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겸. ‘운흥사 감로탱화’. 1730년. 비단에 색. 245.5×254㎝. 경남 고성 운흥사
의겸. ‘운흥사 감로탱화’. 1730년. 비단에 색. 245.5×254㎝. 경남 고성 운흥사

한국이 좀비영화의 종주국이 되었다. 좀비영화는 미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원조다. 그후 세계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더니 아시아의 좀비인 ‘강시’가 탄생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제작한 좀비영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단연 압권이다. ‘부산행’(2016), ‘킹덤’(2019), ‘지옥’(2021), ‘지금 우리 학교는’(2022) 등 한국판 좀비영화는 외국 좀비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상에 우뚝 섰다. 특히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지금 우리 학교는’은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54개국에서 보름 동안이나 1위를 지켰다.

한국산 좀비영화는 ‘K좀비’, ‘K지옥도’라는 특별한 용어로 지칭된다.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뒤따른다. 그럴 만하다. 용어만 바뀌었을 뿐이지 한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좀비에 익숙한 민족이다. 좀비는 살아 있는 시체를 뜻한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체도 아닌 그 무엇, 그것이 좀비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낯설지 않다. 익숙하다. ‘구미호’ ‘불가살’ 등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좀비의 사촌들인 셈이다. 특히 구미호는 납량특집의 단골메뉴였다. 시대마다 당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를 구미호로 분장시켜 수도 없이 우려먹은 것만 봐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K좀비’는 ‘구미호’나 ‘불가살’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K지옥도’의 내력이 만만치 않음을 의미한다.

‘운흥사 감로탱화’ 세부
‘운흥사 감로탱화’ 세부

‘K지옥도’의 프로토콜 ‘감로탱화’

‘K좀비’의 족보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미호보다 윗대 조상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감로탱화(甘露幀畵)’가 그 시조다. ‘감로탱화’는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고 저승과 이승, 영혼과 육신이 한 화면에 등장하는 진정한 ‘K지옥도’이다. 경남 고성 운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감로탱화’는 생과 사의 경계선만 넘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생·전생·내생의 삼생이 그려져 있다. 드라마틱하다. ‘감로탱화’에서 ‘감로’는 ‘달콤한 이슬’이고, ‘탱화’는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벽에 거는 불교회화’이다. ‘감로탱화’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달콤한 이슬을 그렸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차차 알기로 하고 우선 그림을 살펴보자.

그림은 상단·중단·하단의 삼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불(佛), 보살(菩薩)이 있는 미래 세계이다. 중단은 음식이 성대하게 차려진 재단을 중심으로 상주와 제사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 세계이다. 하단은 이미 죽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이 머무는 과거 세계다. 김남희는 ‘조선시대 감로탱화’(2018)에서 “‘감로탱화’의 도상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삼세의 시간이 한 화면에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면서 “상단은 불·보살이 다가올 미래의 구제력을 보여준다면, 중단의 재단과 법회 장면은 현재의 시점을, 하단은 전세(前世)의 업을 변화무쌍한 인간의 현실상을 통해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감로탱화는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 의식에 사용된 조선시대 불화로 육도 중생이 겪어야 할 업의 굴레를 불·보살의 자비가 깃든 ‘감로’로 구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도상화한 그림이다.

육도는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끝없이 윤회를 되풀이하는 6개의 세계를 말한다. 곧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 천’이 육도의 세계다. 육도에서 사람은 그나마 상당히 윗세계에 머무는 편이다. 아귀(餓鬼)는 지옥과 축생 중간단계로 간다. 말이 중간단계이지 지옥이나 다름없다. ‘감로탱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존재는 이 두 명의 아귀다. 그림 중앙에서 그릇을 들고 재단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아귀는 지옥세계를 대표한다. 아귀는 귀신이다. 아귀의 ‘아(餓)’는 ‘굶주림’을 뜻한다. 탐욕스럽게 먹는 사람을 보고 ‘아귀처럼 먹는다’고 하듯 아귀는 귀신이 되어서도 먹는 것에 집착한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만 가는 것이 아니다. 다음 생에도 고쳐지지 않는다. 아귀는 아귀도에 가서도 식탐을 버리지 못한다. 하루 온종일, 일 년 열두 달을 오직 먹을 생각만 한다. 식탐으로만 보면 진정한 식신(食神)의 경지에 도달한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아귀의 목은 바늘처럼 가늘어서 어떤 음식도 삼키지 못한다. 그마저도 입에서 불을 뿜고 있는 바람에 먹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아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매순간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야 한다. 식신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다행스럽게 아귀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감로’다. 감로는 한 방울만 먹어도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신령스러운 이슬이다. 식신에게조차 식탐이라는 번뇌를 내려놓게 할 정도로 효능이 탁월하다. 어디 그뿐인가. 끝없이 육도를 헤매게 만든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극락에 태어날 수 있게 해주는 생명수다. 그 신비스러운 이슬은 오직 불·보살만이 줄 수 있다. 그래서 제사를 베푸는 사람들이 천도재에서 그림 상단의 불·보살님께 간청을 하는 것이다. 부디 저 불쌍한 아귀들에게 감로를 내려주어 굶주림을 없게 하고 극락세계로 이끌어달라고 말이다. 아귀가 밥그릇에 담고 싶은 것은 그를 구원해줄 한 방울의 감로수다. 그래서 그림의 이름이 ‘감로탱화’다. 아귀에게 감로를 내려주기를 간청하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감로탱화’ 세부. 우학문화재단
‘감로탱화’ 세부. 우학문화재단

