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으로 돌아가자”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을 가다
지난 3월 말 수난절과 부활절 기간에 종교개혁의 현장인 독일 비텐베르크를 두 번이나 방문한 것은 행운이었다. 두 번 모두 숙소가 있는 라이프치히에서 하얀색 ICE(독일 고속열차)를 탔다. 대평원을 백마처럼 달려 30여분 만에 비텐베르크에 도착했다. 사실 종교개혁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1483~1546)가 태어난 아이스레벤, 대학 공부와 수도사 생활을 했던 에르푸르트,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비텐베르크, 그리고 10개월 동안 선의로 납치당해 머물렀던 바르트부르크성(城)이 있는 아이제나흐 등은 서로 차로 한두 시간 거리에 있으며 대평원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열풍이 왜 빨리 독일 전역으로, 유럽으로 퍼졌는지 이해가 되었다.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1517년 10월 31일 당시에는 2000여명이 살았고 지금은 4만7000여명이 산다지만, 도시라고 부르기엔 어색할 정도로 아담하다. 기차 역에는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란 팻말이 외부 손님을 반겼다.
2017년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이 비텐베르크를 찾아왔다. 모든 숙소는 동나고 레스토랑은 인산인해였다. 당시 모든 리모델링 작업을 끝내서인지 지금 비텐베르크는 확연하게 깔끔하고 단정해졌다.
비텐베르크는 루터가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사제로 부임하면서 살기 시작했고, 1517년 종교개혁을 시작한 뒤 다소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525년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뒤 1546년 죽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비텐베르크의 입구에는 바로 루터가 살았던 루터하우스가 있다. 널찍한 마당에는 루터와 1525년 6월 13일 결혼한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이 방문객을 응대하고 있다. 원래 수녀였다가 억압적인 수도원 생활에서 탈출한 그녀는 26세에 자신보다 16살이나 많은 루터와 결혼했다. 신부와 수녀의 결혼이라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카타리나는 라틴어에 능통하여 루터의 저작을 직접 읽고 개신교 신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여성 종교개혁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히 6명의 자녀는 물론, 조카들까지 매일 챙겨 주었다. 집에서는 농사와 양돈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이 상당했던 시절, 루터는 그런 아내를 ‘비텐베르크의 샛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루터가 당초 원했던 건 진지한 신학 토론
비텐베르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 논제(Theses)를 붙였던 성채(城砦)교회(Schlosskirche)다. 당초 루터가 원했던 것은 거창한 종교개혁이 아니라 진지한 신학 토론이었다. 그러나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루터의 행동은 유럽과 북미와 아시아까지 뒤흔드는 격랑의 시작이었다. 성채교회의 둥근 탑에는 루터가 작사·작곡한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성채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시장 광장이 나오고, 거기에는 루터와 동역자인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시장 광장에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시립(市立)교회(Stadtkirche)가 나온다. 성채교회와 시립교회는 종교개혁의 양대 산맥이라고 불린다. 지금 형태의 개신교 예배를 독일어로 처음 드렸고, 루터는 평생 설교의 절반 이상을 시립교회에서 했다. 물론 결혼식도 여기에서 치렀다. 시립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수많은 의식 중에서 고해성사(告解聖事)처럼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빼고 성만찬과 세례, 2개만을 시행했다. 교회보다 성경을 더 위에 놓았고, 의식보다는 말씀을 중시했다.
시립교회의 제단에는 루터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루카스 크라나흐(1472~1553)가 그린 4개의 성화(聖畵)가 놓여 있다. 그 4개 그림에 개신교 교리가 압축되어 있다고 한다. 가령 상단 왼쪽에는 성직자가 아닌데도 유아세례를 베푸는 멜란히톤의 모습이, 가운데는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과는 달리 평등을 의미하는 원탁이 그려져 있고 루터 자신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루터는 1520년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이란 논문을 통해 만인제사장주의를 본격 설파했다. 모든 성도는 동등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직자가 우대받고, 귀족과 천민이 존재하던 시대여서 혁명과도 같은 메시지였다.
