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행차’(부분). 종이에 색. 46.7×4600㎝, 국립중앙박물관
‘정조의 화성행차’(부분). 종이에 색. 46.7×4600㎝, 국립중앙박물관
정조가 탄 백마.
정조가 탄 백마.

지난 5월 10일 윤석열 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은 식전행사와 본행사 그리고 용산 집무실 이동으로 진행되었다. 취임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취임사일 것이다. 앞으로 5년 동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밝히고 다짐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취임식 행사는 단지 선언문을 전달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이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위치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례가 필요하다. 의례는 대통령 취임 선서, 취임 연설, 21발의 예포 등의 격식을 통해 대통령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그 다양한 형식 중에서도 참석자들을 가장 즐겁게 해준 장면은 군악대와 의장대의 등장이었다. 빨간색, 흰색, 검은색 등 원색의 군복을 입은 군악대와 전통복장을 한 의장대가 양쪽에서 걸어나올 때 행사장은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이렇게 시끌벅적해야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허리가 안 아픈 법이다. 육·해·공군을 상징하는 군악대와 의장대가 대통령을 향해 ‘받들어 총’을 외칠 때 대통령이 삼군의 통수권자임이 드러난다. 시각적인 의사전달방식이 매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복잡한 취임식장에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TV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실물대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취임식 전에 차에서 내려 시민들과 주먹인사를 나누고 취임식 후에 카퍼레이드로 얼굴을 보여주며 손을 흔든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겠는가.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TV나 인터넷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언제든 볼 수 있지만 영상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달랐다. 평생 가야 존귀하신 나라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백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날마다 오늘이 어제 같은 밋밋한 일상 속에서 살다 느닷없이 왕의 행차를 볼 수 있다고 상상해보라. 심심하던 무채색의 삶에 갑자기 컬러풀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초대권도 필요없었다. 부지런히만 움직이면 높은 언덕에 올라가 ‘로열석’을 차지해 눈앞에서 펼쳐지는 행사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가 얼마나 웅장하고 장엄했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현존한다. 정조가 화성(수원)의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온 내용을 그린 ‘정조의 화성행차’가 바로 그것이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흔히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라고도 부른다. 왕의 성묘를 능행이라 한다. 현재 보위에 오른 왕이 선대왕의 능에 성묘하는 것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7박8일에 걸쳐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에 다녀왔다. 1795년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탄신 60주년이 되는 해이며 생모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된 해이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둘 다 1735년생으로 동갑이다. 두 사람은 8세에 결혼했으나 사도세자는 28세에 뒤주에서 굶어 죽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로부터 33년을 더 살아 회갑을 맞이했다. 사도세자가 살아 있었더라면 부부가 나란히 회갑을 맞이했을 것이다. 정조는 홀로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방문하였다.

 

‘의궤’에 기록한 정조의 7박8일

정조는 7박8일 동안의 현륭원 참배의 여정을 의궤로 제작하게 했다. 그 책의 제목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을묘년(1795)의 원행을 정리자(整理字)로 만든 의궤’라는 뜻이다. 임금이 왕릉에 성묘하러 가는 것을 능행이라고 한다면, 왕의 친어버이나 세자(세자빈)의 무덤인 원(園)에 거둥하는 것을 원행(園幸)이라 한다. 사도세자는 죽을 때 왕이 아니라 세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능행이 아니라 원행이라고 적었다. 의궤에 사용한 금속활자는 정리자였고, 그림은 목판화를 사용했다. 의궤는 왕실이나 국가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그 행사에 관련된 전말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의궤의 역할은 기록성에 있다. 당시 행사의 장엄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후대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의궤는 후세에 똑같은 행사를 개최할 때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기록은 글과 그림을 적절히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고 행사도의 경우에는 글보다 그림이 더 효과적이었다. 의궤에 들어가는 그림은 김홍도, 김득신 등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어진화사들이 제작했다.

조선왕조의 의궤는 건국 직후부터 편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조선 전기의 의궤는 완전히 불에 타 없어져 버렸고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0년(선조 34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국상(國喪)을 기록한 내용이다. 1928년까지 작성된 의궤는 총 608종이 남아 있다. 의궤에 들어가는 내용은 다양하다. 그중 왕과 왕비의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예장(禮葬) 등에 관한 사항이 가장 많다. 서적의 편찬과 수정에 관한 의궤도 포함된다. 즉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 ‘국조보감(國朝寶鑑)’ ‘선원록(璿源錄)’ 등의 서적을 편찬하거나 수정할 때 의궤를 제작하였다. 왕실 가족의 신분에 변화가 생길 때, 이를테면 생전에 존호를 올리거나 사후에 올릴 때도 역시 그 변화된 내용을 의궤에 수정했다. 창덕궁, 창경궁 등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도 의궤를 제작했다.

