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시설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100% 자동화된 반도체 생산설비를 살펴보고 있다. photo 삼성전자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시설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100% 자동화된 반도체 생산설비를 살펴보고 있다. photo 삼성전자

지난 9월 20일 오후,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열린 세미나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렸다. 1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다. 대한전기협회가 주최한 ‘RE100 및 탄소국경조정제 대응전략 세미나’가 이날 이곳에서 있었다.

RE100은 최근 뜨거운 감자다. ‘RE’는 ‘Renewable Energy’의 약자로 재생에너지를 뜻한다. 지난 9월 15일 삼성전자의 선언은 수면 아래 잠자던 RE100이라는 소재를 단숨에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이날 삼성전자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고 동시에 글로벌 이니셔티브인 ‘RE100’에도 가입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RE100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겪은 적이 있다. 2022년 2월 대선 토론에서 “RE100이 뭐냐”고 되묻는 윤석열 당시 후보의 발언 때문에 “대통령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거냐”며 화제가 됐던 게 RE100이었다.

RE100은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탄소중립 프로젝트로 2050년까지 기업이 쓰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약속이다. 특정 국가가 나서는 게 아닌, 민간에서 주도한다. 영국의 비영리단체인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와 더클라이밋그룹이 2014년부터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구속력은 없지만 RE100에 참가하는 기업들의 면면이 강대하고 이미 짜인 네트워크가 넓어서 여기에 들어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력 사용 1위 기업 삼성전자의 고민

이미 애플, 구글, 에어비앤비와 같은 IT 기반 기업들, 베엠베(BMW)와 같은 자동차 기업들, 샤넬이나 버버리와 같은 명품 기업들도 RE100에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SK그룹의 계열사와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아모레퍼시픽, KB금융지주, 네이버, 카카오 등이 가입했다. 현재 RE100 공식 홈페이지에 등재된 가입 기업은 총 381곳이다.

앞선 세미나에서 마이크 앞에 선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RE100 동향과 기업의 대응’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재생에너지를 둘러싼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를 예상하고 있었다. 국내 기업에서 적지 않은 곳이 RE100에 참여했고 앞으로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어날 텐데 우리네 전력 구조상 대응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수요가 급성장하는 건 기후관련 공시가 의무화되기 때문이다. 그는 “2025년부터 스코프(Scope3)를 공시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탄소배출은 그 성격과 범위에 따라 스코프(Scope·유효 범위)1부터 3까지 나눈다. 보통 스코프1은 제품 생산 단계에서 발생하는 직접적인 탄소배출을, 스코프2는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스코프3는 협력 업체와 물류, 제품 사용과 폐기 과정 등 공급망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배출을 뜻한다.

과거에는 스코프1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은 RE100 등장 뒤 스코프3까지 범주를 확장했고 기업들은 과거보다 더 앞날을 내다보며 장기 전략을 수립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스코프3를 준수해야 한다는 건 협력업체로 연결된 국내 기업들 역시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유럽과 북미보다 생산시설 숫자가 많은 아시아에서의 RE100 가입 기업 수가 확대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국내 전력 사용량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RE100 가입을 두고 처음 제기되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국내에서 RE100을 달성한다는 것일까.’ 지난 9월 15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신환경경영전략’을 보면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은 있다. 보도자료에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작년 기준 7.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0%)에 한참 못 미친다’는 부분이 그렇다.

지난 7월 공개한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2’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유럽 등 해외 사업장에서는 재생에너지 100% 전환에 성공했다. 5년 안에 모든 해외사업장을 재생에너지 사용 100%로 달성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반면 국내 사업장이 문제다. 한국에서의 재생에너지 사용률은 2.7%에 불과하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전 세계 사업장에서 사용한 전력 총량은 3만2322GWh(기가와트시)였다. 이 중 절반이 넘는 1만8410GWh는 반도체 사업장이 몰려 있는 국내에서 사용했다. 이 중 재생에너지 사용량은 약 500GWh에 불과했다. 해외 사업장의 달성 결과를 보면 국내에서의 저조한 성적을 삼성전자의 의지 문제로 돌릴 일은 아니다.

삼성전자의 RE100 참여는 국내외 다른 기업보다 늦은 편이다. 반도체 생산공정에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와 용수,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이 사용되고 그만큼 환경 리스크를 통제하기가 까다롭다는 걸 고려해도 늦었다. 일찌감치 ‘RE100’에 가입한 애플은 이미 2030년까지 모든 생산과정에서 탄소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애플 자신만의 목표가 아니다. 2030년이라는 기한에 맞춰 협력업체의 배출량도 같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B2B 기업일수록 생존 문제로 직결된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자사 제품 생산에 재생에너지를 사용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인증 시스템을 만들었다. 국내 업체들도 애플의 인증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일부 해외 협력사 중에는 이미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한 곳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애플이 공식적으로 밝힌 재생에너지 사용 협력업체는 175개다. 애플의 국내 협력 업체 중 재생에너지 사용을 약속한 곳은 삼성SDI와 LG디스플레이 등 13곳이나 된다.

