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2022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photo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지난 7월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최한 ‘2022 중견기업 일자리 박람회’를 찾은 구직자들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photo 박상훈 조선일보 기자

지난 7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반성문을 썼다. 정확하게는 반성문의 형식을 띤 칼럼이었는데 제목이 이랬다. ‘나는 인플레이션에 관해서 틀렸다(I Was Wrong About Inflation)’.

미국 정부가 지난해 초 코로나19 부양책으로 1조9000억달러(약 2700조원)를 풀자 당시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크루그먼 교수의 예측은 “물가에 그다지 영향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기록적인 숫자를 기록했으니 고개를 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반성하는 글로 자신의 오판을 사과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은 인플레이션. 한때 잃었던 일상을 되찾자 이제는 세계 경제가 고물가에 긴축까지 더해지며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의 판단이 틀렸다는 건 현실 지표들이 증명한다. 특히 경기 불황에 대한 공포는 점점 현실이 돼 간다. 고물가와 고금리 여파 등으로 세계 경제가 뒷걸음질한다는 최신의 경고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펴낸 보고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OECD는 세계 경제 실질성장률이 지난해 5.8%에서 올해는 3%, 내년에는 2%가 될 거라고 본다. “여러 경제지표들이 장기간의 성장 둔화를 가리키고 있다”는 게 OECD의 결론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인플레이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지만 이 문제가 끼치는 사회경제적 파장은 계급과 계층 사이를 아프게 파고든다. 특히 청년들이 느끼는 구직난, 뒤따르는 불안감은 심각하다. 코로나19부터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는 2연타를 맞은 이 세대들이 겪는 사회 진입의 어려움은 생애에 걸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출발이 꼬이면서 결혼과 출산, 보육과 노후도 함께 꼬여간다. 이런 꼬인 실타래가 가져올 문제의 심각성은 1997년 IMF 구제금융 당시의 청년층에 대한 실증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다.

 

 IMF, 특정 세대 생애 전반에 흔적

‘IMF(국제통화기금) 세대’. 혹독한 금융위기를 겪던 시절 직업 전선으로 뛰어든 세대를 지칭한다. 딱 정해져 있진 않지만 대략 1971~1975년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세대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만으로 고생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힘든 상황을 뚫고 직업을 구했더라도, 심지어 국가 경제가 위기를 이겨내고 회복됐을 때도, 자신들의 사정이 풀리지 않았다는 증언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2020년 9월, 국제학술지인 ‘노동경제학 저널’에 국내 연구진들이 펴낸 논문이 하나 게재됐다. 최자원 한양대 교수팀이 쓴 ‘경기 후퇴 시 노동시장 진입의 장기적인 영향:아시아 금융위기 속 증거’는 경기 불황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의 인생행로에 장기간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당시 기업들의 무분별한 차입과 과잉투자, 은행 부실, 정경유착 등으로 국가 채무는 급증했고 그렇게 도래한 통화 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휩쓸었다. 결국 IMF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의 국제 금융기관과 외국에서 600억달러의 외환을 긴급 수혈받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구조조정 아래 대기업과 은행들이 무너지면서 대규모 실업과 금융 불안이 일어났고 경제지표는 곤두박질쳤다. 1997년 하반기에만 원화 가치는 46%나 떨어졌고 주식시장의 지수도 50%나 하락했다.

실업률은 1997년 11월 2.7%에서 1998년 2월 6.1%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997년 말에 발생한 외환위기는 2001년 8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됐는데, 이때의 극심한 경제 불황은 20대 청년들에 직격탄을 날렸다. 1998~1999년 20~29세 청년층의 실업률은 10%를 넘었는데 전체 실업률보다 약 4%포인트가 높았다.

