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2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롯데 이대호가 스윙을 하고 있다. 만 40세의 이대호는 이날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photo 뉴시스
지난 7월 1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2 KBO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롯데 이대호가 스윙을 하고 있다. 만 40세의 이대호는 이날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photo 뉴시스

“박수칠 때 떠나라.”

‘국보급 투수’ 출신 선동열 전 감독은 삼성 사령탑 시절 ‘아름다운 은퇴’의 중요성을 수시로 강조했다. 당시 선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더 뛸 수 있다고 선수 생활을 연장하기보다는 아쉬움이 남더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며 “조금이라도 아쉬울 때 떠나라”고 말했다. 1999년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끈 뒤 일본 프로야구와 미국 메이저리그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은퇴를 선택했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었다.

그러나 실제 선 감독의 조언대로 박수칠 때 떠난 선수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나마 박수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릴 때 은퇴하면 다행이다. 최고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은 나이 들고 전성기 기량을 잃은 뒤 떠밀리듯 은퇴를 향해 흘러간다. 이미 경쟁력을 잃은 선수가 억지로 선수 생활을 연장하려다 구단, 감독과 갈등 끝에 타의로 은퇴하는 경우도 많다.

 

만 40세 타격왕 도전 ‘은퇴 예정’ 선수 

역대 KBO리그 최정상급 타자들만 봐도 정말로 ‘박수칠 때’ 떠난 선수는 ‘라이온킹’ 이승엽(SBS 해설위원) 하나뿐이다. 이승엽은 만 41세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예고한 뒤, 그해 135경기에서 타율 0.280에 24홈런, OPS 0.864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 특히 시즌 최종전 은퇴경기에서는 홈런 두 방을 날리며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승엽은 KBO리그 사상 최초로 전 구단 은퇴투어 행사를 진행한 선수다.

반면 이승엽 외 다른 레전드 타자들의 마지막 시즌은 초라했다. 양준혁(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만 41세 은퇴시즌 64경기에서 타율 0.239에 1홈런 OPS 0.674에 그쳤다. 양준혁의 통산 성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록이다. 역대 최고 우타자 김태균(KBSN 해설위원)도 만 38세 시즌 67경기 타율 0.219, 2홈런, OPS 0.613의 기록으로 커리어를 마쳤다.

‘바람의 아들’ 이종범 LG 퓨처스 감독은 만 41세 시즌 97경기 타율 0.277로 타율은 나쁘지 않았지만 전성기 생산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대 최고 포수로 꼽히는 박경완 전 SK 감독대행도 만 41세 시즌 8경기 타율 0.105, 홈런 1개, OPS -0.13만 남기고 옷을 벗었다. 그 외 김동주(만 37세, 타율 0.256, 1홈런), 이만수(만 39세, 타율 0.231, 2홈런), 장종훈(만 37세, 타율 0.091, 1홈런), 박재홍(만 39세, 타율 0.250, 5홈런) 등 다른 레전드들도 하나같이 정점이 아닌 내리막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올 시즌 KBO리그에는 실로 오랜만에 모두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은퇴하는 선수가 나올 전망이다. 시즌 뒤 은퇴를 예고한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가 불혹에도 여전히 뜨거운 방망이를 과시하며 후배 선수, 외국인 선수와 타격왕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7월 26일까지 이대호는 타율 0.333으로 키움 이정후(0.338)와 삼성 호세 피렐라(0.337)에 이어 리그 3위에 올라 있다. 후반기 들어 타율이 살짝 떨어지긴 했지만 전반기가 끝났을 때 타율은 0.341로 전체 1위였다. 여기에 110안타로 최다안타 3위, 12홈런으로 홈런 10위, OPS 0.860으로 이 부문 11위에 오르는 등 타격 전 부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은퇴가 임박한 만 40세 노장 선수라고는 믿기 힘든 퍼포먼스다. 이대호의 현재 타율은 일본프로야구 진출 직전인 2011년 만 29세 때 기록한 0.357 이후 최고의 기록이다. 지난 3년간 0.285-0.292-0.286으로 3할 타율 달성에 실패했던 이대호가 나이 마흔 살에 세월을 거스른 타격감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대체선수대비 기여승수를 나타내는 WAR도 2.17승으로 2020년, 2021년 2년간 합계(2.12승)보다 높다. 144경기로 환산한 이대호의 WAR은 3.52승으로 2018년 만 36세 시즌(3.84승) 이후 처음으로 3승을 돌파할 기세다.

만약 올 시즌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한다면 이대호는 몇 가지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대호는 지난 2006년(0.336)과 2010년(0.364), 2011년(0.357) 세 차례 타율 1위에 올랐다. 올 시즌 타격왕에 오를 경우 고(故) 장효조(1983·1985·1986·1987년), 양준혁(1993·1996·1998·2001년)과 함께 최다 타격왕 타이틀(4회)의 주인공이 된다.

KBO리그 최고령 타격왕 타이틀도 가능하다. 종전 기록은 LG 이병규 2군 코치가 갖고 있다. 이병규는 만 39세 시즌인 2013년 타율 0.348로 1982년 타격왕이 됐던 MBC 백인천(만 39세)을 한 달 차이로 제치고 역대 최고령 타격왕에 올랐다. 올해 만 40세 이대호가 타율 1위를 하면 최고령 기록은 물론 최초의 ‘40대 타격왕’ 기록까지 세우게 된다.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40대 타격왕은 1958년 보스턴 테드 윌리엄스와 2004년 샌프란시스코 배리 본즈, 단 두 명에 그쳤다.