자본주의의 사상적 토대 마련한 종교개혁
흔히 루터의 종교개혁을 영어로는 ‘The Reformation’이라고 한다. 그냥 ‘개혁’이란 뜻이다. 루터에게 종교개혁이란 무슨 새 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기 4세기부터 로마의 국교로 편입된 뒤 권력과 제도의 색깔로 오염된 기독교를 초대교회로 되돌리자는 운동이었다. 이런 의미 외에도 종교개혁은 민주주의를 일깨우고 남녀평등 사상을 확산시키며 시민사회를 각성시켰다. 루터가 강조한 만인제사장주의와 직업소명론은 누구나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엄숙한 그레고리안 성가에 머물러 있고 회중은 입을 다물고 있던 전통 예배에서 탈피, 오늘날 찬송가와 같은 코랄(Choral)을 널리 확산시켜 음악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전통과 권위에 눌려 있던 중세를 무너뜨리고 서구 근대세계를 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그래서 비텐베르크를 찬찬히 둘러보며 무슨 시사점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첫째 시사점은, 개혁이란 무슨 새로운 걸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근원과 본질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점이다. 루터는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인문주의자들의 지혜를 모토로 삼았다. 누구나 보아야 할 근원이자 본질인 성경은 당시 라틴어로만 출간되어 극소수 식자층을 제외하면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교황청이 그렇다고 하면 늘 그런 줄 알았다.
당시 역대 교황 중 가장 사치스러웠다는 레오 10세는 성(聖)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위해 한동안 덮어두었던 면죄부(면벌부라고도 불림)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면죄부를 구입하면 유아세례를 받을 당시의 순진한 상태로 되돌아 가며, 연옥의 모든 고통을 면죄받을 수 있다고 교황은 밝혔다. 특히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독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황제 선거 자격을 갖춘 제후)의 아들로 1514년 23세에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교구(敎區) 확장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가인 푸거 가문에서 거액을 빌렸다. 교황이 그에게 면죄부 판매 권한을 주자 판매 수익의 일부는 교황에게 상납하고, 일부는 푸거 가문에 갚았다. 알브레히트는 고리대금업도 서슴지 않으면서 “연옥의 사자(死者)들을 대신해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했다. 그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요하네스 테첼을 마케팅 책임자로 임명했다. 테첼은 교황의 근위병까지 대동하고 마을을 다니면서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뱉었다. “땡그랑 하고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에 연옥에 있던 영혼이 천국으로 뛰어오른다.” 테첼은 강도를 높였다. “한 사람이 성모 마리아와 간음을 했다 하더라도, 나의 면죄부들 중에 하나가 속량해 줄 것이다.” 선을 넘는 막말을 들은 루터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성경 어디에도 없는 내용을 교황부터 테첼까지 진리인 양 내뱉는 시스템이 문제라고 판단했다.
루터는 대학 강의를 통해 면죄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라틴어로 된 95개 논제를 작성하여 성채교회 정문에 붙였다. 이 문은 원래 목재였으나 1706년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858년 프로이센의 프리드히리 빌헬름 4세가 불이 나도 거뜬하도록 청동 양각으로 새겼다.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
김재성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95개 논제의 원제목은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다. 루터는 8가지 주제를 반복하면서 예리한 분석과 비판을 가했다. 가령 진정한 회개와 고해성사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조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고, 그분은 신자들의 전 생애에서 회개가 지속되기를 원하셨다”라며 “이 말씀은 고해성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고해성사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95개 논제의 중반부는 테첼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터는 27조에서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28조에서는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고 잘라 말했다. 루터는 32조에서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루터의 95개 논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이 확산되던 시점에 맞추어 보름 만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신성로마제국 곳곳으로 퍼졌다. 이윽고 한 달 만에 유럽 전체로 확산되면서 종교개혁의 신호탄은 올랐다.
개혁의 본질은 질문과 소통에 있다
둘째 시사점은, 개혁의 본질은 억압적인 일방통행이 아니라 질문과 소통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과 비교해 개신교를 일컬어 ‘저항자’란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른다. 그때의 저항이란 폭력이 아니라, 질문과 소통을 앞세운 당당함을 가리킨다. 루터는 먼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는 수도사 시절 로마를 방문하여 무릎으로 고행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무릎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가운데 “과연 이런 고행으로 인간이 죄를 사하고 구원받을 수 있나”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 당시만 해도 그런 생각 자체가 불경스러웠다. 하지만 루터의 뇌리에 로마서 1장17절이 번개같이 스쳤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이었다. 루터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3대 종교개혁 원칙을 선언했다.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는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의 설명이다. “루터는 ‘나는 배우지 못한 민중에게 독일어로 설교하거나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을 결코 부끄럽지 않게 여긴다’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이는 거꾸로 ‘신학박사 학위를 지닌 사람이 속어를 사용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에라스무스가 지식인 사회의 최고 지성으로 꼽혔음에도 루터에 비해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개혁에는 헌신적인 협력자가 필요하다
셋째 시사점은, 개혁은 혼자서 할 수 없고 반드시 헌신적인 협력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텐베르크를 직접 가보면 종교개혁 과정에 필립 멜란히톤(1497~1560)이란 인물이 브레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시장 광장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고, 성채교회 안에도 루터와 멜란히톤의 무덤이 대칭으로 놓여 있다. 멜란히톤은 20대 초반부터 비텐베르크대학 그리스어 교수가 된 인문학의 천재로, 루터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1520년 루터가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자, 그는 루터와 함께 비텐베르크대 교수와 학생을 모아놓고 교황의 명령과 교회법, 스콜라철학의 작품, 그리고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가르침을 교리로 정리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고,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회의에 가서 카를 5세 앞에서 이를 낭독했다. 루터는 그를 매우 아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도구” 또는 “나의 가장 소중한 필립”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6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멜란히톤도 우연의 일치처럼 63세에 타계했다.