논문은 ‘한국 노동 및 소득 패널 연구(KLIPS)’의 데이터를 사용했는데 조사 대상자들의 40대 중반까지를 추적해 장기적인 영향을 조사했다. 살펴보면 대규모 경기 침체 시기에 대학을 졸업한 남성의 경우는 최대 12년까지 고용과 수입 면에서 지속적인 감소를 경험했다. 남성의 경우 대학을 졸업할 때 실업률이 1%포인트 높아지면 취업 가능성이 1.9%포인트 떨어졌고 소득은 2.5%포인트 낮아졌다. 사회 진입 후 경력이 악화되면 자연스레 결혼과 출산율도 따라서 감소했다. 실업률이 1%포인트 높아지는 시기에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청년 남성의 결혼 가능성은 2.2%포인트 낮다. 혼인의 감소는 출산율의 감소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금융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집을 자가로 소유할 가능성도 낮다. 생계비를 절약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살 가능성도 높았다. 논문은 “남성 표본에서 초기 실업률이 1%포인트 오를 때 모든 금융자산의 총가치가 9년 동안 13~31% 하락하는 것을 관찰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대규모 경기 침체기에 노동시장에 진입한 청년세대의 고용과 수입 감소는 생애 전반에 악영향을 준다는 걸 강조한다.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첫째, 불황기에 노동시장 진입은 젊은 노동자의 인생 행로 전반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 둘째, 대규모 불황은 가벼운 불황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소득 감소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실업으로 고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황기의 사회진입 청년들이 악영향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은 가족이다.”

1998년 2월 3일, 서울 양천구 목동 ‘IMF모임터’를 찾은 구직희망자들이 일손을 구하려는 기업체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1998년 2월 3일, 서울 양천구 목동 ‘IMF모임터’를 찾은 구직희망자들이 일손을 구하려는 기업체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고령세대보다 소득 낮을 수도 

심혜정 국회예산정책처 조세분석심의관은 ‘연령-소득 프로파일 추정을 통한 세대 간 소득 격차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생애 전체 기간에 받을 수 있는 평균 실질임금을 추정했다. 그 결과 1958〜1962년생부터 1968〜1972년생까지는 실질임금이 꾸준히 상승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에 뛰어든 1978년생 이후부터는 직전 세대의 소득 수준에서 정체하거나 소폭 하락하는 것을 보여준다.

논문은 1988〜2017년 사이의 국민연금 자료를 활용했는데 25〜29세에 노동시장에 진입한 청년 남성의 경우 노동시장 진입 시기가 1987년(1958〜1962년생)인 경우는 월평균 실질 초임 임금이 110만1000원 수준이었고 1992년(1963〜1967년생)인 경우 157만3000원으로 42.9% 상승했다. 1997년(1968〜1972년생)의 초임 수준은 214만5000원으로 전 세대보다 36.4% 올랐다.

반면 2002년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한 경우(1973〜1977년생) 초임은 205만3000원으로 전 세대보다 4.3% 하락했다. 2007년(1978〜1982년생)의 초임은 218만1000원, 2012년(1983〜1987년생)은 221만원으로 오르긴 했지만 그 상승폭은 이전과 비교해 완만했다.

불황기에 처음 노동시장에 진입한 청년은 초임 임금이 낮고 소득 증가율도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이 때문에 생애 소득으로 비교했을 때 고령 세대보다 젊은 세대가 전체 소득이 낮을 수도 있다. 심 심의관은 외환위기 이후 청년층의 고용 사정 악화에 주목했다. 그는 “2000년 이후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청년층 고용 사정 악화는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세대의 진입임금을 낮추고, 이런 진입임금의 차이는 생애주기 전체의 소득 커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IMF 세대 이후 20여년 뒤, 코로나19 대유행에 인플레이션까지 덮쳤다. 지금의 청년세대를 누군가는 ‘록다운(Lockdown) 세대’라고 불렀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누버거버먼은 이들을 ‘인플레이션 세대(inflation generation)’라고 정의한다.

 

최저실업률 시대의 취업난 

김낙년 전 동국대 교수(경제학)는 IMF 세대와 인플레이션 세대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본다. “IMF 이후에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해도 달리던 트랙을 놓친 친구들의 낙인효과, 이력효과는 계속 갈 확률이 높다. 지금 코로나19 이후에 졸업하는 학생들의 경우도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과거 취직에 어려움을 겪었던 학생들이 입었던 데미지가 잘 회복되지 않듯이 지금도 그렇다. 특히 요즘은 자산불평등으로 생기는 격차에 대한 상실감까지 고려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세대는 경제 불황이라는 암운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집단이다. 원하는 곳이 있어도 수요와 공급이 전혀 맞지 않는다. ㄱ(29)씨는 취업 전선 최일선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서울 소재 중상위권 대학 중 한 곳을 졸업했고 기사자격증까지 가진 공대생이다. 오픽 IH, 토익 900점대 보유자다. 지난해에는 원하던 대기업 최종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합격하진 못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코로나19 이후 모집인원 자체가 줄어든 곳이 많아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그는 내년이면 서른 살이다.

