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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진료실 앞은 언제나 어린아이들로 붐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전문가인 천근아 소아정신과 교수의 진료를 받으려면 얼마나 대기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가장 빠른 진료 가능 시간은 2027년 2월입니다.”

무려 5년을 대기해야 했다. 김붕년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의 진료를 받으려 해도 2026년이 되어야 한다. 유희정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진료 예약은 2024년까지 꽉 차 있는데, 2025년 진료 스케줄이 확정되지 않아 예약을 받지 않고 있다.

소아정신과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오은영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를 필두로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 인식이 활발해진 탓이다. 한 연예인의 가족이 방송에 출연해 공개한 탓에 관심이 높아진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에 대한 양육자들의 관심은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내년에 김효원 서울아산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진료를 받기로 예약해 두었다는 양육자 양하나(가명)씨는 태어난 지 45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다.

“동네 소아과에서 ADHD 진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라는 얘기도 들었는데 아무래도 ADHD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산만함의 정도가 또래 아이들과 달라서 어린이집 선생님도 조심스럽게 ‘집에서도 이렇게 산만한가요?’라고 물어보더라고요.”

‘남자아이라면 좀 산만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던 양씨가 병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TV 프로그램의 영향이 컸다. 영유아 정신건강 문제에는 조기 개입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전문가의 말을 들으며 ‘최대한 빨리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양씨와 같은 생각을 가진 양육자들은 소아정신과로 몰린다. 소아정신과에서 담당하는 영역이 발달과 정신건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체발달이 소아과의 문제라면 언어발달이나 사회성·인지 능력에 대한 문제는 소아정신과에서 담당한다. 단지 정서 장애에 관한 것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양육자가 소아정신과 전문의를 만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한국의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350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도 2년의 수련 기간이 더 필요하다. 수련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의사가 되는 기간이 2년 더 늦춰지는 셈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순전히 사명감 때문에 수련과정을 거쳤다고 말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동기들이 의료현장에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소아정신과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 기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전문가 수는 적은데 소아정신과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고 있다. 반건호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단순히 잘 먹이는 문제를 떠나 어떻게 하면 잘 기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반면에 실제로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많이 생겼기 때문에 수요가 늘어났다고 분석하는 의사도 있다.

대전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마스크 착용 교육을 받고 있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대전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마스크 착용 교육을 받고 있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코로나19로 저하된 아동의 정신건강

김붕년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에 큰 타격을 입혔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아동·청소년의 뇌발달 문제에 있다.

