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게티이미지
photo 게티이미지

핀테크란 ‘파이낸스(Finance)’와 기술을 의미하는 ‘테크놀러지(Technology)’가 하나로 합쳐진 단어다. 금융과 IT 기술이 결합한 금융 서비스를 의미하는데, 현대 화폐시장의 근간을 뒤흔드는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핀테크 역사는 놀랍게도 1860년에 시작되었다. 피렌체대학 물리학 교수인 지오바니 카셀리가 1860년 이미지나 서명을 전신선을 통해 먼 거리까지 전송할 수 있는 세계 최초 스캐너인 팬텔레그래프(Pantelegraph)를 발명한 것이다. 1864년에 프랑스가 법을 제정하여 팬텔레그래프 팩스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덕분에 파리에 있는 은행 고객이 리옹까지 가지 않고도 사인해서 전송하면 공식적인 서명으로 인정되었다.

1913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은행 간 결제는 현금이나 금을 마차에 싣고 직접 운반해야 했다. 이후 연준에 의해 모스부호 전신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 FEDWIRE(Federal Reserve Wire Network), 곧 ‘은행 간 결제 시스템’이다. 연준과 산하 12개 지역 연준, 재무부 등을 연결하는 전국적 통신망이었다. 이로써 전신에 의한 자금 이동의 혁신을 불러왔다.

그 뒤 1950년 다이너스클럽 신용카드가 처음 등장했다. 처음에는 뉴욕시의 14개 레스토랑을 회원으로 시작하여 이후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로써 신용카드 시대가 열렸다. 또 1967년에는 영국 바클레이스은행이 자동현금지급기(ATM·Automated Teller Machine)를 런던에 처음 설치하여 은행 지점들과 은행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도 1980년대에 마그네틱이 삽입되고 1990년대에 EMV칩을 심어 현재의 신용카드로 진화되었다.

1980년대에는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데이터의 대량 처리가 가능해졌다. 또 1990년대에는 인터넷과 전자상거래 비즈니스 모델이 번창하게 되어 핀테크의 혁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금융기관들은 인터넷뱅킹, 온라인 결제 등 디지털 금융기술을 발달시켰다.

e메일 결제회사 ‘컨피니티’ 공동창업자 루크 노섹. photo 위키피디아
e메일 결제회사 ‘컨피니티’ 공동창업자 루크 노섹. photo 위키피디아

이메일 결제회사 ‘컨피니티’의 등장

1998년 펀드매니저 출신 피터 틸은 모교인 스탠퍼드대학에서 여름학기 강의를 했다. 신출내기 강사라 수강생은 6명에 불과했다. 이 강의에서 그는 24살의 러시아계 유대인 청년 맥스 레브친을 만났다. 의기투합한 둘이 처음 만든 제품은 정보를 저장하는 소프트웨어였는데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돈’을 저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이는 돈을 전송하는 기술로 발전한다. 이로써 e메일 주소만 알면 송금할 수 있는 전자결제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들의 기술이 기반이 된 e메일 결제회사 ‘컨피니티’의 이념은 중앙집권적 정부 제도를 반대하는 자유 지상주의자 틸의 이상과도 일치했다.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온라인 계좌를 제공해 특히 개도국 국민들이 인플레이션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자국 통화 이외에 다양한 선진국 통화를 쉽게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루크 노섹에 의하면 그들의 초기 미션은 “통화를 파괴하는 은행과 정부의 부패한 카르텔에 의한 간섭과 무관한 글로벌 통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들은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디지털화폐를 만든다는 아이디어에 흥분했다.

게다가 컨피니티의 송금방식은 혁신적이었다. 한 번만 신용카드 정보를 입력해 놓으면 언제든 e메일을 이용해 송금할 수 있어,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았다. 환율도 알아서 해결해준다. 이른바 금융과 IT기술의 결합인 핀테크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그 뒤 빠르게 경쟁사들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일론 머스크의 ‘X.com’이었다. 송금방식이 컨피니티와 똑같았다. 그들은 ‘독점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어 두 회사가 합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0년 3월 ‘컨피니티’와 ‘X.com’은 50 대 50 합병을 단행해 ‘페이팔’이 탄생했다. ‘페이팔’은 창업 초기 유대인 케빈 하츠로부터 투자받았다. 이후 페이팔은 이베이에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그 뒤 회사는 빠르게 성장해 IT버블 붕괴로 주식시장이 무너졌음에도 2002년 2월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당시 이베이의 맥 휘트먼은 통 큰 유대인답게 페이팔을 15억달러에 사들였다.

