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론’을 쓴 즈음의 이어령(왼쪽)과 경성고등공업학교 미술부 시절의 이상.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 있다. 미술부 화실에서 찍은 이상의 이 사진은 이어령이 발굴한 것이다. ⓒphoto 영인문학관
‘이상론’을 쓴 즈음의 이어령(왼쪽)과 경성고등공업학교 미술부 시절의 이상.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닮아 있다. 미술부 화실에서 찍은 이상의 이 사진은 이어령이 발굴한 것이다. ⓒphoto 영인문학관

“창조의 반대말이 뭔지 알아요? 파괴지.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 같은 거여. 경제학자 슘페터가 쓴 ‘창조적 파괴’라는 표현이 딱이지. 창조를 하려면 먼저 파괴를 해야 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창조적 파괴라는 모순어법이지. 우리는 모순어법을 많이 쓰는 민족인데, 창조적 파괴는 잘 못해. ‘좋아서 죽겠다’는 민족이잖아.(웃음)”

창조와 파괴. 이어령은 여섯 번째 연재에서 창조와 파괴라는 두 톱니바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창조’와 ‘파괴’는 늘 붙어 다니지만 동시에 작용할 수 없다. 늘 시간 차를 두고 나타난다. 순서는 파괴가 먼저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파괴해야 한다. 이어령의 생애는 창조와 파괴의 연속이었다. 그는 “파괴가 창조로 통하는 것”이라며 “창조의 이력서는 곧 파괴의 이력서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어령의 공식 이력서는 대부분 ‘우상의 파괴’에서 시작한다. ‘22세에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던짐’ 같은 식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일보 문화면 전면에 실린 이 글을 통해 이어령은 일약 스타가 됐다. ‘우상의 파괴’는 젊은 세대 기수론을 담은 일종의 선언문이다. 이어령은 이 글에서 인습의 벽에 갇혀 시대의식을 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매몰된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했다. 당시 문화권력의 정점(頂点)에 있는 김동리는 물론 이런 문단의 풍조를 맹종하는 젊은이들까지 비판의 대상이었다. ‘붓 깡패’라는 별명은 이즈음 생겨났다.

더벅머리 이상 사진, 이어령이 발굴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우상의 파괴’지만 이보다 먼저 창조가 있었다. 한국 문단에 있어 우상의 파괴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한 창조다. 바로 작가 이상(李箱·본명 김해경·1910~1937)의 문학적 진면목을 널리 알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상은 별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저 난해한 작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글을 쓰는 작가 정도로만 치부됐다. 이어령이 대학교 4학년 때 서울대 문리대학보에 발표한 ‘이상론-순수의식의 뇌옥(牢獄)과 그 파벽(破壁)’이라는 평론은 이상을 다시 보게 한 계기가 됐다. 정식 평론가가 아닌 대학생의 글이었지만 이 평론은 문단에서 널리 읽혔다. 딱딱한 논문 투가 아니라 시적인 문체로 쓴 이어령의 글은, 접근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벽의 높이를 확 낮췄다.

널리 알려진 더벅머리 이상의 사진 또한 이어령이 찾아낸 것이다. 이어령은 문학사상 주간 시절, 이상이 다닌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의 지인(원용석 전 장관)을 찾아가 졸업앨범에서 이상의 사진을 찾아냈다. 또 이어령은 묻혀 있던 이상의 작품 상당수를 발굴해 문학사상에 실었다. 당시 이상은 일본어로 써 놓고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 많았다. 만약 이어령이 이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이상이라는 작가의 상당 부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 영영 묻혀버렸을 것이다. 훗날 이어령은 이상문학상을 제정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힌다.

