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ㆍ일 2+2 회담 후 열린 기자회견장. 왼쪽부터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지나 레이몬도 미 상무장관. photo 로이터
지난 7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ㆍ일 2+2 회담 후 열린 기자회견장. 왼쪽부터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지나 레이몬도 미 상무장관. photo 로이터

최신 시사용어로 ‘칩(Chip) 4’라는 말이 있다. 반도체 주요 생산국인 한국·미국·일본·대만 4개국을 지칭하는 말이다. 전 세계 반도체 웨이퍼의 20%를 생산하는 한국이 ‘칩 4’에 들어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칩 4’라는 신조어가 당연시되는 배경이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한국이나 아시아 주변에 그칠 뿐이다. 미국, 유럽 심지어 일본에서는 ‘칩 4’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한국 반도체가 나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칩 4’는 과장된 측면도 있다. 반도체의 핵심인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1m) 이하 첨단 반도체의 한국 생산량은 9%에 불과하다. 첨단 반도체의 90% 정도는 현재 대만이 생산하고 있다. ‘칩 1’이란 말이 없듯이 ‘칩 4’도 없다.

 

미·일 2+2 회담이 결정한 첨단산업의 ‘표준’

‘칩 4’란 신조어의 정확한 최초 출처가 궁금하지만, 대략 2개월 전부터 홍콩의 신문·방송에서 쓰인 듯하다. 미국이나 서방권은 ‘칩 4’라는 말 대신 ‘칩 동맹(Chip Alliance)’ ‘칩 생산국(Chip Makers)’이란 말을 주로 사용한다. 반도체란 것은 칩만이 아닌, 여러 요소로 구성된 이른바 글로벌 공급망의 결과물이다. 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프랑스처럼 반도체 생산은 미미하지만, 소재·설계능력·제조장비에 관해 특화한 나라의 역할도 중요하다. 서구에서 사용하는 ‘칩 동맹’이란 말은 그 같은 큰 그림을 고려한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반도체 최종 생산물 그 자체에 주목하는 ‘칩 4’라는 용어 자체가 근시안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칩 4’라는 용어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쏟아진 시기는 지난 7월 말이다. 당시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공동협력을 ‘칩 4’에 공식 요청했다는 식의 기사가 퍼져나갔다. 지난 7월 2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2+2’ 회담이 기사의 원천이었다. 원래 미국과 일본 간에는 외교·안보 2+2 회담이 별도로 있다. 7월 말 회담은 올해 신설된 미·일 ‘경제판 2+2’ 회담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이 회담에는 문자 그대로 양국의 외무장관과 경제장관이 참석했다. 한국에도 자세히 보도됐지만, 경제안보 측면에서 차세대 반도체 등 첨단기술 연구개발과 핵심물자 공급망 강화가 회담의 핵심 의제였다. 간단히 말해 ‘첨단 반도체에 관한 공동연구개발’이 미·일 2+2 회담의 결과였다. 이를 바탕으로 2025년부터 첨단 반도체인 2㎚ 칩 양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한국에 퍼진, 미국의 ‘칩 4’에 대한 공급망 요청 기사는 미·일 공동성명에 나오는 ‘문장 하나’에서 비롯됐다.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해 가치관을 공유하는 유럽·한국과 함께 협력기반을 강화해나간다.’ 미국의 ‘칩 4’에 대한 요청은 미·일 공동성명 내 ‘협력기반 강화’라는 말을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미·일 2+2 회담은 한국의 미래 밥줄을 가늠할 ‘아주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한다. 근거는 무엇일까? 이 미·일 회담의 결과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통용될 첨단산업의 ‘국제기준’이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표준 지침서가 된다는 말이다. 미·일을 넘어서 반도체와 AI 첨단산업에 관한 자유세계의 기준이자 표준이 될 회담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내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떤 기준과 표준일까?

