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9일 서울 한강변의 선상 중식당 ‘동방명주’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비밀경찰서 관련 의혹을 부인한 왕하이쥔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한강변의 선상 중식당 ‘동방명주’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비밀경찰서 관련 의혹을 부인한 왕하이쥔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 photo 뉴시스

지난해 말 스페인의 국제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의 폭로로 불거진 이른바 비밀경찰서 의혹에 불똥이 튄 것은 ‘중국재한(在韓)교민협회’다. 조선족 동포들을 포함해 중국 국적 교민들의 모임인 ‘중국재한교민협회’는 비밀경찰서 의혹이 불거진 서울 송파구 한강변의 선상 중식당 ‘동방명주’의 실질 지배인 왕하이쥔(王海軍)이 이끄는 단체다.

2016년 11월부터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총회장과 ‘한화(韓華)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총회’ 총회장을 겸하고 있는 왕하이쥔 회장은 지난해 11월 총회장직 연임에 성공했고, 현재 서울화조(華助)중심(OCSC)도 이끌고 있다. 화조중심은 중국 국무원 교무(僑務·화교업무)판공실의 지도를 받는 조직으로, 왕하이쥔 회장은 ‘서울화조중심’ 주임(센터장)으로 있으면서 중국 국적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하이쥔 회장은 “10명의 중국인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지난해 12월 31일 자청한 유료(3만원) 기자회견에서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다만 그는 “질병 등 돌발적 상황으로 한국에서 사망하거나 다친 중국인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라며 “반중(反中)인사 송환 등 관련 의혹은 사실이 아니며 그런 권한과 능력이 없다”고 관련 의혹은 전면 부인한 상태다.

 

구화교 단체인 한성화교협회와 별개 

왕하이쥔 회장의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국 교민들이 속한 중국재한교민협회는 왕 회장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도매급으로 ‘비밀경찰’ 취급을 받고 있다. 2002년 설립한 중국재한교민협회는 리빈(李濱) 전 주한 중국대사 재임 중 국내 거주 중국 국적자들을 한데 결집할 요량으로 만든 단체다. 

기존에 재한 화교들의 단체인 ‘한성(漢城)화교협회’가 있었지만, 한성화교협회는 구한말 임오군란(1882년)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때까지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과 그 후예들로 결성된 단체다. 자연히 이들의 국적은 중화민국(대만)이다.

한성화교협회는 정관에서 회원자격을 ‘중화민국(대만) 여권 소지자’(제5조)로 한정하고, ‘주한 타이베이(臺北)대표부의 지도감독을 받는다’(제3조)고 명시하고 있다.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는 1992년 한·중 수교에 이은 한·대만 단교 후 사실상 주한 대만대사관 역할을 해왔고, 한성화교협회는 일부 영사업무까지 대행해 왔다. 자연히 한성화교협회는 양안(兩岸) 간에 ‘대만독립’과 같은 민감한 이슈가 불거질 경우, 중국 정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힘들었다. 화교협회의 한 관계자는 “엄마 아빠가 싸우면 한쪽 편을 들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에 중국 정부가 2002년에 한·중 수교 이후 건너온 ‘신화교’들을 중심으로 별도 교민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초대 대표는 주한 대만대사관 교무비서를 지낸 고(故) 한성호(韓晟昊) 신동화한의원 원장이 맡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공식 한방주치의’를 지낸 한성호 원장은 원래 중국 지린성 출신으로 국민당 정보기관인 ‘중통(中統·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에 속해 ‘재한 화교청년반공(反共)구국총회’를 이끌며 장제스(蔣介石) 전 총통과 사진을 남겼을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대만독립파’인 리덩후이(李登輝)가 대만 총통에 당선된 직후 친중파로 전향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1992년 한·중 수교 때 막후 밀사 역할을 맡았고,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수여받은 재한 화교사회의 대부(代父)다.

한성호 원장이 2002년 설립한 중국재한교민협회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오는 중국인들이 급증하면서 기존 한성화교협회의 지위를 능가할 정도로 막강한 단체로 떠올랐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 국적자들의 한국 유입은 꾸준히 이어지는 반면, 대만 국적자들의 국내 유입은 사실상 정체되면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동포)을 포함한 중국 국적 등록외국인(90일 이상 거주)은 모두 42만여명으로, 대만 국적의 등록외국인(1만7651명)보다 월등히 많다. 코로나19 전인 2019년 기준으로도 중국 국적 등록외국인은 54만여명으로 대만 국적 등록외국인(1만9872명)을 압도한다. 중국재한교민협회의 한 관계자는 “교민 범위를 어디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회원수는 대략 100만명가량으로 안다”고 말했다.

기존 조직인 한성화교협회에 적을 둔 구화교들 역시 비록 국적은 중화민국(대만)이라고 할지라도, 원적이 중국 산둥성(山東省) 등지에 있는 경우가 90% 이상이었다. 서류상 국적만 대만일 뿐 마음은 중국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박정희 정부 이래 화교들의 국내 경제권 장악을 억누르기 위해 가해진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 ‘짜장면값 통제’ 등의 교묘한 탄압이 계속되자 대만 국적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도 상당하다. 

