 독일어로 된 ‘실크로드(Seidenstraße)’란 개념을 창조해낸 것이 시작이었다. 육지와 바다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땅이기에 19세기 이전에는 지명이 아예 없었던 곳을 실크로드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독일 일부를 제외한 서방 대부분의 학자들에게는 전혀 낯선 용어로 와닿았다. 굳이 호명하자면 인도산 후추를 중심으로 한 ‘스파이스 로드(Spice Road)’가 적절했을 듯하다. 독일이 스파이스 로드가 아닌, 중국 중심 이미지가 담긴 ‘실크로드’를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우위 종교관이 배경에 있다.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중심에 둘 경우, 기독교 국가인 독일과 유럽의 권위가 손상된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철천지 상극관계다. 필자가 직접 확인했지만, 피자 하나만 봐도 원류는 이탈리아가 아닌 페르시아와 터키에 있다. 그러나 서방 그 누구도 이슬람권이 피자의 종주국이라 말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무교(無教)의 중국에는 양보하더라도, 이교도 이슬람에는 ‘절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황제 무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황제 무덤.

알렉산더와 칭기즈칸을 합친 인물

일본은 기독교 역사관에 기초한 독일 고고학계의 유산을 이어받은 나라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이뤄진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 동맹에서 비롯된 역사다. 따라서 1980년대 NHK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19세기 말 독일에서 탄생한 실크로드라는 말을 그대로 차용했다.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는 한국만이 아니라, 이후 동남아시아와 유럽에까지 방영된다. 중국 중심 다큐멘터리의 결론이지만, 결국 ‘동의 중국과 서의 유럽을 잇는 무역로=실크로드’로 정착된다. 마치 7세기 당나라의 장안(長安)이 유럽으로 이어진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며, 엄청난 고가의 ‘실크’가 동서 교역품의 전부인 것처럼 둔갑한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역할과 상품 비중이 더 큰데도, 중국을 동서무역의 주인공으로 과장한 주범이 바로 일본인 셈이다. ‘일대일로(一帯一路)’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기획한 21세기판 동서횡단 하이웨이로 이미 곳곳에서 삐걱대고 있다. 주인인 중앙아시아가 아닌, 객의 중국이 안방을 차지한 채 큰소리를 치는 형세다.

티무르(Timur)는 실크로드의 무게중심을 중국이 아닌 중앙아시아 자체, 나아가 인도에 둘 때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다. 1370년에서 1526년까지 156년 동안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서부를 지배한 대제국의 지도자다. 중앙아시아 역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동서 정복자로서의 영웅이기도 하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13세기 몽골의 칭기즈칸을 합친 캐릭터가 바로 티무르다. 정복 지도자이자 탁월한 군사전략가란 공통점도 있지만, 69세 일생 동안 보여준 점령 루트도 두 선배 정복자들과 비슷하다. 세계 무역이란 관점에서 볼 때 티무르는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 최후의 정복자에 해당한다. 16세기 대항해 시대와 함께 무역로가 바다로 옮겨가면서 실크로드의 운명도 다하게 된다. 티무르 사후(死後) 중앙아시아 전체가 세계 역사와 동떨어진 내륙의 고립된 섬으로 추락한다. 신대륙 바다의 시대가 열리면서 땅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다.

서방 중심, 나아가 서방이 허용한 중국 중심 세계관 때문이겠지만, 티무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렇게 높지 않다. 짧은 시기에 동서를 정복한 인물이지만, ‘잔인’이라는 단어는 티무르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고정된 수식어다. 정복 과정에서 당시 세계 인구의 5%에 달하는 1700만명을 학살했다는 식의 얘기가 티무르 관련 고정 메뉴 중 하나다. 13세기 대제국 몽골과 비교하면서 누가 더 많이 죽였는가라는 식의 얘기도 등장한다. 아시아와 유목민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역사관이 표류한다. 세계사에 등장한 정복자치고 학살과 무관한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방 중심 역사관이지만, 나폴레옹을 학살자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볼 때 ‘나폴레옹=잔인한 정복자’였다. 티무르 역시 동서 예외 없이 존재했던 수많은 정복자 중 한 명일 뿐이다.