 

페이팔의 모태가 된 ‘X.com’의 설립자 일론 머스크. photo 뉴시스
페이팔의 모태가 된 ‘X.com’의 설립자 일론 머스크. photo 뉴시스

페이팔 탄생의 모태 일론 머스크의 X.com

페이팔은 쉽게 말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중개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escrow) 서비스로,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지불하면 페이팔은 상품이 안전하게 구매자에게 도착한 걸 확인한 뒤 그 돈을 판매자에게 전달하는 형식이다. 이를 제3자 결제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에스크로 서비스가 꽃을 피운 건 아직 신용사회가 정착하지 못한 중국이었다.

인터넷 환경이 없는 곳에서도 결제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기술이 1999년 발명되어 2004년 상용화되었다. 이른바 근거리 무선 통신(Near Field Communication·NFC) 기술이다. 아주 가까운 거리(10㎝ 이내)의 무선 통신을 하기 위한 기술이다. 모바일결제, 교통카드, 티켓 등 여러 서비스에서 사용할 수 있다.

구글은 이 기술을 이용해 2011년 구글 지갑(Wallet)을 통해 본격적인 모바일결제 시대를 열었다. 2014년에는 삼성페이가 도입되었다. 2014년 세계 스마트폰 보급률이 PC 보급률을 추월하면서 모바일결제 시대가 도래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후발개도국이었다. 금융 환경도 열악했다. 또 사기 사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중국인들은 신용거래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돈을 먼저 보내고 물건을 나중에 받는 거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용카드조차 정착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이 오히려 중국에는 도움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기존 금융 인프라(신용평가시스템 미발달 등) 대신 제3자 온라인 결제 시스템(에스크로 시스템)으로 금융 취약계층에 대한 신용 확대 전략이 추진되었다. 이로써 신용카드 사회를 건너뛰고 곧바로 모바일결제 시대로 직행할 수 있었다.

 

알리페이를 만든 마윈 알리바바 회장. photo 뉴시스
알리페이를 만든 마윈 알리바바 회장. photo 뉴시스

모바일결제로 직행한 중국의 혁신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1995년 넷스케이프를 시작으로 웹브라우저가 탄생했고, www(월드 와이드 웹)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닷컴 시대가 열렸다. 후발개도국 중국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1995년 중국의 은행들은 인터넷뱅킹과 모바일뱅킹을 시작했다.

1994년 마윈은 미국에 출장 가서 컴퓨터를 처음 접하고 중국 상품(맥주)을 검색해보았다. 하지만 검색되지 않았다. 중국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는 귀국해 인터넷으로 중국 상품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업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인터넷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차이나 옐로페이지’ 사이트를 개설했다. 그 뒤 1999년 B2B 전자상거래 사이트 알리바바를 창업했다. 초창기 알리바바는 중국 중소기업의 제품과 정보를 올려놓고 바이어와 연결해주는 단순한 정보서비스 플랫폼이었다. 1999년 알리바바는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알리바바는 2000년 손정의를 만나면서 급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무렵 손정의는 중국 인터넷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간파하고 투자 대상을 물색하던 참이었다. 당시 그는 벤처기업의 꿈을 키우는 20여명의 젊은 중국 기업인들과 릴레이 형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중 한 명이 마윈이었다.

마윈은 이날 6분 만에 추진 중인 비즈니스 모델 설명을 마쳤다. 미래 비전을 제시한 게 다였다. 마윈의 투자 요청 금액은 200만달러 정도였으나, 손 회장은 이 짧은 시간에 마윈에게 2000만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손 회장은 마윈의 눈빛에서 넘쳐흐르는 열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사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글로벌 인재들이 알리바바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에 지사를 두어 글로벌 시장개척 전략을 펼쳐나갔다. 2001년 말 알리바바에 등록된 사업자 수가 100만을 넘어섰다.

 

세계 최대 핀테크로 우뚝 선 알리페이

2003년 마윈은 미국 이베이를 모방해 C2C 쇼핑몰 타오바오를 만들었다. 수수료는 무료였다. 여기에 페이팔을 모방해 알리페이 결제 시스템을 내놓았다. 알리페이가 타오바오 급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신용결제 시스템이 완성되자 영세 자영업자들이 플랫폼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알리바바는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로, 알리페이는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알리페이 성공 이후 위페이, 유니온페이, 라카라 등 제3자 결제서비스 회사들이 생겨났다. 그 뒤 중국 사회에 단말기를 통한 지불, 모바일결제, 인터넷 지불, 선불카드(Prepaid card) 등이 보편화되었다.