한성화교협회 상대 ‘통전’ 공작 

반면 한성화교협회가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가진 화교 재산이 적지 않아서 이를 노린 신화교들의 협회 장악 시도는 계속됐다. 서울 명동 한복판의 한성화교소학교(초등학교)를 비롯해 한성화교협회 건물(옛 중정도서관), 연희동의 화교중·고등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과거 주한 대만대사관으로 쓰다가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중국 측으로 넘어간 명동 중국대사관과 담벼락을 사이에 둔 한성화교소학교는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명동의 노른자위 땅에 있어 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014년 화재사고가 났던 서울 청계천변의 수표동 화교사옥 역시 화교협회가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주한 중국대사관도 한성화교협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통일전선’ 전략을 구사해왔다. 한성화교협회가 비록 주한 타이베이대표부의 지도감독을 받고 있지만, 국내 거주 화교들이 사실상 대만에서 ‘2등 국민’으로 푸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화교 관련 행사에 주한 중국대사관 대사 이하 외교관들을 적극적으로 투입하는 등 접촉면을 늘린 것. 심지어 지난 2005년 닝푸쿠이(寧賦魁) 전 주한 중국대사 시절에는 중국대사관의 비자발급 업무 등을 취급하는 영사부도 이충헌(李忠憲) 전 한성화교협회장이 운영하는 서울 남산의 유명 중식당 ‘동보성’으로 이전하기에 이르렀다.

주한 중국대사관의 ‘통전’ 전략은 2015년 싱가포르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전 대만 총통 간의 66년 만의 국공(國共)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양안 간 화해무드가 본격화됐을 때 빛을 발했다. 주한 중국대사관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구화교를 대표하는 한성화교협회장과 신화교를 대표하는 중국재한교민협회장이 나란히 참석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됐다. 2019년 중국 건국 70주년 국경절을 앞두고 추궈홍(邱國洪) 전 주한 중국대사가 개최한 경축기념식에도 이보례(李寶禮) 당시 한성화교협회장과 왕하이쥔 중국재한교민협회장이 나란히 참석했다.

중국재한교민협회 명예회장도 과거 한성화교협회 부회장을 지낸 설영흥(薛榮興) 전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맡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친구로 과거 현대차의 중국 사업을 총괄했던 설영흥 명예회장은 지난해 11월 동방명주에서 열린 총회장 선거 때 왕하이쥔 회장에게 회장 인장과 명패 등을 직접 수여했다. 이 자리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일대일로연구원 원장)이 직접 축사도 보냈다. 설영흥 명예회장은 왕하이쥔 회장과 함께 지난해 12월 5일 중국대사관에 마련된 고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신화교의 주축은 조선족 

2021년 한성화교협회 회장 선거 때는 이른바 중국 국적의 ‘신화교’들을 한성화교협회의 새 회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까지 나와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는 물론 대만 집권 민진당에서조차 재한 화교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할 정도로 최대 이슈가 됐다. 한성화교협회는 최근 회원수가 1만5000명 선으로 급감하며 존립기반이 흔들리고 있는데, 새로운 피를 수혈하자는 주장이 내부에서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당시 선거 때 구화교들의 강한 반발을 불렀고, 신화교들의 협회 가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손육서(孫毓緖) 현 한성화교협회장이 당선되면서 일단 제동이 걸렸다. ‘파이’가 한정된 상황에서 신화교들이 한성화교협회에 대거 유입될 경우, 협회 운영 주도권이나 재산 처분상 권리를 신화교 쪽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발동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 국적의 ‘신화교’들은 실은 조선족 동포가 대다수다. 2021년 기준 중국 국적 등록외국인 42만여명 가운데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동포)은 모두 25만여명으로 순수 중국인(17만여명)을 압도한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기준으로 한국계 중국인은 33만여명으로 순수 중국인(20만여명)보다 월등히 많다. 구화교 사회에서는 임오군란 직후 체결한 ‘중·조(中朝)상민수륙무역장정’(1882년)을 기반으로 화교들이 일군 고유재산을 한국계 중국인인 조선족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왕하이쥔 회장은 작고한 한성호 전 회장의 뒤를 이어 2016년 11월부터 이른바 ‘양총회’라고 불리는 ‘중국재한교민협회 총회’와 ‘한화중국화평통일촉진연합 총회’를 이끌어 왔다. 주한 중국대사관의 ‘통일전선’ 전략에 따라, 장기적으로 한성화교협회를 중국재한교민협회에 흡수통합하면 사실상 재한 화교들을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하지만 왕하이쥔 회장과 중국재한교민협회는 비밀경찰서 의혹이 터지면서 운신의 폭이 크게 좁아진 상태다. 이번 사태로 왕하이쥔 회장이 재한 중국 교민사회의 주류인 조선족이 아닌 만주족이란 사실이 알려진 점도 핸디캡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1978년 중국 랴오닝성 푸순(撫順)에서 태어난 왕하이쥔 회장은 만주족 출신으로 조선족 아내와 결혼한 후 사업비자를 받아서 2003년경 한국에 건너온 것으로 알려졌다.

20년가량 한국에 살았지만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 지난해 12월 29일과 31일의 기자회견 역시 한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중국재한교민협회의 한 관계자는 “왕 회장이 한국말을 못해 개인적인 의사소통은 잘 안 된다”고 했다. 화교 사회의 한 관계자는 “주한 중국대사관 입장에서는 재한 화교들의 대표가 한국 측에 포섭될 가능성이 있는 조선족보다는 한국말을 못하는 만주족인 것이 훨씬 믿음직스러울 것”이라며 “이번 사건으로 한성화교협회와 중국재한교민협회의 통합은 상당 기간 힘들어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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