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네 번째)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지난 7월 18일 일본 도쿄 소재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만나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진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네 번째)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지난 7월 18일 일본 도쿄 소재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만나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5월 5일은 프랑스인, 아니 유럽 지식인 모두에게 잘 알려진 역사적인 날이다. 유럽 해방의 상징인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유배 중 숨진 날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은 예수에 필적하는 위인이었다. 지난 5월 5일,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독일을 공식 방문했다.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뒤 불과 10일 만에 이뤄진 첫 번째 외유지가 독일 베를린이었다.

12월 10일은 세계 종교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날이다. 1520년 독일 신학자 마틴 루터가 교황이 보낸 파문 편지를 불사른 날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반대할 경우 지옥에 간다고 믿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교황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독일을 기반으로 한 유럽의 종교개혁이 본격화된다. 지난해 12월 10일은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가 프랑스 공식 방문에 나선 날이다. 총리 취임 이틀 만에 파리로 달려갔다. 

 

4년7개월 만에 열린 외교장관 회담 

1945년 이후 이어져왔지만 수반에 오르는 즉시 상대국을 ‘가장 먼저, 가장 빨리’ 방문하는 것이 프랑스·독일 사이의 전통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에 당선되면 가장 먼저 축전을 보내는 것도 77년간 지속된 양국 간 외교 관행 중 하나다. 독일과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근세, 근대 이래 철천지 원수로 살아온 나라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1789년 프랑스혁명도 독일 프로이센의 공격으로 좌절될 뻔했다. 1차 세계대전 배상금 지급 의무는 독재자 히틀러가 독일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당시 독일의 숨통을 배상금으로 압박하면서 거의 질식사로 몰고 간 나라가 프랑스였다. 마크롱 대통령과 숄츠 총리의 양국 방문은 그 같은 어제의 비극을 양국 국민 모두에게 환기시키면서 내일의 공동 번영을 기약하려는 ‘성스러운 의식’이라 볼 수 있다. 

지난 7월 18일 박진 외무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성 장관이 도쿄에서 만났다. 2017년 12월 이래 ‘무려’ 4년7개월 만에 이뤄진 공식회담이다. 미국을 매개로 한 국제회의를 예외로 할 경우, 한·일 정부 차원의 장관급 회담은 그동안 전무했다. 닭과 달걀의 문제겠지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는 극도로 얼어붙는다. 한국 법원에서 결정된 위안부·징용 최종 판결이 양국 간 불화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일본 기업 자산 압류와 현금화라는 불똥 

이번 한·일 외무장관 회담은 곧 닥칠 일본 기업 자산 강제압류와 현금화를 막기 위한 양국 간 탐색전이라 볼 수 있다. 문재인 정권 당시 한국 법원은 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일본 기업들이 반발하면서 거부하자 자산압류에 들어가면서 강제매각 명령을 내린 상태다. 늦어도 올해 가을에는 매각에 따른 현금화가 이뤄질 전망이다. 일본은 현금화가 단행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박진 장관은 극단적인 매각과 현금화가 아닌, 한·일 양국 간 타협점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타협점이 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 일본은 ‘위안부 징용 문제 완결’이란 원칙론에 입각해 한국 측의 결자해지를 요구하고 있다.

반일(反日)은 한국 정치 무대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한다. ‘토착왜구’ ‘죽창가’가 21세기에 들어서도 울려퍼지는 이유는 그만큼 약발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입 닥치고 반일=애국’으로 받아들이는 풍조가 아직 한국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군 독일 나치와 프랑스 여성 사이에 태어난 어린이가 무려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양국 사이의 터부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정치적·외교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재선 후 마크롱 대통령의 첫 번째 공식 외유를 ‘나치 국가 찬양’이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제가 아니라 내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의 한·일 문제 해결 의지는 ‘입 닥치고 반일’에 정면으로 맞서는 미래지향적인 결단이라 볼 수 있다. 

한·일 통화스와프 문제는 이번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눈길을 끄는 테마 중 하나다.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기도 하지만, 혹시 터질지 모를 외환위기에 대응할 비상조치로서의 한·일 통화스와프다. 윤석열 정권은 지난 5월 10일 출범했다. 3개월도 안 된 집권 기간이다. 한·일 통화스와프 필요성은 전임 문재인 정권 때부터 제기됐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양이 목의 방울을 피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7월 19일 일본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예방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박진 외교부 장관이 지난 7월 19일 일본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예방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역사와 정치가 막아선 한·일 통화스와프 논의 

남탓 할 여유가 없다. 아직 닥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한·일 통화스와프 문제는 한국 고위 당정협의회에서도 강조된 국가 방침이기도 하다.  “한·미 통화스와프뿐 아니라 일본(과의 통화스와프) 등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박 장관이 도쿄에 들르기 하루 전인 7월 17일 있었던 당정협의회에서 나온 말이다. 박 장관이 만날 일본 정치인에게 던지는 ‘사전통보’ 목소리라 볼 수 있다. 