한국이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세계 각국의 인터넷전문은행은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초기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중국의 발전이 놀라웠다. 2006년 중국에는 크라우드펀딩, 개인 간 대출(P2P Lending)과 소액대출(Micro lending) 업체들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핀테크의 시대가 열린다. 크라우드펀딩 분야에는 Demohour, Tmeng, Dreamore 등의 업체가 경쟁하고 있다. P2P 대출 분야에는 Lufax, Daibang, Renrendai, Anxin, Creditease 등의 업체가 경쟁하고 있다.

소액대출 분야에는 Aliloan, 360buy, Suning 등의 업체가 경쟁하고 있는데, 알리바바가 운영하는 Aliloan이 선두 기업이다. 마이뱅크(알리바바 지분 30%)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신용평가 시스템을 도입해 금융과 ICT 기술 발달에 기여했다. 개인 신용평가가 부재한 중국 금융의 약점을 공략해 ICT 기반의 자체적인 신용평가 툴을 제작해 개인이 손쉬운 온라인 소액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Aliloan은 빅데이터를 활용해 평균 120만원의 대출을 1주일 단위로 빌려준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그룹이 2014년 금융 사업을 담당하는 새 회사 ‘앤트(개미)금융서비스그룹’을 설립했다. 앤트금융서비스그룹의 사업은 마이뱅크를 포함해 6개로 구성됐다. 중국의 페이팔인 ‘알리페이’, 알리페이를 사용할 수 있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알리페이 월릿’, 7700억위안을 가진 금융 펀드 ‘위에바오’, 제3 금융서비스 플랫폼 ‘자오카이바오’, 마이크로론 회사 ‘앤트 마이크로’ 등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핀테크 시장이다. 중국 인터넷전문은행은 2015년 시작됐다. 2018년 핀테크 투자액은 255억달러로 세계 1위, 그해 세계 핀테크 투자액의 절반에 달했다. 중국은 마이뱅크와 위뱅크(텐센트 지분 30%) 성공 사례에 힘입어 미국을 제치고 100억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핀테크 투자 시장이 됐다.

 

중국 정부가 핀테크에 철퇴 가한 배경

현재 중국 정부는 중앙은행디지털화폐를 개발하여 테스트 중이다. 중국 통화금융 시스템을 정부가 주도하기 위해서는 너무 커져버린 핀테크 기업에 대해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고 판단한 듯했다. 2020년과 2021년 중국 정부는 핀테크 부문에서 몇 가지 우려를 표명했다.

첫째, 대형 핀테크 기업들이 국영 은행을 능가했다.

둘째, 대형 핀테크 기업들은 정치권력을 비롯해 너무 많은 힘을 축적해왔다.

셋째, 마윈은 2020년 10월 포럼(Bund Summit)에서 중국의 금융 규제를 비판하여 정책 입안자와 규제기관을 자극했다.

넷째, 핀테크 기업들은 과도한 대출을 통해 불합리한 지출을 조장했다.

2020년 11월 2일, 알리바바그룹이 최대 주주로 있는 앤트파이낸셜 상장(IPO)이 전격 중단되었다. 350억달러의 세계 최대 IPO로 기록될 전망이었다. 상장되면 상하이증권거래소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할 예정이었다. 중국 본토에서 515만명이 청약했고, 홍콩에서는 전체 인구의 21%인 155만명이 청약에 나선 IPO가 중지된 것이다.

그 도화선은 마윈의 설화(舌禍)로 보였다. 마윈은 “중국은 금융 리스크가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금융 시스템이 없다” “감독만 있지 관리는 없다”라며 금융관리 감독기관을 비판했다. 또한 금융기관을 전당포 영업에 비유하며, 디지털 금융혁신 없이는 글로벌 금융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이에 더해 중국 정부가 밀고 있는 디지털화폐에 대한 불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상황과 중국 정부의 정책 발표를 종합해 보면, 앤트그룹과 마윈에 대한 문제가 아닌 중국 핀테크 기업에 대한 정부 규제 문제로 귀결된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