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인 3·5대 한국산악회장이 직접 작성했거나 보관 중이던 문건들. 홍 회장이 1952년 독도 학술조사를 전후해서 작성한 문서 원본과 친필 원고가 포함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photo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
홍종인 3·5대 한국산악회장이 직접 작성했거나 보관 중이던 문건들. 홍 회장이 1952년 독도 학술조사를 전후해서 작성한 문서 원본과 친필 원고가 포함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photo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

홍종인(1903~1998) 전 한국산악회장(3대 회장 1954~1966, 5대 회장1970~1971)은 1975년 ‘한국산악(한국산악회 연보)’ 기고문을 통해 1945년 9월 창립한 한국산악회가 독도 학술조사 사업을 펼친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당시 한국산악회 부회장으로 있던 그는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와 6·25전쟁의 혼란기에 독도 주권 수호를 위해 세 번이나(1947년 8월, 1952년 9월, 1953년 10월) 독도 현지를 방문해 초창기 독도 지도 제작과 학술조사 작업을 주도했다. 홍 회장은 독도 학술조사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기도 했다.

‘한국산악’ 기고문에서 홍 전 회장은 독도 학술조사 사업의 목적으로 “일본이 독도에 야심을 품고 영유권을 주장해 온 사실이 있어 영유권의 시비가 일어나기 쉬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라며 독도 영유권 싸움에서 한발 앞서 나가기 위함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광복 직후의 상황은 우리가 독도 주권을 주장하기에 녹록지 않았다. “울릉도도 우리 국토라고 하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버린 자식 같은 대접을 받아왔을 뿐더러 ‘독도’라고 하면 문헌과 일부 소수의 학자 외에는 아는 사람도 드물다. 우리가 독립국가로서 국토의 영역을 규정지어야 할 경우를 생각해도 그 전모를 미리 구체적으로 밝혀두어야 할 것이 아니냐.”

광복 후 이렇듯 독도를 지키기 위해 뛰었던 홍 회장이 직접 작성한 독도 관련 다량의 문서가 최근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를 통해 공개됐다. 이 대표는 “독도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다가, 수집상으로부터 홍종인 회장 관련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입하게 되었다”고 문건 수집 경위를 밝혔다. 이번 공개에 대해 이 대표는 “홍 회장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라며 “광복되고 나서 독도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을 때 홍 회장이 독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야 한다면서 영토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우려 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공개 자료가 독도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이 대표가 공개한 문건들 중 일부는 과거 언론 등을 통해 그 존재와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으나 이번에 공개된 문건들은 홍 회장이 직접 작성한 원본 문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도 美 폭격 당시 피해 상황 기록

1952년 9월 홍종인 당시 독도 학술조사단장은 독도를 찾았으나 독도가 미군 폭격기에 의해 포격 연습지로 사용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주간조선 2712호 ‘독도 폭격사건을 아십니까?’ 참조) 당시 폭격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으나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피해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 그해 9월 24일 홍 회장이 독도 폭격을 목격하고 해군총참모장에게 보낸 전문 내용에 적힌 피해 상황은 이러하다.

“우리가 섬을 일주하는 동안 약 한 시간 만에 10여발의 투탄 광경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섬 주변에 폭격되고 있었는데 때로는 흑연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요란한 폭음은 해상을 뒤덮으며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울려 오는 것을 느꼈다. 섬을 일주한 결과 그동안의 폭격으로 인하야 동도와 서도의 주변의 모습은 전자에 보던 것보다 많이 변모된 것이 확인되었다. 특히 동도의 분화구 자체의 일각(一角)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었다.”

당시 미군 폭격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1952년 9월 미군의 독도 폭격은 일본이 이곳을 미 공군의 폭격 훈련지로 제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해 7월 26일 일본 관보에 고시된 외무성 고시 제34호에 따르면, “소화27년(1952년) 7월 26일 일본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안전보장조약 제3조에 기초한 행정협정 제2조에 의해 재일(在日) 합중국 군에 제공하는 시설 및 구역을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며 외무대신 오카자키 가쓰오 이름으로 죽도(독도의 일본 측 표현)를 폭격 훈련 구역으로 정한다. 구역은 ‘북위 37도15분 동경 131도52분의 지점으로부터 직경 10마일 원내’이고 매일 24시간 폭탄 훈련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홍종인 3·5대 한국산악회장. photo 한국산악회
홍종인 3·5대 한국산악회장. photo 한국산악회

독도 영유권 확보한 이승만 평화선

일본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그해 1월 30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일본이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선언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한국 영해 외 공해의 광대한 수역에 국가 주권을 행사한다는 취지의 선언을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쪽으로는 시마네현의 죽도로부터 서쪽은 황해의 중앙, 남쪽으로는 맥아더 라인보다 한층 일본에 가까운 수역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경계선을 만들어, 이 수역 내에서 선박의 자유 항해는 인정하지만, 자원 보호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사사키 의원)”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은 사실상의 영해 선포로 국제법상 영해의 기준인 3해리를 뛰어넘는 60해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독도도 자연스럽게 우리 영토에 편입됐다. 일본이 독도를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위기를 느낀 자구책이었다.

