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외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에어컨 실외기. 내부의 열을 고스란히 외부로 내뿜는 기존 에어컨을 대체하는 새로운 냉방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높다.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건물 외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에어컨 실외기. 내부의 열을 고스란히 외부로 내뿜는 기존 에어컨을 대체하는 새로운 냉방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높다. ⓒphoto 김지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 7월 말 입주를 시작한 경기도 용인시 구성읍 LIG아파트 단지에는 특별한 실험이 진행 중인 40가구가 있다. 이들 집에 들어가면 천장 곳곳으로부터 바깥의 폭염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나온다. 언뜻 보면 기존의 에어컨 시스템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이곳의 찬 공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이대영 박사팀이 개발한 제습식 냉방 시스템, 이른바 ‘물 에어컨’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 에어컨은 냉매를 사용하는 기존 에어컨과는 작동 원리가 전혀 다르다. 기존 에어컨처럼 냉매를 압축하는 압축기나 건물 밖에 설치되는 실외기가 필요 없다. 기본 원리는 이렇다. 습기가 많고 온도가 높은 여름철 방안의 공기를 제습장치로 빨아들인다. 제습장치를 통과한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그물망 형태의 관(증발 냉각장치)을 통과할 때 관 위에 물을 뿌린다. 그러면 물이 증발하면서 주위의 열기를 빼앗아 관 속 공기의 온도가 급속히 떨어진다. 이 차가워진 공기를 실내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경우 슈퍼마켓 대형 냉장 진열대 등에 이와 비슷한 물 에어컨이 상용화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2010년까지 물 에어컨이 전체 에어컨시장의 35%를 점유할 수 있도록 그동안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해 왔다.

물 에어컨 40가구 시범설치

KIST가 개발한 한국형 물 에어컨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 한국지역난방공사에 따르면, 이 물 에어컨이 대규모로 상용화될 수 있는지 여부는 이번 여름을 지내고 오는 9월쯤 판가름날 전망이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산하 지역난방기술연구소 신재생냉방기술팀 김인배 과장은 “40가구에 시범 설치한 냉방 시스템을 가동하며 전기료와 냉방 효율성 등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9월 말쯤 결과가 나올 예정”이라며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이번에 물 에어컨을 시험 제작한 귀뚜라미보일러를 통해 제품을 대량 생산해 아파트 시공업체들이 설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과장은 “40가구만 시범 설치했기 때문에 대규모로 생산할 경우 제품 단가와 설치비 등은 아직 산정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4년 처음 선을 보인 KIST의 한국형 물 에어컨은 그동안 실험실에서 가동시켜본 결과로는 효율성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본 구조가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장치와 제습, 증발 장치 등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가동에 필요한 전력이 선풍기 한두 대를 돌리는 정도만 필요하다. 지역난방공사가 시험 가동 중인 물 에어컨은 제습 장치가 머금은 물을 말리는 데 난방수를 사용하기 대문에 전기를 더 절약할 수 있다. 지구 오존층을 파괴하는 온실가스 주범으로 평가받는 프레온가스라는 냉매와 실외기가 필요 없다는 것도 기본적인 장점이다. 또 제습이 기본적으로 해결되고 외부 공기를 일정 부분 흡입해 실내 공기와 섞기 때문에 환기 능력도 기존에어컨 보다 뛰어나다. 물 에어컨이 냉방기 시장의 10%만 점유해도 우리나라의 전력 예비율을 1% 높일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있다고 한다. 물 에어컨은 각 가구가 직접 바람 세기와 가동 시간을 조절할 수 있도록 가구별로 설치된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기존 에어컨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새로운 에어컨 기술은 과학자들과 가전업체의 구미를 당겨온 분야다. 이는 기존의 에어컨이 갖는 한계와 단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110년 전 개발한 원리 아직 사용

현재의 에어컨 시스템은 미국의 윌리스 캐리어(Carrier 1876∼1950)가 1902년 7월 발명했다. 캐리어는 코넬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지 1년밖에 안된 25세 때 에어컨을 발명했다. 발명은 우연찮은 동기로 이뤄졌다. 캐리어는 코넬대학 졸업 뒤 바로 뉴욕의 버펄로제철소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회사의 고객인 뉴욕의 한 인쇄소가 여름철이면 고온과 습기로 인쇄용지가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등 멋대로 변질돼 도무지 깨끗하게 인쇄를 할 수 없음을 고민하자 그것을 도와주려 한 것이 발명의 동기였다. 그는 뜨거운 증기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통과시키는 기존의 온방시스템 원리를 뒤집어 냉매를 채운 코일 사이로 공기를 낮추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난방 코일 속에 차가운 물을 통과시켜 코일 주위의 공기를 냉각함으로써 기온을 떨어뜨리고 습기를 제거한 것이다.