지난 6월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경남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 공장을 방문해 APR1400 원자력발전소 조감도를 살펴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경남 창원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 공장을 방문해 APR1400 원자력발전소 조감도를 살펴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로이터의 비판, 줄어든 재생에너지 계획

“기후변화에 대한 한국 정부의 늑장 대처가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삼성전자의 RE100 발표 이후 로이터통신은 삼성전자의 늦은 재생에너지 활용 전략을 대하는 정부의 대처에 의문을 표했다. 환경단체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일단 삼성전자의 동참에는 ‘늦었지만 환영’이라지만 정부의 대처에는 비판적이다. 오히려 삼성전자에 정부의 변화를 추동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도 있다. 비영리단체인 ‘기후솔루션’은 논평에서 “삼성전자는 RE100 이행을 위해 필요한 조처와 낙후된 전력산업 개선에 대한 대책 마련을 정부에 적극 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산 재생에너지 문제는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직결된다. 다만 윤석열 정부가 가진 전력수급의 기본 방안은 친(親)원전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런 기조 탓에 재생에너지 비중이 축소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진즉 나왔다. 현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이나 탄소중립 등에 관심을 놓진 않더라도 해결방법이 달라서다.

현 정부의 에너지 믹스에서 원자력이 중심이라는 건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8월 발표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도 드러난다. 계획을 보면 2030년 원전 발전량은 전체의 32.8%, 신재생에너지는 21.5%를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2030 국가 온실가스감축 목표(NDC) 상향안에서는 2030년 원전 발전량 비중이 23.9%,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30.2%였다. 결과적으로 원전은 8.9%포인트 증가했고 신재생에너지는 8.7%포인트 감소했다.

이런 흐름은 재생에너지의 큰 축을 차지하는 태양광 거래량에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지난 8월 기준 태양광 거래량은 643GWh로 집계됐는데 전월(1000GWh) 대비 35.7%가 급감했다. 현 정부가 들어선 지난 5월 이후 태양광 거래는 쭉 하락세를 겪고 있다. 반대로 원전 거래량은 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월별 원전 전력거래량을 보면 4월에 1만2748GWh에서 8월 1만5487GWh로 뛰었다. 매월 약 1000GWh 정도 증가한 상태다.

한 태양광 업계의 관계자는 “위기감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태양광 업계가 성숙되지 못한 탓에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데 여기에 정치적 배경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원전 중심으로 복귀하려는 현 정부의 정책에 이번 태양광 비리 문제가 활용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 속에서 ‘태양광은 해처먹는 사업’이라는 이미지가 덧붙는다면 현 정부에서는 태양광 사업이 정책 소외 분야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더 두렵다.”

 

“작은 기업 참여 위한 가격 정책 필요”

정부는 유럽연합(EU)도 원전을 탄소중립에 관한 녹색분류체계인 택소노미(taxonomy)에 포함했기 때문에 원전을 친환경 에너지원이라고 본다. 지난 9월 20일 공개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초안에서도 원전은 녹색에너지로 분류됐다. 환경부는 “유럽연합이 원전을 녹색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에 포함하는 등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원전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반면 RE100은 원전을 에너지원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량만으로는 우리 기업들의 수요를 견딜 만큼 충분하지 않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RE100은 풍력, 태양광이 중심이고 수력 등 일부 재생가능 에너지만 허용한다. 결론적으로 국내 대기업들의 RE100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풍력, 태양광 설치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적정 가격 형성은 정부 정책이 반드시 개입해야 할 부분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건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화력발전과 재생에너지 발전원가가 같아지는 시점)를 달성한 곳이 많아서다. 하지만 한국은 재생에너지 전력이 화력발전을 통한 전력보다 비싸다. 이런 재무적인 부담을 지는 구조일지라도 대기업은 어떻게 헤쳐갈 수 있지만 중소기업의 경우는 다르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제품 하나의 공급망에 참여하는 중소기업, 중견기업 모두가 RE100을 이행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작은 기업일수록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모든 참여자들이 재생에너지 조달을 어느 정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100이 만드는 새로운 질서에서 도태될 경우 상정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기업의 이탈이다. 과거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국내 기업들이 오프쇼어링(기업활동의 일부를 해외에 아웃소싱)을 했다면 앞으로는 재생에너지를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국가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일이 없으란 법도 없다. 지난 7월 폴란드에서 배터리 소재인 동박 생산공장 착공식을 가진 SK넥실리스는 그곳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로 ‘신재생에너지 확보’를 꼽았다. RE100의 완전이행이 가능하다는 건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데 이미 고려사항이 됐다. RE100에 신경 못 쓰면 고용마저 훼손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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