터키 카르스의 티무르 흉상.
터키 카르스의 티무르 흉상.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주디산

마운틴 주디(Mountain Judi)는 교과서에서나 접하던 티무르를 만나게 도와준 성지(聖地)다. 이곳으로 향하던 도중 우연히 티무르가 남긴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디는 터키·시리아·이라크 3국 간의 국경선에 해당하는 산이다. 메소포타미아 동부 지역에 위치한, 노아 대홍수의 종착점으로 통하는 곳이다. 기독교 창세기와 이슬람 코란(Quran)에도 등장하지만, 신의 형벌로 밤낮 40일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주디의 정상은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배가 최종 안착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서방에서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선에 들어선 아라라트산(Mountain Ararat)을 노아 배의 최종지로 보지만 메소포타미아 현지에서는 주디가 진짜라고 말한다. 필자도 그 같은 생각에 동의한다. 이유이자 근거는 너무도 간단하다. 홍수가 밀어닥쳤던 강 주변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산이 바로 주디이기 때문이다. 아라라트는 멀고 먼 티그리스강의 수원(水源) 중 하나일 뿐, 홍수를 만날 만한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중앙아시아를 배제한 실크로드 역사관이 그러하듯, 종교에 기초한 서방 중심의 세계관이 기독교권 아르메니아의 토지 아라라트 신화로 이어진 셈이다.

주디산으로 가던 중 만난 티무르의 흔적은 이른바 ‘티무르의 발톱(Timur’s claws)’이라 불리는 언덕이다.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암벽으로, 티무르 군대가 저승사자처럼 휩쓸고 간 흔적이라고 한다. 1401년 티무르가 이라크 바그다드 공격에 나설 당시 거쳐간 지역이다. 당연하지만, 당시 주변 전체가 대학살 현장으로 변했다. 암벽을 자세히 보니 동물이 남긴 듯한 날카로운 발톱의 흔적으로 느껴진다. ‘티무르의 발톱’이란 지명 자체가 은유적이고도 상징적이다. 백전백승 정복자 티무르의 모습이 ‘발톱’이란 단어 속에 넘실댄다. 몽골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겠지만, 뛰어난 기동력은 티무르 대제국의 최대 무기였다. 거대한 독수리가 그러하듯, 먹이를 낚아챈 뒤 날카로운 발톱 자국만 남긴다. 티무르는 14만 상비군을 통해 동서를 정복한 인물이다. 20만 상비군으로 싸운 몽골의 군대가 그러했듯이, 특별히 고정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싸우는 유목민 군대다. 말을 탄 상비군이 앞서 나가 싸우고, 가족과 가축이 뒤를 따르면서 전투 지역으로 전진한다. 만약 패할 경우 상비군뿐만 아니라 부족, 가족, 가축이 전부 사라지게 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문자 그대로 ‘결사대(決死隊)’가 티무르 군대였다.

어제의 고향과 역사보다, 대이동 이후 맞이한 오늘의 새로운 세계와 현실이 한층 더 중요하다. 티무르는 승리한 뒤 얻은 전리품을 병사 모두에게 공평히 나눠줬다. 부의 축적이 아니라, 땅의 지배를 통한 정복자라는 명성이 티무르 인생의 전부였다. 그 결과 페르시아, 오스만터키, 이라크, 시리아, 러시아, 인도에 이르는,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주변 나라 전부를 순식간에 정복했다.

