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금 미리 받고 판로도 확보 수확도 밭떼기 업자가 해결해줘
폭락 땐 계약 파기도 감수밭떼기 의존 높아 악순환 계속
배추밭을 갈아엎고 있는 김성원씨. ⓒphoto 박소영 기자
배추밭을 갈아엎고 있는 김성원씨. ⓒphoto 박소영 기자

지난 5월 3일 충남 예산군 탄중리. 몇 년째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김성원(52)씨가 기자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가을 한 포기에 1만원을 호가하던 배추가 올봄 1400원(도매가 기준)으로 급락했기 때문이다. 탄중리 농민들은 값이 떨어진 배추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미 밭을 갈아엎고 있었다. 배추를 갈아엎고 빨리 다른 작물을 심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작년 김장철만 해도 가격이 폭등해 난리가 났던 배추가 지금은 가격 급락으로 정반대의 대란을 겪고 있다. 왜 배춧값은 이렇게 요동치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른바 ‘밭떼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계약 관행이 있다. ‘포전계약’이라고도 하는 밭떼기는 밭에 나는 농작물을 파종 전에 밭째로 사고파는 계약을 맺는 것으로, 배추는 대표적인 밭떼기 작물이다.

계약금 쥐어주며 배추농사 부추기더니…

최근 배춧값이 폭락한 것은 기본적으로 작년 배추 파동을 겪으며 배추 재배 면적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올해 봄배추 재배면적은 1만1500㏊로 지난해에 비해 30% 이상 증가했다.

“작년에 배추가 ‘금추’였잖아요. 정부에서 배추 많이 심으라고 권고를 했어요. 우리도 당연히 시세가 좋을 줄 알았죠.”

남편과 함께 밭일을 하던 예산군 탄중리 이모(57)씨가 하우스 가득 남아 있는 배추를 쳐다보며 말했다. 탄중리의 농민들은 배추 가격이 오름세를 이어갈 거라고 예상해 올해 초 봄배추 재배 면적을 크게 늘렸다고 한다.

여기에 불을 지른 게 밭떼기 업자들의 극성이었다. 배추 시세가 뛸 것이라고 생각한 밭떼기 업자들이 몰려들어 웃돈을 얹어주면서까지 배추 농사를 독려했다. 이씨는 “시세가 뛸 거라고 예상한 업자들이 작년 12월부터 몰려와 하우스 한 동(약 495㎡)에 평상시보다 최고 2배 높은 가격인 300만원까지 쳐주겠다고 했다”며 “많이 심어도 전부 사주겠다고 하기에 계약했다”고 말했다.

탄중리 농민들이 작년 말 밭떼기 업자들에게서 받은 초기 계약금은 하우스 한 동당 평균 100만원 정도였다. 목돈을 쥐게 된 농민들로서는 잔금 200만원을 기대하며 너도나도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탈하게 끝났다. 올 봄 배춧값이 평상시보다도 더 떨어진 것이다. 도매가 기준 평년 정상가격은 포기당 2500~3000원 정도였다.

요즘 탄중리 주민들은 밭떼기 업자들과의 신경전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밭떼기 업자들이 배추를 수확해 가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계약금마저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밭떼기 업자와 계약했던 농민들 중에는 계약금 일부를 돌려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산군에서만 몇 년째 ‘배추 유통상인’으로 일하고 있다는 밭떼기 업자 최모(32)씨는 “주변 상인들 중에 농민들에게 줬던 계약금 중 3분의 2 이상을 돌려받은 사람도 있다”며 “잔금을 치르지 않은 상인들도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배춧값 폭락하자 되레 계약금 돌려달라

최씨는 자신도 농민들에게 준 계약금 중 10%만을 돌려받았다며 밭떼기 업자들 역시 손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그 역시 올해도 배추 시세가 좋을 것이란 주변 말만 믿고 3억원 가까이를 투자해 하우스 100동을 계약했지만 3000만원도 건지지 못했다. 계약금 중 10%를 돌려받은 것도 당초 계약에는 없는 조건이었지만 농민들이 ‘인심을 쓴 결과’라고 한다.