다만 홍 회장이 1952년 독도를 찾았을 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사전 정보가 없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홍 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가 독도 영유권 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홍 회장은 “독도를 동해 어업 거점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런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언 즈음에 홍 회장이 언론 기고 등을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원고에서 확인된다.

“(독도가) 1월 리(이승만) 대통령의 해양 선언과도 비추어 볼 때 동해 어업 개발을 위한 더 큰 중요성을 가진 거점이 되고 있는 것이니 국가적으로 독도 어장의 보호를 위하야 관심을 크게 할 것이다.”

홍 회장은 이 원고에서 독도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비록 독도가 울릉도에서 40여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무인도라고 하지만 미역, 전복, 소라 등의 어획고는 실로 10억원을 넘을 것이다. 현재 울릉도와 본토 어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어장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 홍 회장은 “독도 어장의 보호 개발을 위해 울릉도의 어업을 또한 보호 육성하여야 할 것이니 원래가 가난 가운데 사는 일만오천 울릉도 어민은 금년에 극심한 풍해로 일년 중 4개월 식량밖에 추수를 못 한다”며 “오징어 풍획으로 금년 생산액 100억을 바라보고 밤마다 600여척 어선이 울릉도 주위 5~10리 바다에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고 적었다.

홍 회장은 이 글에서 울릉도의 어려운 형편도 적었다.

“어선과 어구가 빈약하고 자금난과 처리 가공법이 유치하야 소득보다 손실이 많다고 할 형편이다. 당면한 울릉도의 보호 발전을 도모하야 우선 오징어만이라도 해운 공사의 선편을 현재의 월 2회를 4회 정도로 하야 본토와의 수송 원활로 물가의 균형을 공정히 하고 또 본토의 상인 자금 때문에 농락받지 않고 울릉도민이 자주적으로 시장을 유지해 나가도록 어업조합 등에 금융을 편히 해주고, 이와 동시에 어업의 기술적 개량을 도모하는 것이 긴급하다. 현재의 수력 발전을 강화하고 어항의 개축도 고려하면 울릉도는 무진장의 동해 수산자원 개발의 기지로 새로운 비약을 볼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독도가 중요하다고 홍 회장은 주장한다.

“독도 문제의 국방상, 산업상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방도로는 울릉도 어민으로 하여금 폭격 연습이나 기타의 위험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히 출어할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어장 보호책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울릉도의 구호 발전대책이 긴급한 것이다.”

 

독도 폭격 사진 존재 가능성

홍 회장이 독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독도 폭격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은 학술조사 과정에서 실제 폭격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을 보면 이와 관련해 의미가 있는 대목이 나온다. 9월 22일 당시 폭격 상황을 해군총참모장에게 무선으로 송신한 내용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날 천기는 극히 청명하야 비행기의 폭격 광경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수중(手中)의 촬영기에도 완전히 수록할 수 있었음.”

홍 회장이 당시 폭격 상황을 사진으로도 남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는 폭격 사진은 없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한국산악회 일행 유품 등 어딘가에 독도 폭격 사진 자료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번 공개 문건에는 독도 폭격 당시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내용도 있는데, 당시 홍 회장이 무선으로 타진한 폭격 상황은 이러하다.

“(9월 22일) 비행기의 폭격을 확인하기는 10시15분부터인데, 비행기는 암록색의 쌍발기로 우편 날개에 수 개의 백색선과 날개 끝에 역시 백색의 표식을 그렸으나 확인키 어려웠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3기 내지 4기로 약 천 미터의 고도에서 독도에 향하야 연속 폭격하면서 점차로 고도를 높이하야 나중에는 3천 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폭격하고 있었는데 그때 진남호는 독도까지 약 2키로 접근했었으나 이때 폭격이 우리 배와는 딴 방향에서 독도에서 약 2키로 되는 해상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 우리는 더욱 위험을 느끼고 12시40분 귀항하였는데 비행기는 계속 폭격하다가 우리 배가 가는 방향인 울릉도로 최종 2대가 자취를 감추었음.”

독도 미군 폭격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독도 영유권을 강화시켰다. 홍 회장이 정부 관계기관에 미군의 독도 폭격 사실을 전신으로 전하자, 미군 측이 1952년 12월 독도를 더 이상 미군의 폭격 연습기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1953년 2월에는 한국 국방부도 UN군 당국과 협의해 향후 독도에서 폭격이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미국 극동공군사령관도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이러한 내용을 보장해 주었다. 미국 측은 이러한 결정을 한국 측에만 알리고 일본 측에는 알리지 않았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은 언론 보도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한국 측 손을 들어주게 되자 일본 측은 당황한다. 1953년 11월 4일 중의원 녹취록을 보면 가와카미 의원은 “도대체 미국의 의중(意中)은 어떤 것일까. 이승만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보며, 죽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것을 미국 측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한국의 항의를 받고 죽도를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은 미국이 죽도를 한국의 영토라고 생각했다는 해석이 성립한다”고 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홍종인 회장이 적극적으로 정부와 언론에 독도 폭격 사실을 알린 것이 이런 결과를 낳는 데 기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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