공동성명에 나타난 양국의 원칙과 약속을 보자. 먼저 원칙이다. ‘민주주의가 번영, 안정, 안전보장을 위한 최선의 모델이란 점을 증명한다.… 주권국가와 개인·기업의 이익을 위협하는 압력이나 관행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반대한다.’ 중국과 러시아란 단어를 내세우지는 않지만, 독재형 전제주의(Autocracy) 국가에 반대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도착 메시지가 트위터에 올라온다. “대만을 여행함으로써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을 믿고 강조한다. 대만의 자유, 그리고 모든 민주주의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펠로시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만난 자리에서도 ‘자유, 민주주의, 법치’라는 미국의 기본 가치와 원칙을 재확인했다. ‘자유, 민주주의, 법치’는 안보문제만이 아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도 적용될 개념이자 원칙이다.

2+2 회담에서 나온 미·일 두 나라의 또 다른 약속을 보자. 약속의 대상은 상호협력을 필요로 하는 4개 영역이다. ‘반도체, 전지, 주요 광물의 공급 체인 강화, 감시 시스템을 포함한 신흥기술의 수출 관리에 협력’. 두 나라는 이 4개 영역의 약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이버 공격에 맞설 공동대책과, 양자컴퓨터와 최첨단 스마트폰에 사용될 반도체 양산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에 사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정경분리’ 원칙을 버린 일본

‘런던해군군축조약(London Naval Treaty)’은 미·일 2+2 회담 내용을 살펴보던 중 떠올린 역사적 사건이다. 1930년 4월에 합의된, 미국·영국·일본 사이의 조약이다. 이들 세 나라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다.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자는 의미에서, 당시 이들 나라는 외교관을 통한 3국 간 해군 규모 축소에 들어갔다. 전함과 잠수함을 비롯해 해군의 규모를 톤(t)으로 책정한 뒤, ‘미국 10, 영국 10, 일본 7’의 비율로 최종 결정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일본 해군의 팽창이 서방 이권을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을 통제하기 위해 앵글로색슨 두 나라가 힘을 합쳤다고 보면 된다. 당연하지만, 당시 일본 군부는 물론 국민 모두가 조약에 극렬 반대했다. 같은 승전국인데 왜 미국과 영국은 10, 일본은 7에 불과하냐는 것이 이유다. 조약에 합의한 일본 외무성 관료들은 매국노로 매도되면서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국민들의 원성을 계기로 정부 관료들을 배제한, 극우 군국주의가 일본 전체의 흐름으로 정착된다. 크게 보면 런던해군군축조약이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의 단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미·일 2+2 회담이 겨냥한 최대 가상적은 중국이다. 미·일만이 아니라, 자유진영 모두를 묶어 중국에 맞서자는 반도체 동맹이 미·일 2+2 회담의 핵심 의제다. 92년 전 런던해군군축회담은 신흥 해양대국 일본을 가상적으로 삼은 앵글로색슨계의 반격이었다. 2022년 여름의 미·일 2+2 회담은, 반도체와 첨단산업을 통한 중국 견제다. 미국은 무차별 도쿄 공습은 물론, 원자폭탄까지 동원한 끝에 일본을 굴복시켰다. 철천지 원수관계였던 앵글로색슨 미국과 일본 사이의 기묘한 협력인 셈이다.

미·일 2+2 회담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일본의 변신이다. 싫든 좋든 미국과 중국은 글로벌 패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에 돌입한 상태다. 반도체와 첨단산업을 통한 미국의 중국 견제는 너무도 당연하다. 일본은 다르다. 일본 외교의 전통이지만, 안보와 경제를 따로 다루는 이른바 ‘정경분리’가 기본 원칙이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과 무기제조용 첨단소재를 거래하는 식의 외교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함께 인권문제를 거론하지만, 중국에 대한 비즈니스는 계속된다.