이어령은 이상에 대해 “동시대적 감각으로 나에게 감동을 준 최초의 작가”라고 표현했다. “기존 소설가들은 농경시대의 농촌을 기반으로 글을 썼어요. 이상만 그 틈에서 미운 오리새끼처럼 자신이 숨 쉬고 살아가는 도시문명을 그리고 그 갈등과 자의식을 각혈하듯이 토해낸 것이에요. 평균 체온을 넘어서는 문명의 미열, 그리고 그것을 냉각시키는 얼음찜질. 이 사이에서 한국말의 토착어가 문명어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 이상의 소설 ‘날개’에는 ‘33번지 18가구’라는 숫자부터 나와요. ‘내 집’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33번지 18가구는 연립주택처럼 한 지붕 밑에 18개의 가구가 이어진 방들에서 사는 거지. 당시 일본말로는 ‘나가야’라고 했어. 도시문명의 시스템과 그 의식과 감각을 불과 네 개의 숫자와 네 글자의 말로 보여준 거예요. 더구나 18이라는 숫자는 ‘흡사 유곽처럼 생긴’에서 암시하듯 성적 비속어를 함의하고 있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어때요?”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답을 듣기 전에 말을 이었다. “다른 작가들은 당시 유행하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의 유행가 세계에서 살고 있었지만 이상은 달랐어요. 도시의 문패와 번지수로 설명되는 자아를 노래하고 있었지.”

당시 한국은 문명사의 전환점에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문턱이었다. 농촌이 도시가 되는 크나큰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이어령은 이를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벗겨내는 모던(근대) 체험”이라고 했다. 한국 대부분의 작가는 이런 시대의식을 외면한 채 여전히 농경시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이어령의 말이다. 하지만 이상은 달랐다. 짙푸른 녹음 천지인 세상을 보면서 다른 작가들이 전원 예찬을 할 때, 이상은 권태를 느꼈다. 팔공산에 곰이 나타났다고 하면 동물원에서 탈출한 곰을 먼저 연상했고, 여치 울음소리를 이발소의 가위 소리나 검표원이 차표 찍는 소리에 비유한다.

이상은 이어령에게 글을 쓰게 했다. 그는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에서 느끼던 경이를 이상의 작품에서 처음 느꼈다”며 이렇게 말했다. “눈이 번쩍 뜨였지. ‘우리 말로도 이렇게 아름답고 지적인 작품을 쓸 수 있구나’ 하고 깨달은 거여. 이상이 없었다면 한국말로 글을 쓴다는 자체에 절망했을 거예요.”

이상은 천리마, 이어령은 백락

이상의 기행(奇行) 또한 그의 평가를 절하시키는 데 한몫했다. 이어령은 이상의 소개팅 관련 일화를 들려줬다. 이상은 머리도 잘 안 감고, 잘 씻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다방에서 여자와 미팅을 하는데 이상이 흰 각설탕을 손으로 집었더니 그게 흑설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상은 탈옥수란 말야.” 이상이 탈옥수라니. 일본 도쿄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한국인)으로 몰려 경찰에 연행된 이상의 이력을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어령의 설명에 또 한 번 기가 찼다. “무슨 말인지 알겄어요? 우리도 모르게 갇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인습의 감옥에서 탈주한 위험한 탈옥수란 말이에요.”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유교적 전통이 서슬 퍼런 세상에서 이상은 성(姓)까지 갈았다. 이상이 깬 고정관념의 틀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파격적이다.

그래서 이어령의 첫 이상론(李箱論)의 부제는 ‘순수의식의 뇌옥과 그 파벽’이다. 그는 “이상은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이자 미드(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와 같은 존재”라며 웃었다. 반세기도 전에 22세의 청년은 그런 장면을 떠올리며 이상론을 쓴 것이다. 모범생 젊은이들이 꿈꾸는 이상(理想)과는 전연 다른 이상(異常).

한 청년이 더 이상(以上) 상상할 수 없는 이상(李箱)을 재창조해 낸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그래서 물었다. “이상이 80세가 넘도록 살았다면 선생님 같은 글을 남겼을까요?” 하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상은 천리마이고 나는 그 천리마를 알아본 백락에 불과해.”

백락(伯樂). 천리마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중국 춘추시대 사람으로, 인재를 감별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백락은 어느 날 농부가 부리는 소금 짐을 끌며 지나가는 천리마를 보고 크게 탄식하며 자신이 입은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고 한다. 천리마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크게 울었다. 천리의 초원을 달렸어야 할 귀중한 천리마에게 소금 짐을 끌리며 매질을 하는 세상. 그 세상에 대한 탄복이 이어령의 눈빛에서 읽혔다.