올해 초 나이에 대한 불안감이 덮치면서 도전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그가 제시받은 초봉은 2700만원이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연봉 수준을 듣고 나서 내 인생이 모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고 회사 안에서도 마음이 떠서 정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한 달 만에 나왔다.” 그는 불안감을 안은 채 다시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잘한 선택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관두겠다는 통보 뒤 가진 면담에서 팀장이 했던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ㄱ씨. 다니면서 점프업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지난 8월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동향을 보면 국내 실업률은 2.1%였다. 역대 최저치인데 사실상 이 정도면 완전고용수준이다. 일하려는 의사와 능력을 갖춘 자가 모두 고용된 상태인 ‘자연실업률’을 보통 3%대로 보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낮은 상황이다. 8월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80만7000명이 늘어 18개월째 증가세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청년들은 취업난이라고 하는데 실업률이 역대 최저치라는 건 모순이다. 그런데 20대 청년들의 사정만 놓고 보면 다를 수 있다. 올 상반기 전체 실업률은 평균 3.3%에 그쳤지만, 같은 기간 청년(만 15~29세) 실업률은 평균 6.9%에 달했다. 7월과 8월 전체 실업률 2.9%, 2.1%보다 청년 실업률은 두 배 이상 높은 6.8%, 5.4%였다. 단기 아르바이트생, 시험준비생 등이 포함되는 ‘확장실업률’의 경우 전체 수치는 9.8%였지만 청년층으로 한정했을 경우 18.1%에 달했다.

지난 9월 19일 정부세종청사에서는 빈센트 코엔 OECD 경제검토국 부국장이 직접 나서 ‘2022 한국경제보고서’에 관해 설명회를 열었다. 약 40분가량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에서 그는 ‘청년 실업’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 실업률도 낮은데 왜 15~29살의 고용률은 이토록 낮냐는 거였다.

지난해 한국의 청년(15~29세) 고용률은 44.2%로 OECD 평균(53%)보다 8.8%포인트가 낮다. 여기에는 대학진학률이 높은 탓도 있지만 OECD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 주목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상태, 그로 인해 파생되는 노동소득의 격차를 문제라고 봤다.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중위노동소득 대비 상위 10%의 노동소득 배율이 2배가 넘는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OECD 국가 중에 가장 높다. 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격차 탓에 청년들의 중소기업 기피, 대기업 선호가 깊어진다는 거다. 구인난에 시달리는 곳이 많다는데 막상 청년들은 취업난에 허덕이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도 결국 이런 미스매치 때문이다. IMF 이후를 겪으며 자란 이들은 낮은 진입임금이 중장년이 됐을 때 삶의 질을 담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세대다. 

지난 9월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매출액 500대 기업 중 62.0%는 올해 하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거나 신규 채용이 없다고 답했다. 이 중 신규 채용 계획 미수립 기업은 44.6%로 전년 동기(54.5%)보다 줄었지만 채용하지 않겠다는 기업은 17.4%로 전년 동기(13.3%)보다 증가했다.

 

“1~2년 흘려보낸 취업 예비군도 합류해” 

실업률만 놓고 보면 지금의 불황은 IMF에 비할 바가 아닐지 모른다. 다만 최근 2~3년간 일자리는 계속 줄었고 채용절벽에 직면했던 이들이 많다는 건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인플레이션 세대가 IMF 세대의 이력효과를 되풀이해 겪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는 까닭이다. 한 글로벌 HR컨설팅펌 임원은 “비대면이 되면서 온보딩(신입 교육 과정)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아예 신입을 뽑지 않은 곳이 있을 정도로 코로나19가 채용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 게다가 코로나 여파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취준생들 상당수가 다른 사회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1~2년을 그냥 흘려보낸 채 취업 예비군으로 합류했을 건데 이 때문에 경쟁자들이 많아진 상태다. 이런 상태가 길어지면 비자발적 실업자, 혹은 단기임시직에 머무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와 인플레이션이라는 2연타는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 중 하나인 청년을 세게 때렸다. 이런 전례 없는 시대에 한 세대가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IMF 외환위기는 단기 충격으로 끝났지만 그 후유증이 굉장히 심했고 지금도 채 극복하지 못한 세대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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