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판교역 인근에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 photo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경기도 판교역 인근에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 photo 고운호 조선일보 기자

12년 차 개발자 A씨는 기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크런치모드(Crunch Mode)’에 관해 들려줬다. “4년 전 마지막 크런치모드로 굴러본 게 중견 게임업체에 다니면서 두 달 간격으로 야근을 밥먹듯 했을 때다. 스마트폰용 초경량 게임을 만드는 쪽으로 회사 방침이 바뀌면서 두 달에 하나씩 게임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 중 한 달은 평균 9시에 출근해 새벽 1시쯤 퇴근하는 걸 무휴로 계속해야 했다. 밤새고 회사에서 자면서 야식으로 어떤 라면을 끓여 먹을까 고민했던 게 낙이었던 때다.”

A씨가 일하는 곳은 직원이 700명 이상 되는 업체다. 그의 크런치모드가 4년 전 종지부를 찍었던 건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부터다. 정부의 노동정책 기조가 바뀌면서 게임업계를 병들게 했던 크런치모드는 적어도 A씨가 다니던 회사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부서나 직무에 따라 야근 문화가 완전히 소멸되진 못해도 업무 환경 전반이 개선됐다는 점에서는 52시간제가 기여한 부분이 컸다.

 

“중소업체일수록 크런치모드 돌입 수월”

‘크런치모드’는 주로 IT업계에서 쓰는 용어다. 고상하게 풀어 쓴다면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앞두고 막판 스퍼트를 하기 위한 비상근무를 뜻한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런 고상함보다는 잔인함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고강도 혹사를 뜻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판교나 구로디지털단지의 건물 불빛을 ‘오징어배’라고 표현한 것도 크런치모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판교 오징어배’ ‘구로 오징어배’라는 은어가 나온 이유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판교나 구로에는 살짝 긴장감이 돈다. 특히 어렵게 자리 잡은 업무 문화가 다시 유턴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최근에서야 52시간제 혜택을 누리기 시작한 중소 IT업체 직원들의 긴장감이 더 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 사업주와 노동자의 합의를 전제로 연장근로와 탄력근로 단위 기한을 월 단위 이상으로 확대하는 ‘주52시간 근무제 탄력 조정’을 약속했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는 ‘스타트업·전문직의 근로시간 규제 완화’가 포함됐다.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개정하거나 근로시간 특례조항을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크런치모드는 다시 부활할 여지가 있다. 안진수 노무법인 유앤 파트너 노무사는 “근로기준법 시행령 31조를 개정해 노동부 장관이 그 범위를 확대할 수 있지만 절차상 노사 합의가 있어야 해서 노조가 있는 업체의 경우는 적용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시행령 34조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한데 통째로 근로시간 제도 적용에서 제외할 수 있는 근로자를 정할 수 있어서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흐름 자체만으로도 직원들이 느끼는 부담은 상당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형 게임업체는 노조의 힘이 센 축이라 괜찮겠지만 이번 정부의 규제 완화 대상은 주로 자본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 IT기업과 스타트업을 겨냥하고 있다. 중소 업체 개발자들일수록 크런치모드에 돌입하기 쉬운 환경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아래서도 크런치모드는 업체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존재해 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1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밝힌 종사자는 15.4%에 불과했는데 게임사 규모에 따른 비율은 사뭇 달랐다. 300인 이상 되는 대형 개발사는 크런치모드를 경험한 비율이 0.5%에 불과했지만 5~49인, 50~99인 규모의 중소 개발사 종사자는 84.4%, 88.5%가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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