생전·사후 모습을 동시에 그려

아귀부터 시작된 하단의 인물들은 전부 죽은 영혼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옥세계에 있다. 생전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살다 죽었기에 지옥에 떨어졌을까. 지옥이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궁금증이 들 것이다. 그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그림에서는 죽은 이들의 생전 모습이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어떤 사람은 연희패에서 줄타기를 하다 죽었다. 어떤 이는 피리를 불다 죽었고, 어떤 이는 깃발을 들고 가다 죽었다. 배를 타고 가다 죽고, 칼 싸움을 하다 죽고, 형장에서 죽고, 전쟁터에서 죽고, 목욕을 하다 죽었다. 하단에는 당시 사람들이 맞닥뜨렸던 재난현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1730년 당시 상황을 추정해볼 수 있는 훌륭한 풍속화다. 아카데믹한 회화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민초들의 삶이다. 여기저기서 속절없이 팍팍 쓰러지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이네”라고 하던 상여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정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일까. 이미 죽어 저승에 있는 사람들이 맞을까. 탱화를 그린 작가는 이런 의심을 예상한 것 같다. 그래서 죽은 사람 옆에 사후의 모습을 검은 먹선으로 실루엣처럼 그려 넣었다. 죽음의 그림자다. 전생과 이생의 동시 등장이다. 만화 같은 표현법을 1730년에 도입하다니.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갔다. 넷플릭스에서 상영한 ‘지옥’의 저승사자들이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운흥사의 ‘감로탱화’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했던 화승(畫僧) 의겸(義謙)이 그렸다. 의겸은 평생 불사에 참여한 화사 조직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하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그의 작품은 25점 정도가 남아 있다.

이런 발상은 의겸의 작품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작품보다 50여년 앞선 ‘감로탱화’(우학문화재단 소장)에서 이미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중음신(中陰身)의 표현이다. 중음신은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 49일 동안 지니고 있는 몸이다. 그림 아랫부분에 벌거숭이로 그려진 영혼들이 중음신이다. 중음신 뒤에는 아귀가 그려져 있다. 윗부분 네 명의 인물 위에도 역시 네 명의 아귀가 보인다. 망자의 아바타다. 아귀들은 모두 탈바가지처럼 큰 얼굴에 목은 끊어질 듯 가늘다. 입에서는 불을 뿜고 있다. 그림자처럼 등장한 망자의 아바타들은 이들 모든 망자의 미래가 지옥으로 향할 것임을 예고한다. 의겸은 이 작품을 보고 그림자 영혼을 생각해낸 것 같다. 우측 하단의 아귀도 기괴하다. 입속에 세 명의 망자가 들어 있다.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아귀가 인간을 먹겠다니. 살아생전의 버릇이 저승까지 간다는 말이 맞다.

‘K좀비’를 그린 ‘K지옥도’가 인기를 끈 비결은 무엇일까. 허황된 소재를 다룬 영화 같은데 들여다보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현실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로탱화’도 마찬가지다. 아귀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죽음, 구원, 제사, 고통, 재난, 풍속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이런 그림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그려졌다. 중국에서도 수륙화나 우란분경변상도가 제작되었지만 우리나라 ‘감로탱화’처럼 현실 밀착적인 내용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감로탱화’야말로 ‘K지옥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조정육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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