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질학계의 거부로 끝나버린 ‘인류세’ 논란

2024-04-12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
인류세를 상징하는 그래픽. 지구에 인류의 지문이 깊게 새겨져 있다. photo environmentandsociety.org

지구의 지질시대를 연구하는 세계 지질학계가 우리가 사는 현세(現世)를 지질학적으로 ‘인류세(人類世)’라고 불러야 한다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국제지질학연합(IUGS)과 국제층서위원회(ICS)가 지난 3월 26일 공동으로 내놓은 결정문에 따르면 그렇다. 지질학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농업혁명이 일어났던 1만1700년 전에 시작된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의 ‘메갈라야절’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지질학계가 ‘인류세’의 완전 퇴출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IUGS는 인류세라는 용어가 ‘지구·환경과학자와 사회과학자·경제학자·정치인은 물론 대중에 의해서 앞으로 계속 사용될 것’으로 전망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여전히 인류가 지권(地圈)을 제외한 대기권·수권·생물권·외권 등의 지구계(地球系)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서술어로 남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사이언스’에는 “인류세는 죽었다. 인류세 만세”라는 기사가 실렸다.

 

대기·환경과학에 짓눌린 지질학 

‘지질학’은 단단한 고체로 된 지구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다. 땅을 구성하는 물질의 정체·구조·분포와 복잡하고 다양한 지질작용·변화를 연구한다. 지질학은 기체인 공기를 대상으로 하는 ‘대기과학’(기상학·기후학)이나 액체인 바다를 대상으로 하는 ‘해양학’과 대비되는 분야다.

지질학은 45억5000만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이기도 하다. 자갈·모래·진흙·화산재 등이 해저·강바닥·지표면에 느리게 쌓여서 만들어지는 ‘지층(地層)’을 연구하는 층서학(層序學·stratigraphy)이 역사학적 지질학의 핵심이다.

누대(eon)·대(era)·기(period)·세(epoch)·절(age)로 구분되는 ‘지질시대’가 바로 층서학의 결과다. 땅에서 느리게 일어나는 지질학적 변화를 근거로 하는 지질시대의 기본 단위는 최소 수만 년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질학적 ‘사건’이나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은 일상적인 지질학의 영역이 아니다.

‘인류세’ 논쟁은 층서학이나 지질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층권의 오존 구멍을 예측한 공로로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의 대기화학자 폴 크뤼첸에 의해 2000년에 본격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인류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을 고려해서 지구의 현재 상태를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층을 연구하는 지질학의 입장에서는 고작 200여년 전에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에 진행되고 있는 지질학적 사건을 엄밀하게 관찰·분석·확인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기와 물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운 변화가 땅에서는 훨씬 더 어려워진다. 더욱이 인공적인 매립지나 제한된 오염지역은 대부분 지질학에서 분석하는 지질시대의 일반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대상이 아니다.

결국 인류세 논란은 지질학자에게 몹시 당혹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마치 현재 진행 중인 정치적 현실을 포함한 현대사와 미래 전망에 대한 평가·분석을 강요받는 역사학자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UN이라는 국제사회의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 과속 질주하는 대기과학·기후학·생태학과는 사정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질학자들이 마지못해 인류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었다. ICS가 구성한 ‘인류세실무그룹(AWG)’의 논의도 지지부진했다. 10여년이 지나서야 지질학계도 인류세를 홀로세 다음의 지질시대로 편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잠정적 합의에 어렵게 성공했다. 2023년에는 인류세의 시작을 인류의 핵무기 실험이 본격화된 1950년대로 결정했고, 핵무기 실험에서 방출된 플루토늄 동위원소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소에서 배출된 구상(球狀) 탄소입자(SCP)를 인류세의 표지(marker)로 선정했다. 인류세를 대표하는 ‘국제표준층서구역’으로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크로퍼드 호수를 선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생대 제4기의 층서학과 연대학 전문가로 구성된 ICS 산하의 제4기층서학소위원회(SQS)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인류세는 결국 지난 2월에 개최된 SQS 소위원회의 표결에서 12 대 4로 부결되고 말았다. 표결 절차에 대한 이의 제기가 있었지만, ICS의 운영진과 소위원장들이 SQS의 의결을 압도적으로 승인해버렸다.

 

종말론으로 변질되는 인류세 

우리의 삶이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극심한 기아(飢餓)와 신분 차별의 봉건시대가 막을 내렸고, 민주·자유·평등·공정이 일상화된 산업화 시대가 시작되었다. 특히 기술 개발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식량의 부족을 걱정하는 토머스 맬서스의 종말론적 예언이 놀라운 설득력을 발휘했다.

특히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변화가 놀라웠다. 16억명이었던 인구는 80억명을 넘어섰고, 평균 수명도 31세에서 73.3세로 늘어났다. 인류의 총생산은 34배가 증가했고, 개인의 에너지 소비도 8배가 늘어났다. 100억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 능력도 갖췄다. 21세기의 인류는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건강하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편리하고, 민주화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공짜 점심이 없는 법이다. 인구의 증가와 삶의 질 향상에 따른 부작용도 심각해지고 있다. 식량의 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화학비료의 생산에 소비되는 에너지의 양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전 세계 전력의 1.8%가 요소 비료 생산에 소비된다. 새로운 사회·경제적 차별과 갈등이 심각해지고, 자연·생태·생활 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비겁하고 패배주의적인 종말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의 생존력을 강화해주는 기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인문·사회학·생태학적 전망이 특히 그렇다. 우리가 무분별한 과학기술에 의한 ‘위험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울리히 벡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1만2000년 전의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았던 수렵채취 시대의 인구는 400만명 수준이었고, 평균 수명은 17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이다.

어쨌든 오늘날 인류가 지구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인류세를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협하는 맬서스식 종말론으로 여길 수는 없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노력을 탐욕과 사치로 폄하할 수는 없다. 거칠고 위험한 야생(野生)에서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지켜줄 기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맹목적인 탈(脫)성장이 환경과 생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현실적 전략이 될 수 없다. 탈성장의 가장 확실한 수단인 인구 감소가 오히려 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인구 감소에 의한 지역·국가 소멸은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풍요로운 야만인’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착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