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잔류 택하는 낙천 비명계들
4·10 총선을 앞둔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과정은 여느 때보다 잡음이 컸고 계파 간 양극화 현상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혹평을 낳으며 유권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재명 사당화’라는 당 안팎의 비판 여론이 거세게 형성됐지만 민주당의 공천은 한결같았다. 친문으로 분류되거나 비명으로 낙인찍힌 현역 의원들이 하나같이 하위 평가 명단에 포함됐고, 이들 대부분은 결국 합산 점수를 감산하는 핸디캡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경선에서 탈락했다.
공천 결과에 반발하며 당을 떠난 현역 의원들은 이낙연 전 대표와 비명계를 중심으로 모인 민주연대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만든 조국혁신당 합류를 선택했다. 민주당과 뿌리를 함께하고 있는 이 두 신당에 입당하는 것은 민주당 출신으로서 진보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민주당 이재명 지도부에 대해 각을 세운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예상만큼 큰 이동은 일어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당에 잔류를 선택하거나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제3지대행이 별 볼 일 없다는 내부 시선이 강해졌고,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선거대책위원회 합류, 친문 핵심 인사인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잔류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박광온·양기대 등 민주당 잔류
낙천한 친문계 의원 중 거취가 주목받았던 인물은 이재명 대표와 한때 민주당 지도부를 이끌었던 박광온 의원이다. 원내대표를 지냈던 박 의원이었지만 그의 지역구인 수원 영통구는 2인 경선 지역으로 분류돼 불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박 의원은 경선에서 패배한 뒤 자신이 하위 평가 20%였다는 충격적인 고백도 털어놨다.
박 의원은 지난 3월 7일 기자회견을 열고 공천 탈락의 소회를 밝히면서 “합당한 결정이 아니더라도 그 결정을 존중했다”면서 “제가 묵묵히 감내하는 것이 민주당의 총선 승리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여겼다. 총선은 통합해야 이기고, 분열하면 패배한다. 어떻게든 당의 통합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의 견고한 통합과 담대한 변화를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을 찾겠다”면서 민주당 잔류 의사를 밝혔다.
박 의원은 지난 3월 10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한 뒤 민주당의 통합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더 다졌다. 원내 친문 좌장으로 평가받는 홍영표 의원이 당의 컷오프 결정 뒤 문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탈당을 단행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같은 날 비명계인 양기대·이장섭·이동주·권인숙 의원도 경선에서 탈락했고, 3월 12일엔 송갑석 의원과 친문계 도종환 의원이 고배를 마셨다.
이 중 양기대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대한민국과 광명시의 발전,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늘 함께하겠다”며 역시 탈당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양 의원은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해 이재명 당시 후보와 경합을 벌인 바 있다.
한편 지난 1월 탈당을 예고했다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던 윤영찬 의원은 경선 탈락 이후 별다른 입장을 내놓고 있지 않다. 당초 대표적 친이낙연계로 분류됐던 윤 의원이 김종민 의원 등과 함께 새로운미래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탈당을 예고했던 지난 1월 10일 윤 의원은 입장을 급선회했었다.
임종석 잔류, 김부겸 선대위 합류가 영향
한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낙천계 의원들이 잔류를 선택하고 있는 분위기에 대해 “일단 지켜보자는 입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내부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탈당해봤자 어차피 답이 없다”면서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제3지대행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나타냈다. 이 관계자는 “다들 자중하는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다”며 “일단 민주당이 이기고 보자”면서 기다림을 선택한 것 같다는 평가도 내놨다.
이런 분위기에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결심’이 한몫하고 있는 분위기다. 앞서 핵심 친문 인사인 임 전 실장의 공천 배제는 민주당 내홍을 격화시키는 불쏘시개가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변인을 맡았던 핵심 참모 출신의 고민정 의원은 임 전 실장이 최종적으로 공천 배제되자 최고위원직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 전 실장 역시 결국 당을 나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국무총리 출신인 이낙연 전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음에도 임 전 실장은 민주당을 선택했다. 이 둘의 연대가 이뤄졌다면 친문 세력들의 재결집이 가능했지만 결국 각자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낙천계들의 선택도 민주당을 나가느냐, 민주당에 남느냐로 나뉘고 있다.
게다가 김부겸 전 총리가 고사할 것 같았던 상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나서면서 잔류 분위기는 더 확실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당 내부에선 “김부겸, 임종석 등 친문 선봉장들이 민주당을 지킨다고 한 마당에 탈당을 선택하는 건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일단 기다리며 추후 도모할 일을 벼르고 있는 것”이라며 “당내에서 총선에서 민주당이 질 것 같다던 말이 심심찮게 나왔었지만 요새는 조용해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조국과 이낙연의 엇갈린 운명
이런 상황에서 대전 중구 현역인 황운하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한 뒤 조국혁신당에 합류했다. 지역에선 “자객공천이라는 말이 일찌감치 나오면서 황 의원이 먼저 탈당을 선택했다”는 후문이 파다하다. 황 의원은 조국혁신당 비례대표로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당은 바꿨지만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하진 않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황 의원이 민주당과의 연대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조국혁신당에서 살아남아 총선 이후 두 당이 합당하면 다시 민주당으로 복귀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조국혁신당은 제3지대 중 지지율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 심판’이라는 외침이 선명하다는 평가 덕분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준석의 개혁신당과 이낙연의 새로운미래를 지지율에서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조국혁신당을 바라보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낙천계’의 추가 동참이 이뤄질지는 지켜볼 대목이다.
반면 새로운미래는 민주당의 공천 내홍에도 불구하고 부진한 모습이다.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미래와 민주연대를 결성하겠다던 설훈 의원이 지난 3월 13일 갑작스레 무소속 출마를 공식화한 것이 새로운미래에는 돌발변수로 받아들여졌다. 설 의원은 이날 한 언론사와 통화에서 “새로운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나가야 당선이 된다고 판단했다”며 “주변에서 만류한 끝에 한 결심”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새로운미래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극소수”라며 “탈당 결단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설 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부천을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예정이다.
설 의원은 당초 민주당을 탈당한 뒤 당 밖에서 탈당계 의원들을 모아 함께 새로운미래에 입당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특히 민주당 탈당 후 곧바로 새로운미래에 입당한 박영순·홍영표 의원과 민주연대를 결성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조국혁신당의 기세가 강해지고 새로운미래에 대한 호응도가 시들해지자 입장을 바꾼 셈이다. 설 의원의 이탈을 계기로 새로운미래가 앞으로 이렇다 할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