 

왕권을 드러내기 위한 정조의 이미지정치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창덕궁을 출발한 왕의 행차가 광통교를 통과하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화성에 도착하는 과정을 두루마리, 병풍, 책 등 여러 형태의 그림으로 제작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바탕으로 행렬 부분만 따로 제작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그림의 길이는 46m로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등장한다.(청계천에 ‘정조의 화성행차’를 재현해놓은 벽화가 있으니 직접 보시기를 강추한다.) 능행에 참여한 인물들은 양쪽에 죽 늘어선 병사들을 경계로 그 안에서 걷거나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탔다. 그 행렬이 얼마나 길던지 봐도 봐도 끝이 안 보일 정도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 이 행렬을 봤더라면 족히 한나절은 공짜 구경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다 그림 중간에 이르면 갑자기 군사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경호도 촘촘해진다. 그 중앙에 ‘자궁가교(慈宮駕轎)’라고 적힌 혜경궁 홍씨의 붉은색 가마가 등장한다. 이어서 조금 뒤에는 ‘어좌마(御座馬)’라고 적힌 백마가 보이고 백마 위로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붉은색 큰 양산이 씌워져 있다. 이 어좌마가 정조의 자리다. 조선시대의 행사도에서 왕과 왕비의 모습은 그리지 않는다. 대신 일월오봉도나 빈 의자로 왕의 현존을 대신한다. 비록 왕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행차의 웅장함은 짐작할 수 있다.

박정혜는 ‘왕과 국가의 회화’(2011)에서 “왕의 도성 밖 행차는 능행이나 온행(溫幸·온천행)이 대표적이지만 정조의 1795년 현륭원행을 제외하면 다른 어떤 왕도 도성 밖 행차를 의궤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능행과 온행을 의궤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왕의 행차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왕은 이런저런 이유로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갈 기회가 많았다. 어느 경우든 백성들에게는 왕의 행차야말로 최고로 흥미 있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정조는 왜 굳이 행차도를 그리게 했을까. 능행이나 원행은 효를 실천하는 행위다. 효와 충은 유교의 근본적인 덕목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효를 실천하기 위해 능행과 원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조 또한 효의 실천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원행을 갔다. 그러나 원행의 이유가 효심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원행은 효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백성들과 만나 왕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효를 실천한다는 성묘를 명분 삼았기 때문에 신하들의 반대가 있을 수 없었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12번이나 화성원행을 다녀왔다. 가까운 경기도 지역의 능행도 66회에 이르렀다. 정조는 능행과 원행할 때 백성들이 올리는 상소와 징과 북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擊錚)을 허용했다.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동안 3000건이 넘는 상소와 100여건의 격쟁을 해결하게 했다. 임금과 백성들 사이에 상소와 격쟁이라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그 라인을 통해 두 세력이 암묵적인 파트너십을 맺은 셈이다. 백성들에게는 나라님이 백성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정적들에게는 백성들이 임금 편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정조가 능행과 원행에 오른 진짜 이유였다. 정조는 이미지정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그 이미지를 능행과 원행에 잘 활용하였다.

우리가 정조를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 왕들이 만들지 않은 도성 밖 행차도를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24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조선왕조 전체에서 가장 태평한 시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탕평책을 펼쳐 정국을 안정시켰고, 능력 있는 서얼을 등용했으며,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자신이 스스로 학문을 좋아한 문예군주였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치세기간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시기였다. 그의 애민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화성 축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조는 1794년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수원성곽을 축조해 32개월 만에 완성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첫삽을 뜨던 해에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다. 정조는 백성들을 굶주리게 할 수 없다면서 공사를 중지시켰다. 정조에게는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신도시 건설보다 백성들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조를 ‘성군(聖君)’이라 부른다.

이제 20대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국민들과 주먹인사를 하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면서 힘찬 첫걸음을 내디뎠다. 행사는 끝났다. 이제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보여줘야 할 때다. 5년 후 임기가 끝난 후에도 국민들이 주먹인사를 하고 보고 싶어 하는 그런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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