탄중리에서만 배추 하우스 6만6115㎡(2만평)를 계약했다는 유통상인 정모(67)씨도 사정은 비슷했다. “우리가 너무 손해를 보니까 농가에서 계약금 일부를 돌려줬죠. 300만원 중 30만원은 다시 받았습니다. 작물 수확에서 포장, 운반까지 다 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인건비하고 차비 쓰고 나면 적자죠. 농가에 웬만한 밭은 다 갈아엎으라고 이야기해 뒀습니다. 별 수 없잖습니까.”

농민들이 밭떼기 업자들에게 계약금 일부를 돌려주는 것은 단순히 인심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현재 구조에선 밭떼기 업자들이 갑(甲), 농민들이 을(乙)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1만명 정도가 활동하는 밭떼기 업자들은 대개 파종 전에 농가를 찾아와 ‘언제 작물을 사 가겠노라’고 통보를 하고 계약을 한다. 농가에서는 업자들의 말만 믿고 배추를 심는다. 그러나 계약이 대부분 구두로 이뤄지기 때문에 농민들은 약속 불이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작물을 수확해 가지 않아도 법적으로 따지기 힘들고 받은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해도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계약이 불합리하면 체결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다”고 농민들은 입을 모은다. 배추는 업자들 없이 출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우선 수확을 하려면 일손이 필요한데 농가에는 배추의 유통량을 감당할 노동력이 없다. 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손을 보태주었지만 정부 단속 이후 대부분 도망갔다. 다수가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상품가치가 있으려면 포장 역시 정성 들여 해야 하는데, 농사일에 바쁜 농민들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반면 밭떼기 업자들은 대부분 10명 정도의 전문일꾼과 팀을 이뤄 움직이기 때문에 이미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다. 농민들은 업자들과의 계약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계약을 한다. 업자들은 자신들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해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일부 업자는 배추를 수확하러 왔다가도 내키지 않으면 발걸음을 돌린다. 농가에서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일을 안하겠다” “내년부터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것이다.

복잡한 유통구조, 소비자들도 손해

밭떼기 업자들의 예상이 들어맞아 계약한 작물의 시세가 치솟으면 이익은 당연히 밭떼기 업자들에게 돌아간다. 탄중리 농민 이씨의 경우 지난 2009년 하우스 한 동당 100만원의 가격으로 양상추 밭떼기 계약을 체결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해 가을 양상추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상자당 8만원까지 가격이 치솟으면서 업자들은 하우스 한 동당 500만원을 벌었다. 5배 튀기기 장사를 한 것이다. 물론 수익은 고스란히 업자들이 차지했고 농민들은 당초 계약한 금액만 손에 쥐었다. 이씨는 “시세가 좋아서 자기들이 이익을 많이 남기면 그건 당연한 거라고 여긴다”며 “우리한테 더 준다거나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밭떼기 업자들과 농민과의 거래는 부담은 나누고 이익은 나누지 않는 특이한 계산법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소비자들도 손해다. 업자들의 손을 거친 배추는 유통상인-도매시장-중도매인-소매상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경로를 거치며 농협이 사들여 판매하는 배추보다 평균 30% 정도 비싸게 시장에 나온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의 한 관계자는 “농민들이 수확 전에 미리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밭떼기 계약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불확실성을 회피하고 대출이자의 부담도 줄일 수 있어 손해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밭떼기 계약을 체결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밭떼기 상인들이 상도의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들만을 탓할 순 없다”며 “농협이 계통출하(농어민이 협동조합을 통해 농수산물을 출하하는 것)를 제대로 못 해줘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탄영농조합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오근환(46)씨는 “올해 정부만 믿고 배추 수확을 늘렸는데 이렇게 됐다”며 “정부는 배추를 풀어야 할 때 풀지 않고 사들여야 할 때 사지 않는다”는 지적도 했다. “밭떼기 상인에게 당하고 정부에 속고…. 유통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농민들만 죽어나는 거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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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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