그러나 미·일 2+2 회담은 다르다. 일본은 정경분리가 아니라, ‘정경일체’를 다짐하는 출사표를 미국과 전 세계에 공표한다. 기억에도 새롭지만, 1989년 천안문사태가 끝난 뒤 중국에 대한 서방 측 경제제재가 단행됐다. 민주주의를 외친 학생운동을 탄압한 인권유린 국가라는 것이 경제제재의 근거였다. 당시 주요 7개국 정상회담(G7)은 경제제재와 더불어 대중국 차관 제공도 연기했다. 그 파장으로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1989년 4.2%, 1990년 3.9%로 추락했다. 

당시 중국을 회생시킬 구원투수로 등장한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이 G7을 설득하면서 중국 경제제재도 바로 해제됐고 곧 바로 중국 경제가 되살아났다. 1991년 9.3%, 1992년 14.3%란 경이적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2022년 미·일 2+2 회담은 천안문사태 당시 ‘친중’ 일본의 모습과는 정면 배치된다. 경제관계를 고려한 일본의 특별한 친중 배려는 당분간 없을 전망이다.

미·일 2+2 회담 이후 일본은 곧바로 각론 차원의 대응에 나선 상태다. 회의 이틀 뒤인 8월 1일 발족한 ‘경제 안전보장 추진실’을 보자. 간단히 말해 중국·러시아로 향하는 반도체, 첨단산업 수출을 규제하는 곳이다. 기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통제한다는 의미다. 이미 미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중국 수출입 상품과 투자·합병에 관한 국가안보법의 일본판이라 보면 된다. 현재 미국 의회에서 논의 중인 ‘투자심사법’에서 보듯, 돈이 있다고 미국에 투자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투자가 적절한지 미국 정부가 직접 개입해 심사할 수 있게 된다. 한국 반도체 회사가 미국에 투자하는 데 대해 이견을 달 미국인은 없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운다고 할 경우 심사에 들어가 부결될 가능성이 99%다. 한국은 같은 가치관에 입각한 나라지만, 중국은 글로벌 질서를 어지럽히는 힘자랑 깡패국가라는 이유에서다.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한 일본 경제안보법에서 ‘특히’ 주의할 부분이 하나 있다. 경제안보법이 적용될 대상이다. 중국·러시아·북한 같은 나라가 중심인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한국에 수출된 일본산 반도체 소재가 독재형 전제국가로 넘어갈 경우, 한국에 대해서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지난 8월 1일, 외신은 미국 정부가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장비출하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의 삼성을 비롯한 중국 진출 반도체 공장들이 줄폐업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실려 있다.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미 6개월 전부터 예상되던 구문일 뿐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반도체 공장은 현재 풍전등화 상태다. 미국이나 일본발 소재와 장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중국에 헐값에 헌납하고 나오거나, 아예 미국과 관계를 끊고 중국 반도체공장에서 자력갱생하는 길만이 남아 있다.

앞서 설명했지만, 미·일 2+2 회담 공동성명에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해 가치관을 공유하는 유럽·한국과 함께 협력기반을 강화해나간다’는 말이 나온다. 행간의 의미는 미·일이 구체화한 경제안보법에 유럽과 한국이 따라오라는 의미다. ‘칩 4’로서의 한국에 대한 요청이나 배려가 아니라, 미·일 2+2 회담에 따른 각론에 ‘한국도 동참해야만 한다’는 경고다. 거절할 경우 경제안보법이 적용될 것이다.

대만 최대 반도체 기업인 TSMC 공장과 마크 리우 대표(아래). photo 블룸버그
대만 최대 반도체 기업인 TSMC 공장과 마크 리우 대표(아래). photo 블룸버그