 

MLB 레전드보다 빛나는 은퇴 시즌 

무엇보다 이대호가 타율 1위에 오를 경우 사상 최초로 개인 타이틀 수상자가 현역 은퇴하는 사례로 남게 된다. KBO리그 40년 역사상 개인 타이틀을 차지한 선수가 시즌 직후 은퇴한 사례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이건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문 경우다. 가장 최근에는 2016년 아메리칸리그 타점왕을 차지하고 은퇴한 데이비드 오티즈(보스턴)가 타이틀홀더 은퇴 사례로 남아 있다.

실력으로 후배들과 경쟁하는 이대호에게 ‘경로 우대’는 필요치 않다. 이대호는 2022 KBO 올스타전 출전 자격도 팬투표와 선수단 투표를 통해 당당하게 자력으로 따냈다. 그리고 커리어 마지막으로 출전한 홈런레이스에서 박병호, 김현수 등 쟁쟁한 거포들을 제치고 우승을 따냈다. 이대호처럼 올 시즌 뒤 은퇴를 예고한 앨버트 푸홀스(세인트루이스), 내년 시즌 뒤 은퇴 예정인 미겔 카브레라(디트로이트)가 MLB 커미셔너 직권으로 올스타전에 초대받은 것과 비교된다.

특히 은퇴를 예고한 푸홀스의 행보는 이대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푸홀스는 21세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살아있는 레전드 선수지만 잇따른 부진으로 초라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데뷔 첫 11년간 전성기를 보낸 그는 2011시즌 뒤 ‘10년 2억5000만달러’라는 초대형 계약을 맺고 LA 에인절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에인절스 이적 후 급격한 에이징 커브를 겪으면서 추락해, 첫 11년간 쌓은 아름다운 금자탑이 훼손됐다. 데뷔 시즌부터 2011년까지 푸홀스는 1705경기에 출전해 445홈런 1349타점 타율 0.328에 0.617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이 기간 쌓은 누적 WAR은 81.3승으로 해당기간 MLB 타자 전체 1위였다. 그러나 에인절스 이적 후 최근 11년간 기록은 1321경기 240홈런 841타점 타율 0.255, 장타율 0.461로 초라한 수준이다. 홈런은 곧잘 때려냈지만 낮은 출루율과 무수히 많은 삼진, 병살타로 인해 푸홀스는 경기에 출전하면 출전할수록 팀에 해를 끼치는 선수로 전락했다. 최근 11년간 푸홀스의 누적 WAR은 5.6승으로, 이는 푸홀스가 2002년 한 시즌 동안 쌓은 WAR(5.4승)과 비슷하다.

이런데도 푸홀스는 해마다 언론 인터뷰에서 “난 여전히 경쟁력 있는 선수”라고 주장하며 주전으로 출전하길 고집했다. 감독이나 구단이 자신을 벤치에 앉히려고 하면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두 시즌 일시적 부진이 아닌 6년 이상 계속된 부진에도 에인절스 구단은 이미 맺은 계약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푸홀스를 기용해야 했다. 푸홀스는 팀 승리나 명예가 아닌 돈과 개인 기록(특히 통산 700홈런)을 위해 탐욕스럽게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는 비판을 받는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추한 말년을 보내는 선수로 전락한 푸홀스의 현주소다.

 

“3000안타 달성까지 은퇴 보류해 달라” 

반면 이대호는 30대 후반 이후에도 꾸준히 좋은 기량을 유지하며 롯데 타선을 이끌어 왔다. 잠시 에이징 커브 조짐을 보인 시기도 있었지만 슬기롭게 극복해 제 기량을 되찾았다. 2021시즌을 앞두고는 구단이 제시한 2년 계약을 받아들였고, 2022 시즌 뒤 은퇴를 선언했다.

롯데 팬들이 ‘은퇴 반대’를 외치고 후배 선수들도 아쉬워하지만 이대호의 결심은 변함없다. ‘포스트 이대호’로 불리는 한동희는 “매일 이대호 선배님께 물어본다. ‘은퇴 안 하시면 안 되냐’고, 선배님은 결심을 굳히신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이순철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경기 후 이대호와 가진 인터뷰에서 ‘은퇴 철회’를 요구하며 유쾌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매일 롯데 경기가 끝나면 구단 담당기자, 야구 관계자들 앞에는 “한국야구 관계자분들, 한국야구 팬 여러분. 이대호 선수에게 현역을 연장하고 프로통산 3000안타에 도전할 것을 권유해 달라”로 시작하는 메일이 도착한다. 프로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할 때까지 이대호가 은퇴를 보류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메일이다.

모두가 은퇴하길 바라는데도 억지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모두가 가지 말라고 붙잡는데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선수가 있다. 이대호는 지난 7월 16일 잠실 올스타전에서 본격적인 은퇴 투어 행사를 시작했다. 이날 여러 차례 뜨거운 눈물을 쏟은 이대호는 7월 28일 잠실 두산전을 시작으로 9개 구단 투어를 시작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큰 박수와 눈물바다, 그리고 응원가 합창이 이어질 것이다. 최고령 타격왕을 향한 도전도 현재진행형이다. 이승엽 이후 오랜만에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선수가 나왔다.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