사실 한·일 통화스와프는 어제의 한·일 관계를 고려하면 당분간 논의 불가능한 이슈로 느껴진다. 무려 700억달러에 달했던 한·일 통화스와프 중단 이유가 ‘위안부 소녀상 문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아닌, 역사와 정치가 한·일  통화스와프 중단의 근본적인 이유다.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아키히토(明仁) 일왕 사과 요구’가 한·일  통화스와프 중단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후 터진 위안부·징용 문제는 스와프 논의 자체를 차단하는 악재로 작용한다. 문재인 정권의 유산이자 업보지만, 위안부·징용 문제가 상존하는 한 양국 간 통화스와프는 재론하기 어렵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무려 2시간30분이나 지속된 박·하야시 회담을 눈여겨보면 한·일 통화스와프에 관한 합의는커녕 논의 유무 자체도 확인하기 어렵다. 한국 측이 꺼냈다 해도 일본 측이 맞장구를 쳤을지 의문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피격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한국에 대한 반감이 한층 더 강해지는 분위기다. 신문·방송에서 보도됐지만, 범인 야마가미 데쓰야(山上徹也)의 가장 큰 살해동기는 구 통일교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교 관련 보도가 일본 미디어에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반감도 자연히 일고 있다. 박 장관의 도쿄 방문은 그 같은 최악의 공기가 흐르는 상황에서 이뤄졌다. 

출항 즉시 태풍을 만난 격이지만, 한·일  통화스와프 가능성보다 일본 기업 매각과 현금화가 단행될 경우 닥칠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현안으로 등장한 상태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위안부 징용에 관한 해결점을 찾을 경우 한·일 통화스와프도 어렵지 않게 풀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한국 외교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가을에 일본 기업 현금화가 이뤄질 경우 밀려들 후폭풍에 관한 부분이다. ‘설마’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일본 기업 매각과 현금화가 단행될 경우 어떤 식의 후폭풍이 한국에 밀려들 것인가? 

 

IMF 사태 도화선됐던 대일 단기 채무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상정할 수 있겠지만, 한·일  통화스와프와 ‘정반대’에 서 있는 조치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주체는 일본 정부나 정치인이 아닌 일본 금융투자회사들이다. 간단히 말해 한국의 외환 채무에 관한 일본 금융투자회사들의 불신이다. 흔히들 돈은 감정이나 이념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착한 돈만 받고 깡패의 돈을 멀리할 경우 ‘결코’ 돈과 가까워질 수 없다. 경제동물이라 불리는 일본이 위안부·징용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대한 대출업무를 ‘당장’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투자금융회사와 관련이 있는 기업들이 매각과 현금화의 대상이 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이리저리 연결된 상태에서 일본 기업 매각이 단행될 경우 일본 투자금융회사들도 제3자가 아닌,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까?   

올해 3월 기준, 한국의 대외부채는 6540억달러에 달한다.  같은 기간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578억달러 정도다. 단순 계산에 의하면 한국은 이미 외환위기에 접어든 나라다. 그러나 대외부채란 것이 대출기간이나 조건에 의해 신축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덧셈 뺄셈으로 결정될 사안은 아니다. 디지털 수치로 나타난 대차대조표가 아닌, 경제의 건전성 여부가 관건이다. 활황일 경우 낮은 이자로 장기간 돈을 빌려주려는 은행들도 많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한국 경제 전반이 악화되고 있다. 한층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경제만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내일도 어둡다는 점에 있다. 미국 달러 부족 사태가 이어지면서 세계적 금융투자회사들이 방어적 경영으로 들어서고 있다. 달러를 빌리기도 어렵지만, 빌린다 해도 고이자에 단기간 대출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미 그 같은 상황에 직면한 상태다. 외환보유액이 얼마나 많으냐가 관건이 아니다. 대외부채가 얼마나 적은지, 단기대출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금융신용과 경제기반이 얼마나 튼튼한지가 한층 더 중요하다.