日 경제안보법이 한국 반도체에 미칠 영향

‘설마’로 버티고 있지만, 디커플링은 미·중만이 아닌 전 세계 구석구석으로 파고들고 있다. 현재 최종 단계지만, 일본 경제안보법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과 내용이 곧 완성될 전망이다. 미국과의 협력에 기초한 법이란 점에서 ‘일본 경제안보법=미국의 의향’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필자 판단이지만, 미국보다 한층 더 촘촘하게 실행될 것이다. 반도체 그 자체만이 아닌 첨단산업의 소재·설계능력·제조장비 전부가 국가 안보의 대상이다. 단순히 중국에 안 판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미·일과 거래를 원할 경우 지켜야만 할 원칙과 가치가 ‘아주 세밀히’ 명시될 전망이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엄청난 벌금은 물론 미·일이 주도하는 소재·설계능력·제조장비에 관한 규제에 직면하게 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반도체 동맹이 논의되던 미·일 2+2 회담 당일, 또 다른 중요한 일정이 워싱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미·중 정상 간의 화상회담이다. 미·일이 반도체 동맹으로 나아가자고 다짐하던 그 순간,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만났다. 바이든은 코로나19에 감염된 상태인데도 화상회담에 참가했다. 한국에도 보도됐지만, 2시간20분이나 진행된 화상회담의 핵심은 대만 문제였다. 당시 시진핑은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미·중 정상 화상회담에서 언급했던 “(대만을 갖고) 불장난을 하면 반드시 불에 타 죽는다”는 협박성 경고도 재등장했다. 바이든의 답은 간단하다. “내가 하원의장의 일정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펠로시는 어디든지 갈 자유가 있다.” 원래 미·중 회담의 핵심은 중국발 수출품에 대한 미국 내 관세인하 문제였다. 그러나 시진핑이 대만 문제에 집착하면서 관세인하 문제도 흐지부지 끝났다.

지난 8월 3일 대만을 방문한 펠로시 미 하원의장(왼쪽)이 차이잉원 총통을 만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3일 대만을 방문한 펠로시 미 하원의장(왼쪽)이 차이잉원 총통을 만나고 있다. photo 뉴시스

대만 반도체의 64%를 사가는 미국

미국에 대만은 민주주의 보루인 동시에, 서부아메리카를 지킬 태평양 방어선의 출발선에 해당한다. 바이든은 가치·원칙을 공유하는, 대만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공언하고 있다. 대만 유사시 미국의 필연적 개입을, 무려 세 번이나 공언한 상태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서 보듯, 미국은 민주주의 체제의 우방국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TSMC를 근간으로 한, 세계 최고의 반도체 생산 대국으로 부상한 대만의 저력도 미국 개입이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은 대만에서 생산된 반도체의 64%를 수입(2021년 기준)하는 나라다. 애플 제품이나 자동차만이 아니라 전투기·잠수함에도 응용될 최첨단 반도체 생산대국이 바로 대만이다.

‘가치 원칙=비즈니스’인 시대다. 한국이 ‘칩 4’ 반도체 대국이라 자랑하면서, 미·중을 오가며 장사를 벌일 상황이 아니다. 사실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2025년을 목표로 한 미·일 첨단 반도체 양산이 이뤄질 경우 한국 반도체의 위기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과연 앞으로 상황이 얼마나 험난해질지 대만 TSMC와 삼성전자를 비교해 보자. 올 8월 기준, TSMC는 시가총액 4462억달러로 전 세계 11위 슈퍼 기업에 올라 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3147억달러로 전 세계 24위에 그친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 10위권에 있었던 삼성전자지만, 최근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019년 8월 30일로 돌아가 보자. 삼성전자의 당시 시가총액은 2427억달러, TSMC는 2145억달러였다. 불과 3년 만에 역전돼 엄청난 격차가 벌어진 셈이다.