“세종대왕의 숱한 업적 중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어요. 노비나 다름 없는 장영실을 발굴해서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지. 지쳐서 자고 있는 장영실에게 어의(御衣)까지 벗어서 덮어준 일화는 백락과 천리마의 한국 버전이에요.”

그는 “우리 모두가 창조자가 될 수는 없다”며 창조론을 폈다. “창조인은 기르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거예요. 창조자를 알아보는 세상, 그것이 바로 창조적 세계지.”

이어령은 지난 수십 년간 숱한 천리마들을 발굴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이어령의 창조 이력서’에서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서울대 문리대학보에 실린 이어령의 ‘이상론-순수의식의 뇌옥과 그 파벽’(왼쪽·1955년 9월)과 한국일보 문화부 전면에 실린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1956년 5월 6일자). 문리대학보 표지에 고딕체로 표기한 ‘작가론’이 이어령의 ‘이상론’이다. ⓒphoto 영인문학관·한국일보
서울대 문리대학보에 실린 이어령의 ‘이상론-순수의식의 뇌옥과 그 파벽’(왼쪽·1955년 9월)과 한국일보 문화부 전면에 실린 이어령의 ‘우상의 파괴’(1956년 5월 6일자). 문리대학보 표지에 고딕체로 표기한 ‘작가론’이 이어령의 ‘이상론’이다. ⓒphoto 영인문학관·한국일보

이어령이 비평가가 된 이유

그런데 이어령은 왜 이상처럼 시와 소설을 쓰지 않고 평론가로 데뷔했을까? 정면돌파식 질문에 이어령은 “허허” 하고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말야” 하며 겸연쩍은 듯 말을 이었다. “처음엔 시를 썼지. 그런데 친구들이 보고는 ‘야, 이게 무슨 시야. 소설이지’ 하는 거야. ‘그러면 소설을 써보자’ 해서 썼더니 이번에는 ‘야, 이게 무슨 소설이야. 평론이지’ 하더라고. ‘그러면 비평을 써보자’ 해서 쓴 것이 ‘이상론(李箱論)’이었지.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그래서 평론가가 되려고 작심한 거예요.”

이어령의 이상론은 계속됐다. 1956년 ‘나르시스의 학살-이상의 시와 그 난해성’을 ‘신세계’에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같은 제목의 평론 속편을 ‘자유문학’에 발표했다. 1959년에는 ‘이상의 소설과 기교-‘실화’와 ‘날개’를 중심으로’를 ‘문예’지에 두 차례에 걸쳐 실었다. 그는 이상의 문학을 재창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종래의 이상 비평들을 여지없이 난도질했다. “비평은 문학의 재창조이자 기존 비평들을 난도질하는 파괴 행위예요. 비평가의 진짜 도구는 펜이 아니라 망치야. 자기 자신과 자유로운 문학적 상상력을 숨막히게 가두고 있는 벽을 부수는 망치질부터 시작하는 거지.”

이상은 당시 기성 문단의 대척점에 있었다.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였다. 오리들 틈에 낀 한 마리의 백조. 이어령은 이 백조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조를 묻어버리려는 오리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쓴 것이 바로 ‘우상의 파괴’였다.

“문단 권력이 있는데, 이상 같은 사람이 신춘문예 같은 데 당선을 할 수 있겄어? 우상을 파괴하지 않으면 이상은 발굴될 수 없어. 인습의 벽, 우상의 벽, 낡은 시대의 성벽을 깨부숴야 했어요. 그걸 부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지. 우상의 파괴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문단을 친 글이었지. 이상에 대한 애정이 우상의 파괴로 이어진 거예요.”