그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장·단기 외환채무의 상당수가 일본발 자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체 외환채무의 26.7%(2022년 3월 기준)에 달하는 1년 이하 단기 채무 1700억달러의 경우 일본발 자금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일본 자금은 이자도 저렴하고 대출조건도 상대적으로 까다롭지 않다. 조달 시기가 빠르고 한 번 관계를 맺으면 연장하기도 쉽다. 일본의 대외금융자산은 세계 1위인 3조달러에 달한다. 외국에 뿌려진 3조달러의 투자금을 통해 매년 2000억달러 이상의 이자로 먹고사는 금융대국이 일본이다. 한국은 금융대국 일본의 돈 영향권 내에 들어선 나라다. 모두가 기억하겠지만, 단기외채의 일본 의존이 1997년 김영삼 정권 당시 터졌던 외환위기의 배경에 있었다. 당시 일본 투자금융회사들이 단기외채 연장을 거부하면서 한순간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유언비어 유포에다 혹세무민 과장이라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외환위기는 일본 기업 강제매각과 현금화 이후 닥칠 후폭풍 리스트 중 하나일 수 있다. 박 장관이 공언했듯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면서 ‘외교적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도 인정하지만, 한·일 문제 해결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의지와 결의는 강력하다. 그러나 정신론이 아닌, 구체적인 외교적 ‘각론’이 필요하다. 일본에 통할 ‘외교적 카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주고받는 것이 외교다. 죽창가로 무장한 식민지 피해자로서의 주의·주장은 국내용 반일 만병통치약에 불과하다. 독일 나치군을 아버지로 둔 20만 프랑스 어린이들의 얘기를 숄츠 총리에게 거론하는 격이다.

 

내년 히로시마 G7 회담의 중요성 

지난해 11월 기준, 일본 자민당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은 56.9세다. 대략 1965년 이후 태어난 정치가가 일본 여당의 허리에 해당한다. 어제의 역사를 얘기해도 잘 모르고, 과거에 관한 얘기 자체에 무관심하다. 전 세계 대부분이 그러하듯, 당장 살아가야 할 오늘과 내일이 핵심 현안이다. 역사이 반성나 ‘독도는 우리 땅’도 중요하다. 그러나 21세기 디커플링 시대에 맞는 새로운 외교 카드도 필요하다. 답은 한반도나 동아시아 차원이 아닌, ‘글로벌 차원’의 외교 카드다. 한반도에서 본 일본이 아니라, 세계 속의 양국관계에 기초한 외교다. 물론 윈윈(Win-Win) 게임에 의거한 상호발전이 기본 원칙이다.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 한국의 카드를 보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재개로 압축된다. 일본 공기를 이해한다면 지소미아 하나로는 어렵다. 현재 논의 중이지만, 일본은 군사위성 50여개를 중국과 북한 주변에 띄울 계획이다. 100% 늘릴 일본 국방예산의 주된 사용처가 위성 개발, 즉 감시체제를 통한 방어력 확보다. 한·일 지소미아가 없더라도 무난하다는 것이 일본 정가의 분위기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두 가지 외교적 카드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한국 대통령의 히로시마(廣島)평화공원 참배문제다. 이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5월 공식참배했다. 내년에 히로시마에서 개최될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에 맞춰 서구 정상들의 집단참배가 전망된다. 북핵 협박과 더불어 핵의 공포에서 벗어나자는 것은 한국과 국제사회 모두의 염원이다. 일본이 아니라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서 히로시마평화공원이 갖는 무게는 각별하다. 국내에서의 반발이야 있겠지만, 세계적 흐름으로 보면 참배야말로 지극히 상식적이다. 히로시마는 기시다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하다.

둘째는 일본의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다. 실현되기까지는 장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본의 안보리 진출은 한국 외교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지난 5월 말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관련된 비난 결의문 채택에 반대했다. 적어도 일본이 그 같은 대열에 동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6월 16일 프랑스·독일·이탈리아 3국 정상이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사진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폴란드에서 출발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 들어가는 열차 속 장면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서방의 지지와 지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는 독일 정상의 방문을 거부해왔다. 러시아를 유럽에 끌어들이면서 크름반도 침략을 무시해온 나라가 바로 독일이라는 이유였다.

3국 정상이 함께한 열차 사진의 중간에는 마크롱 대통령이 앉아 있다. 프랑스가 주도한 집단방문이기 때문이다. 독일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구원을 없앤 나라가 바로 프랑스다. 한반도 역사와 동아시아 차원의 외교도 중요하다. 그러나 서방이 하나로 결집하면서 디커플링·서플라이체인·프렌드쇼어링 시대로 숨가쁘게 나아가는 것이 2022년 여름의 현실이다. 위안부, 징용문제에서부터 한·일  통화스와프까지 그 같은 세계사적 흐름에서 본다면 쉽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과 일본의 수상이 새로 탄생하는 순간, 도쿄로 서울로 가장 먼저 달려가 인사하고 식사도 하면서 덕담을 나눌 시간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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