기업의 규모만이 아니라 수입도 TSMC의 압승이다. 지난해 TSMC의 1년간 총수입은 570억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삼성은 200억달러로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오해하기 쉬운데 TSMC의 주된 수출 대상국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TSMC 총수출액 가운데 10% 정도가 중국이다. 그나마 완제품이 아닌 중간재 수출이 많다. 중국 하나에 집중하는, 완제품 중심 한국과 다르다. 중국이 TSMC를 통제하려 해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 반도체의 험난한 미래는 투자자들의 불안한 시선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 지난 6월 30일 삼성은 반도체 제조공정 가운데 가장 앞선 기술인 3㎚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첨단 반도체가 등장했는데도 오히려 주가는 하락했다. 물론 시가총액도 줄어들었다. 유동성 축소에 따른 주가 하락의 규모를 봐도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밝지 않다. 삼성 주가는 1년 전에 비해 무려 30% 이상 하락했다. TSMC는 어떨까? 1년 만에 22% 떨어졌다. 중국의 무력 침략 위협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선방한 실적이다. 왜 삼성의 주가 하락은 멈추지 않고, TSMC 성장세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는 것일까? ‘가치 원칙=비즈니스’에 대한 결의와 각오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서 만난 핵심 인물은 차이잉원 총통과 TSMC 대표 마크 리우 두 명이었다. 펠로시는 두 사람과 따로 만나 민주주의와 첨단산업에 관한 미국의 가치와 원칙을 공언했다. TSMC 대표가 펠로시와 만났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중국 측 보복이 따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우는 펠로시와 만나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대만 정부는 물론 반도체 핵심 관계자들도 민주주의 원칙과 반도체 동맹에 적극 동의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TSMC 주가는 펠로시 만남 후 한층 더 올라갔다. 세계의 투자가들이 TSMC를 신뢰한다는 말이다.

 

펠로시 만난 마크 리우 TSMC 대표의 결의

삼성에 이어 SK하이닉스가 미국공장 건설에 나설 예정이라고 한다. 미·일 2+2 회담 하루 전인 7월 28일 결정된 ‘반도체 투자진흥법’에 따라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신설할 경우 지출이 평균 30% 정도 올라간다고 한다. 그만큼 이윤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한국 반도체의 미국행은 이윤 감속만이 아닌, 100% 미국법 적용을 의미한다. 한국 내 반도체 관련 일자리가 사라지고, 관련 하청업체의 쇠락도 필연적이다.

당연하지만, 기업의 대부분은 정경일체가 유일한 대안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가는 애매모호한 ‘박쥐 외교’에 목을 맨다. 듣기도 좋고 책임과도 무관한, 양시론·양비론이 판을 친다. ‘전략적, 지정학적’이란 폼나는 용어도 단골 메뉴다. 미·일 2+2 회담에 나타난 일본, 나아가 대만 총통과 TSMC 대표의 결의나 각오를 보라. 한국의 정부나 정치가에게서는 쉽게 찾기 힘든 단호함이 배어난다. 펠로시 방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와 변명은 최적의 증거이자 본보기다. 펠로시의 이번 4개국 순방 도중 국가 정상이 안 나타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의 경우 펠로시의 대만 방문을 지지·응원하는 정치가들의 메시지가 줄을 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회담만이 아니라 아침 식사까지 함께하면서 펠로시를 적극 환영했다. 반면 한국은 여야를 막론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국이 고맙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안겨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럴 경우 한국 반도체도 불신의 대상으로 추락한다.

아무리 우수한 성능을 자랑한다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원칙이 배제된 반도체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는 시대를 맞았다. 인권 유린이 일상적인 중국 위구르 지역의 목화로 만든 옷은 구찌·샤넬 제품이라고 해도 소용없다. 단언컨대, 한국 첨단산업의 미국 진출은 한층 더 가속화할 것이다. 서서히 가시화되고 있지만, 대만 TSMC의 시설도 미사일 한 방이면 전면 중단이다. 미국도 피해가 생기겠지만, 중국의 경제추락이 더 클 것이다. 그런 사태가 빚어질 경우 중국은 국제사회와 차단된 1979년 개방 이전 ‘중공(中共)’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 같은 상황하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땅은 어디가 될까? 반도체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거꾸로 전 세계 첨단산업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한 세대 전 누가 말했던가?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 반도체 1류 기업을 품은 2022년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명언이자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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