캐리어의 이러한 발상은 과학적 원리를 통해서도 설명된다. 열은 높은 온도의 물질에서 낮은 온도의 물질로 이동한다. 더운물과 찬물을 섞으면 미지근한 물이 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는 열이 더운물에서 찬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일 열의 이동을 반대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에어컨은 물질의 상태 변화를 이용해 열의 이동 방향을 반대로 바꾸는 기계다. 특히 에어컨에는 기화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손등에 알코올을 발라 놓거나, 한여름에 뜨겁게 달구어진 시멘트 마당에 물을 뿌리면 물이 금세 증발하면서 시원해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액체가 기체로 변화하면서 주위의 물체에서 열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액체가 기체로 바뀌기 위해서는 많은 열(에너지)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이 상태 변화를 일으킬 때 생기는 온도와 압력의 변화를 이용하는 것이 바로 에어컨의 원리다.

에어컨의 순환 사이클을 보자. 에어컨 안에는 냉매라는 액체가 들어 있다. 냉매는 ‘시원하게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물질’이란 뜻이다. 모터에서 압축된 액체 상태의 냉매(프레온)가 실내로 들어가 실내기 내부 증발기를 지나면서 증발해 급속하게 기체로 변한다. 이때 주위에 있는 열을 끌어들여 차갑게 만든다. 그리고 증발기 뒤쪽에서 팬(FAN)이 회전하면 찬바람이 나와 실내의 온도를 내린다. 반대로 실내기에서 증발하여 기체로 된 프레온이 압축기를 지날 때는 압축되면서 열을 내놓고, 열 교환 파이프인 응축기를 통과하면서 다시 액체로 변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에어컨은 돌아간다.

캐리어는 1915년 동료 6명과 함께 캐리어엔지니어링이라는 에어컨 회사를 설립해 직접 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에 에어컨은 산업 현장에서 주로 쓰이다 1920년대 들어 백화점, 극장에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냉방장치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등장은 냉방의 차원을 넘어 현대 문명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각종 의약품과 화학약품의 생산, 우주비행사의 달나라 여행, 개폐 창문이 없는 유리 건축물, 사막지역 개발, 박물관의 예술품 보관 등은 에어컨이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프레온가스 대체할 새로운 냉매 찾아라

KIST 이대영 박사팀이 개발한 제습 냉방기.
KIST 이대영 박사팀이 개발한 제습 냉방기.

하지만 이러한 에어컨은 역설과 이기의 발명품이기도 하다. 일단 에어컨은 실내의 열을 빼앗아 고스란히 외부로 뿜어낸다. 기체 상태의 냉매가 액체로 변하면서 내는 열이 실외기를 통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밖은 안의 열까지 더해져 더 덥게 된다. 요즘 같은 폭염을 떠올리면 나만 시원하자고 에어컨을 틀수록 바깥은 더 더워지고, 이 때문에 에어컨을 더 틀 수밖에 없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에어컨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가스는 대표적인 온실가스의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프레온이 일단 공기 중에 방출되면 400년 이상 분해되지 않고 열을 흡수해 오존층을 파괴하므로 온실가스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일단 기존의 프레온가스를 대체할 새로운 냉매 개발에 매달려 왔다. 냉매는 액체에서 기체로 기화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기화될 수 있게 끓는점이 적절하게 낮아야 한다. 또 냉매로 사용될 때 폭발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가연성과 독성도 없어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제조비용이 너무 비싸도 안 된다. 염소는 가연성이 없고 반응성이 적절히 낮으며 가격도 적당한 편이지만 독성이 있고 끓는점이 높다. 탄소에 수소가 결합한 화합물은 독성과 가격 면에서는 유리하고 끓는점도 낮다. 하지만 가연성이 있는 게 문제다. 불소로 불리는 플루오르는 적절한 끓는점을 갖고 독성과 가연성이 없으나 반응성이 너무 낮고 가격이 비싸다. 이에 비하면 이산화탄소는 불이 날 염려도 없고 쉽게 구할 수 있어 천연냉매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을 중심으로 이산화탄소 냉매 에어컨 개발이 한창이다. 이산화탄소를 사용한 냉매가 프레온과 비슷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압력을 120기압까지 올려야 하는데, 이 기술이 관건으로 알려져 있다.