‘우상의 파괴’는 파괴와 창조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인습의 벽에 갇힌 기성 문단을 ‘파괴’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새 시대의 새 가치를 담자는 ‘창조’의 의미도 있다. 이어령은 이에 대해 “한 손에는 곡괭이를, 한 손에는 씨를 뿌렸다”고 표현했다. 창조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견고한 땅을 파헤치는 곡괭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유산 상속자가 아니에요. 화전민 같았지. 화전민은 불을 지르지 않고는 곡식의 씨를 뿌릴 수 없어. 불을 질러서 태운 재 속에 씨를 뿌려야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어령이 전통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부수고자 했던 건 고정불변의 전통에 갇혀 새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시대적 풍조였다. “당시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저 멀리 가나안의 땅이 보여요. 그곳에 가야 해.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재단을 차려놓고 움직이질 않아. 김동리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그 예지. ‘역마’나 ‘황토기’ 같은 소설 말이에요. 전쟁터에 나가서 죽어 나가고, 근대의 도시적 요소가 밀려오는데 과연 그들의 언어가 시대를 담았느냐는 거지. 젊은 세대에는 젊은 세대의 언어와 문법이 필요하다는 얘기예요.”

기성 문단을 향한 날선 비판과 동시에 그는 젊은 세대를 향해 창조의 기치를 내세우자고 선언했다. “김동리나 서정주의 글이 좋다 나쁘다를 평한 게 아니에요. 그들의 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건 김동리나 서정주의 작품으로 끝나. 우리는 두 사람의 김동리, 두 사람의 서정주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지. ‘우상의 파괴’는 우상이 아니라 우상을 믿는 사람의 어리석은 믿음을 파괴하자는 것이었어요. 문단 원로들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그분들을 우상으로 섬기는 내 또래의 젊은이들을 향해 던진 불화살이었지.”

우상의 파괴, 그 후…

‘우상의 파괴’ 발표는 서울대 재학 시절 문리대학보에 이상론을 발표한 지 8개월 뒤의 일이다. 그의 이상론은 문단과 학계에 큰 화제가 됐고 그의 이름도 문단에 꽤 알려졌다. 또 그는 우상의 파괴 전부터 이미 ‘기성 문인 킬러’로 정평이 나 있었다. 대학에 명사 초청 강연을 시켜놓고 그들의 허위의 가면과 권위의 옷을 벗기곤 했다. 부산 피란민 시절에는 시인 조향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이야기를 했다가 그의 질문에 진땀을 흘리며 퇴장한 일화가 있다. 서울 수복 뒤에는 그가 국보를 자처하는 양주동 박사를 비롯해 조연현, 김팔봉, 백철 등 쟁쟁한 비평의 대가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어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양주동 박사가 두보의 시 ‘나그네 조으름이 어찌 일찍부터 오리오(客睡 何曾着)’를 잘못 해석했다가 이어령에게 공격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의문 나는 것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던 그다. 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심술로 골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런 일화들은 1956년 5월 6일자 한국일보 문화면을 통해 터져나온 ‘우상의 파괴’의 전주곡이었다. 이어령은 ‘우상의 파괴’를 싣게 된 뒷얘기를 들려줬다. 김규동의 시집 ‘나비와 광장’ 출판기념회 자리에서였다. “독자를 대표해 한마디 하라”는 선배들의 요청에 이어령은 덕담 대신 독침을 날렸다. 이 이야기는 문화계 인사들에게 퍼져나갔고,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이었던 한운사(韓雲史)씨의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한씨는 이어령에게 기고 제안을 했고, 문화면 전면에 그의 글을 파격적으로 전재하게 된다.

“당시 반응이 어떠셨냐?”는 질문에 이어령은 멋쩍게 답했다. “시인 바이런이 ‘자고 나니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고 한 말이 실감났지. 그 다음 날 다방에 갔더니 내가 저명인사가 돼 있더라고. 내가 이어령인지도 모르고 ‘신문 읽었어?’ ‘이어령이 누구야?’ ‘아, 그 젊은 친구?’ 한마디씩 해. 시인 노천명은 수호자가 되겠다고 제안을 해 왔어요. 집에까지 초대해 음식 대접을 해 주고. 노천명뿐 아니라 사방에서 원군이 나타났지.”

창조와 파괴의 두 바퀴는 잘 굴러갔는가. 장영실이 만든 어가(御駕)의 바퀴대는 부러져 그는 소식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어령이 이끄는 창조와 파괴의 두 수레바퀴는 아직도 건재하다. 이 수레바퀴가 소금 짐수레를 끄는 천리마인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무수한 고개를 넘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작은 기적이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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