제국을 몰락시킨 쿠릴타이제도의 비극

‘티무르의 우물(Timur Well)’은 ‘티무르의 발톱’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들어선 대제국의 흔적이다. 바그다드 공격에 앞서 티무르 군대가 머물렀던 야영지 주변의 우물이다. 최근 막 장식된 듯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우물이 눈에 들어온다. 반지하 땅에서 터져나온 물로, 지금도 현지 주민들을 위한 식수로 활용되고 있다. 철창문이 닫혀 있어서 물 맛을 볼 수는 없었다. 우물 주변 주민의 대부분은 터키가 아닌 쿠르드족이다. 티무르 우물에 대해 물어봤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대한 정복자의 흔적이 작은 우물 하나로 표현돼 남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만리장성 같은 초대형 유적이 아니라 티무르와 군대, 가족, 가축이 모두 나눠 마셨을 우물 하나로 압축돼 있다는 것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중앙아시아의 세계관이지만, 물은 생명 그 자체다. 엄청난 위력의 분수는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을 호위하는 최대 장식물이다. 근본으로 올라가면 중앙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물에서 시작된다. 에덴동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물로 채워진 천국을 의미한다. 분수는 천국의 물을 땅에서 하늘로 되돌리는 감사와 기도의 상징물이다. 티무르의 우물은 고대 로마 이래 지금까지 이어진 유럽 분수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156년 단명의 역사는 티무르 대제국과 관련된 최대의 의문이다. 티무르의 자식과 손자로 이어진 왕조라고 하지만, 내용을 보면 티무르 1인 정복국가에 그친 나라다. 티무르 사후의 대제국은 후손들의 내분·내전으로 얼룩진, 집안 싸움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티무르가 남긴 땅이 급격히 줄어든다. ‘대박 제국’이라고나 할까? 한순간 핀 뒤 곧바로 사라진 대제국이다. 대제국의 추락은 역사가들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다. 필자가 주목한 부분은 ‘쿠릴타이(Kurultai)’다.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의사결정 장소로 ‘함께 모인다’는 몽골어에서 유래된 정치구도다. 대제국 티무르, 나아가 몽골의 추락을 설명해주는 핵심 키워드가 쿠릴타이라는 단어 하나에 배어 있다.

티무르 대제국의 모든 의사결정은 쿠릴타이를 거쳤다. 참가자는 초원에 흩어진 수많은 부족들의 대표자들이다. 최고 지도자의 자식이라도 쿠릴타이 결정에 의해 타도될 수 있었다. 최고·최선의 민주주의라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시간과 부패다. 전부 모이려면 엄청 시간이 걸린다. 돈·토지·가축으로 부족 대표자들의 환심을 사면서 쿠릴타이 기능 자체가 마비된다. 21세기 중앙아시아는 수많은 독재자들의 장수 만세 무대로 비친다. 어제의 역사에서 보듯, 금권정치의 악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티무르는 배신과 기습공격을 통해 스스로의 위치를 구축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부족 대표들을 돈으로 매수했다. 금권정치라지만 티무르의 카리스마가 있을 때는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후손들은 ‘파워, 전략, 권위’와 무관했다. 그 결과 추락을 거듭하다가 멸망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무르제국의 유산은 인도 무굴왕조(Mughal Empire)로 계승된다. 무굴왕조는 티무르가 점령한 뒤 세워졌다. 타지마할궁전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쿠릴타이와 무관한 왕조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시대의 변화에 맞는 새로운 가치관과 제도가 필요하다. 티무르를 정복자로 추앙한 쿠릴타이지만, 대제국으로 나아가면서 장애물로 전락한다. 세대차는 너무도 당연하고 필요하다. 장년 눈에는 어설프게 보이겠지만, 역사의 중심은 항상 젊은 세대에 있다.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도 21세기 세대와 전혀 무관한, 20세기의 흑백시대 추억일 뿐이다. 실크로드가 아니라, 곧 등장할 ‘스페이스 로드(Space Road)’가 새로운 시대와 세대의 여행 열기를 자극할지 모르겠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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