또 한 명의 헌신자는 바로 작센 지방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1463~1525)였다. 그는 현명하다고 해서 ‘현공(賢公)’이란 별칭이 붙었다. 1520년 레오 10세 교황은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밭을 짓밟고 있다”면서 마르틴 루터에 대한 파문을 예고하고 실행했다. 교황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시 신선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를 압박했다. 루터를 단죄하라는 것이었다. 1521년 4월 루터는 제국의회가 열리는 보름스로 소환돼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 앞에 섰다. 루터는 황제 앞에서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 주소서”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교회와 제국, 즉 성(聖)과 속(俗) 양쪽에서 버림받았다. 이제 누가 루터를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루터를 납치,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성으로 옮긴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3세였다. 그는 평소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에 분노하다가 루터의 행동을 보고 팬이 되었다. 그래서 부하들을 시켜 루터를 고이 ‘납치’하여 안전가옥으로 옮겼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융커 요크라는 가명을 쓰고 수염을 기르면서 위장 신분으로 살았다. 1521년 5월부터 10개월 동안 그는 라틴어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당시 독일어는 방언이 많았지만, 루터는 쉬운 독일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오늘날 표준 독일어를 정립하는 데 루터가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주거지도 지원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루터를 도와주었다.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의 저자인 안병억 대구대 교수는 “독일 역사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독일의 각 제후국은 ‘로마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독일어를 쓰는 제후국들의 정체성에 점차 변화가 생겼다. 자신들을 로마의 후예가 아닌, ‘하나의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로 여기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혁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넷째 시사점은, 개혁이란 완성품이 아니며 개혁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메시지는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로 방점을 맺는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한 번의 개혁으로 무언가 완성되었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루터는 95개 논제에서 연옥을 둘러싼 면죄부의 부당성을 비판했지만, 연옥 자체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후 루터는 연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언하고 연옥을 프로테스탄트 교리에서 삭제했다.
또 개혁자라고 해서 절대선(絶對善)이 아니며, 논란에 빠지고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아 1524년부터 1525년까지 농민들이 영주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독일 농민전쟁에 대해 루터는 처음 농민들에게 동정적이었다. 하지만 차츰 살인과 약탈이 심해지자 루터는 오히려 강경 진압을 주문했다. 이에 대한 루터의 입장 변화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태도도 논란거리다. 루터는 1523년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라는 논문에서는 유대인에게 친절한 대응을 강조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계속 거부하자 1543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언급했다. 훗날 히틀러는 이를 악용해 반(反)유대주의를 극대화하고 600만명 대학살에 나섰다. 아무리 탁월한 개혁가라도 사람인 이상 늘 실수하고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다. 루터 역시 자신이 종교개혁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필자는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한복을 입은 루터의 그림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화가인 조용진(74) 박사께서 루터하우스에 기증한 그림이라고 한다.
한복을 입은 루터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듯했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말씀’보다는 ‘오직 외형적 성장, 오직 목사직 세습, 오직 세상적 축복’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성경과 루터가 말하는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를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예배당 건물을 거대하고 화려하게 짓는 일을 ‘성전 건축’이라고 포장하는 교회가 있다. 또 재벌들의 변칙 승계작업을 흉내내어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온갖 무리를 하는 교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정의를 독점한 듯 교회와 사회를 개혁한다고 떠들지만, 속내를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오히려 무신론 계열의 사회주의 평등 이념에 더 집착하는 교회와 목회자도 있다. 한복을 입은 루터의 입장에서는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