지열 활용한 냉난방 시스템 연구도

냉매를 사용하지 않고 ‘열전모듈’이라는 반도체를 사용한 에어컨도 개발 중에 있다. 열전모듈은 전류를 흘리면 한쪽은 냉각되고 반대쪽은 가열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공기를 통과시켜 기온을 낮추자는 것이다. 열전모듈 에어컨은 연세대 원주캠퍼스 박영우 교수(물리학)팀이 지난 2008년부터 국책과제로 개발 중이다. 박 교수는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열전모듈 에어컨은 일단 차량용으로 개발되고 있는데 오는 9월 말쯤 선보일 예정”이라며 “열전모듈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반도체다. 양쪽 표면의 온도차가 기존의 64도에서 79도로 높아지는 등 효율성이 개선되고 있다. 특히 전기자동차 시대가 되면 구조가 복잡한 컴퓨레셔를 사용하는 기존 에어컨 대신 구조가 간단한 열전모듈 에어컨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에어컨에서 발생되는 열을 활용해 전기료를 낮추는 에어컨도 개발돼 있다. 실내 열을 내보내는 에어컨의 실외기 주변 공기의 온도는 한여름에 50∼60도까지 올라가는데, 이를 그냥 실외로 내뿜는 게 아니라 파이프를 통해 열을 땅속으로 보내는 방식이다. 우리나라 땅속 100∼200m의 온도는 사시사철 평균 10∼15도를 유지한다. 여름에 30도를 웃도는 공기 중에 열을 내보내는 것보다 ‘시원한’ 땅 속에 열을 배출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에 전력 소모가 크게 줄어든다. 기존 에어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의 30∼50%만 있으면 충분히 냉방이 가능하다. 땅 속으로 배출하는 열도 그냥 버리는 게 아니다. 열 저장 설비를 만들어 이를 보관했다가 추운 겨울에는 이를 다시 꺼내 난방에 활용한다. 이처럼 지열을 활용한 냉난방 시스템은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설치돼 그 효율성이 이미 입증됐고, 대형 건물 등을 중심으로 설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반 가정도 연간 신규 주택건설 물량 30만호의 일정 비율을 이같은 지열 활용 냉난방 시스템으로 건설하도록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는 인버터 절전형이 인기

미국의 과학자들은 최근 멤스(MEMS) 기술을 이용해 ‘입는 에어컨’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입는 에어컨’은 손톱 크기의 에어컨 시스템을 만들어 옷에 단다는 개념으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첨단 기술이다. ‘입는 에어컨’의 핵심은 열교환기, 압축기 등 에어컨에 들어가는 모든 장치를 마이크로 크기로 줄이는 것이다. 최근 기체 냉매를 압축해 이송시키는 마이크로 압축기 등이 개발돼 있는 상태이다.

공기를 압축한 다음 갑자기 팽창시키면 온도가 낮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냉방방식도 몇몇 국내 기업체가 개발하고 있다. 비행기에서 엔진을 가동하기 위해 만든 압축공기 중 일부를 객실로 보내 냉방하는 것이 이같은 방식의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 방식은 효율성이 떨어져 아직 가정용 에어컨으로는 개발되지 못하고 급속 냉각이 필요한 소규모 시설 등에만 활용되고 있다.

요즘에는 냉방 능력은 그대로 둔 채 소비전력을 대폭 낮춘 인버터 절전형 에어컨이 인기다. 기존 에어컨은 설정 온도에 맞게 실내 온도를 유지하려고 압축기를 끄고 켜면서 온도를 조절한다. 하지만 압축기를 껐다 다시 켤 때 전력 소모가 심하다는 게 흠으로 지적돼 왔다. 하지만 최근 개발된 인버터 방식은 실내 온도에 따라 압축기 회전 속도만을 자동 조절해 전력 소비량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연간 전기료가 기존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번 여름 폭염 속 전기료를 걱정하는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이 인버터 에어컨이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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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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