인간이 태어날 때의 뇌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능력만 갖추고 있다. 김 교수는 “뇌의 기능을 30%만 가지고 태어난 영아들의 뇌는 신경세포 간의 연결을 활성화시키면서 자란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연결이 활성화되는 부위가 연령에 따라 다르다. 이를테면 만 3세까지는 보통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과 변연계에서 발달이 이뤄지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주로 관장하는 것이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하면 3세 이전에는 논리와 이성, 합리적인 사고와 학습 같은 영역은 잘 길러지지 못하고, 실제로 길러낼 수도 없다는 얘기다. 대신 오감 자극을 통해 충족시키는 감각 기능의 발달, 교감과 애착을 통해 형성되는 감정의 발달은 매우 중요하다. 신의진 연세대 소아정신과 교수는 “영유아기에 감정의 뇌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으면 평생의 문제가 된다”고 강조했다. 성인이 되어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감정적인 교류를 잘 못하는 문제를 가진 경우 영유아기에 애착 문제를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은 감정의 뇌를 발달시키는 데 방해물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어른과 감정을 교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던 시간들은 감각을 자극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보다 나이가 든 아동들도 마찬가지다. 신의진 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때의 규칙적인 생활은 단순히 생활습관을 바로잡는 데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뇌의 발달, 특히 전두엽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전두엽은 언어·사고·논리·문제해결 등 고등의 정신작용을 관장하는 부위다. 전두엽의 발달이 늦어 생기는 질병이 ADHD다. 이 전두엽은 어린 시절의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서도 활성화되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은 수업 환경을 바꾸어 놓으면서 아이들의 규칙적인 생활을 망가뜨렸다. 이 때문에 충동조절 등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늘어나게 됐다. 그러면서 소아정신과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뚜렷이 ADHD로 진단내릴 수 있거나 정서장애를 일으키는 아이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 돌 된 딸을 키우고 있는 김아영씨는 아이의 애착 문제로 고민이 생겼지만 막상 병원에 가야 할 만큼 큰 문제인지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아이가 여전히 엄마만을 찾으며 엄마에게 많이 매달리는 것이 육아 난이도를 높이는 주된 이유거든요. 그런데 이게 병원에 가야 할 문제인지 잘 모르겠어요. 왜 아이가 저에게 이렇게 집착하는지 누군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육아정책연구소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육아정책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 자녀를 양육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물어본 결과를 보면 ‘양육비용’, ‘일·가정 양립 시간 운용의 어려움’ 다음으로 꼽힌 것이 ‘자녀의 심리적 안정’이었다. 특히 자녀의 심리적 안정 문제는 영유아를 둔 양육자 응답층에서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대면 육아분석 앱 ‘그로잉맘’은 이런 양육자의 요구를 반영한 앱이다. 지난 몇 달간에만 2만~3만명이 이용할 정도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데 대다수의 이용자가 자녀와 양육자의 기질을 분석하거나 자녀의 발달검사를 실시해보는 등 분석 프로그램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 그로잉맘 측의 설명이다. 이다랑 대표는 “10명 중 1명이 채 되지 않는 이용자만이 심각한 발달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대다수는 일상적인 육아 문제를 가지고 더 잘 기르고 싶다는 생각에 해답을 얻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정부 주도 영유아 검진의 한계

물론 양육자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영유아 건강검진이 그것인데, 생후 71개월까지 총 8번에 걸쳐 근육발달, 인지와 사회성, 언어발달 등을 체크하는 검사가 이뤄진다. 그런데 국회 입법조사처의 보고에 따르면 2018년을 기준으로 영유아 건강검진 미수검률은 25.5%에 달했다.

실제로 영유아 건강검진 제도에는 보완할 점이 있다. 수가가 낮게 책정돼 건강검진을 실시하는 소아과가 적은 것은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형식적으로만 실시하는 병원도 많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영유아 발달사항에 대한 항목을 부모가 직접 체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한계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반건호 교수는 “만약 아이의 언어발달에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종합적으로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소아정신과 의사들의 역할이 늘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붕년 교수는 “올해부터 영유아 건강검진에 자폐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스크리닝(검사)도 포함될 예정인데 이에 대한 진단에는 소아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소아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소아정신과는 단순히 중증의 정신질환만을 진료하는 진료과가 아니다. 영유아·아동·청소년들의 전반적인 발달 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하며 보완해줄 수 있는 곳이다.

이 문제는 넓게 보면 한국 사회의 저출산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자녀가 없어도 되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이유가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서’다. 양육비용 부담이나 직장생활의 문제, 시간적 자유로움의 문제 등은 부차적이었다. 즉 여기서 ‘좋은 부모’란 정서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미혼 남녀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가장 많은 수의 대답이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 힘든 사회여서’였다. 역시 경제적인 문제 등은 그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됐다.

다시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서 정서적인 안정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아정신과는 그에 대한 해답을 내려줄 수 있는 전문분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소아정신과의 역할이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녀들의 발달과 정신건강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양육자의 고민을 덜어주고, 보다 손쉽게 전문가와 만날 수 있으며, 필요할 경우 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제적으로 예방 차원에서 영유아·아동의 정신건강과 발달 문제를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신의진 교수는 “영국은 아동들을 대상으로 1년에 두 차례 언어발달검사를 시행한다”며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정신건강에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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