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의 그늘, 문학을 정치로 읽는 사람들의 ‘편가르기’

2024-10-19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지난 10월 10일 마츠 말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이 2024년 노벨 문학상이 한국 작가 한강에게 수여된다고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축하한다. 한국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도쿄 진보초간다(神保町神田) 근처를 걷고 있는데 뉴욕의 가족들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상반된 두 감정이 가슴속으로 밀려왔다. 마침내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기쁨, 작가 한강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일어났다.

매년 10월 발표되는 노벨상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아주’ 특별하다. 목을 매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지쳐 쓰러졌다고나 할까? 항상 언급되던 ‘노벨상 수상 가능 한국인 리스트’도 언제부턴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갔다. 한강 수상 소식은 그 같은 체념의 틈을 비집고 터져나온 국가적 대경사다. 오랜만에 듣는, 즐겁게 받아들일 행복한 뉴스다.

한강은 멀리 스웨덴 노벨위원회도 알아보고 주목한 작가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필자와는 거리가 먼 작가이자 작품이다. 한강이 출간한 소설 하나 읽은 적 없는 지적 태만이 부끄럽고 한심하다. 밤새 폭설을 깨끗이 치운 동네사람들을 접할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제설작업에 참가하기는커녕 눈이 내렸다는 사실조차 모른 출근길이다.

 

한강이 그려내는 ‘베이컨식 풍경’

노벨 문학상 수상을 반기는 한국인 모두의 축하 파티에 한참 늦게 참가했다. 곧바로 한강의 문학에 뛰어들었다. 디지털 온라인 시대다. 키워드 몇 개를 넣자 7달러짜리 구글 전자책이 펼쳐졌다. 한강의 대표작이라는 ‘채식주의자’가 포함된 2007년도 소설집이다. 1분 만에 다운로드한 뒤 정독에 들어갔다. 한강 작품에 대한 나름대로의 재미를 분석하면서 노벨 문학상에 오르게 된 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세계적 작가에 대한 예의, 아니 스스로의 지적 태만에 대한 반성이란 점에서 고3 대입 준비하듯 소설 구절 하나하나 줄을 그으며 꼼꼼히 읽어나갔다.

어둡고도 질퍽한, 뭔가 끈끈하고도 질긴 이물질 같은 것이 목구멍 안에서 우러난다. 고약한 냄새도 빼놓을 수 없다. 심장은 물론 두 눈과 귀를 점령한 뒤 어느 틈엔가 머릿속까지 스멀스멀 치고 올라온다. 20세기 중반 ‘구상화가(Figurative Painter)’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대하는 심정이랄까? 피로 점철된 고깃덩어리가 소설 곳곳에 펼쳐진다. 비유나 상황 설명을 위한 ‘베이컨식 풍경’이라 보며 참았지만, 결코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다. 창문 하나 없는 ‘베이컨 갤러리’의 지하 좁은 방에 갇힌 느낌이다. 신선한 표현과 흥미로운 비유가 소설 곳곳에 넘친다. 그러나 금이 가고 갈라진 종(鐘)의 비명이 가슴속에 울려퍼진다. 어둡고 창백하고 무섭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마지막 장까지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뒀다. 나름 문학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에서 한강 문학을 끝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고도 깊은 한강 문학에 대한 필자의 이해력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일 듯하다. 그러나 베이컨 갤러리에 갇혀 입을 벌린 채 울부짖는 교황 얼굴을 쳐다볼 자신도 없다. 더불어 필자가 생각하는 문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감히 노벨상 작가의 글을 ‘중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강 작품만이 아닌, 문학 전체를 대하는 기본자세의 차이일 수도 있다. 글을 읽을 때 ‘어디, 어떤 부분에 주목하는가’라는 점이다. 이는 각자의 세계관과 문학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필자의 개인적 판단이지만, 글을 읽는 ‘재미’가 핵심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재미는 문학 스토리를 감동, 나아가 공감으로 연결해주는 과정이자 흔적이다. 필자의 주된 문학관이지만, 재미 없는 소설은 일단 관심 밖이다. 신과 우주 나아가 다빈치를 다루는 얘기라도 재미가 없으면 중간 포기다. 아무리 싸구려 삼류 연애소설이라도 재미있다면 이어나갈 수 있다. 오해하기 쉬운데, 필자가 생각하는 재미는 감각적 차원의 흥미와 무관하다. 영어로 ‘Fun’이라고 하면 웃고 즐기는 것으로 번역된다. 50% 정도 정확한 번역일 뿐이다. ‘Fun’의 의미 속에는 어떤 문제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도우미’나 ‘길라잡이’로서의 재미라는 의미도 있다. 미국 교육을 ‘Fun’이라 말하지만, 웃고 떠드는 것이 아닌 어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연결해주는 ‘계기로서의 재미’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신과 우주를 다루는 소설이라도 신과 우주에 다가가도록 도와줄 ‘재미’가 없다면 무능하고 무효한 작품일 뿐이다. 재미는 많은 사람들을 고전문학에 몰두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 장에 손을 대는 순간, 그대로 빨려 들어간다. 원대하고 고상한 생각 이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재미’ 여부가 중요하다. 역사, 정의, 진리 전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길로 이끌 재미가 우선이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적 권리

필자는 한국인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에 감격하고 환호한다. 그러나 재미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강 소설은 필자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다음 페이지에 어떤 얘기가 담겨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지 않았다. 베이컨의 피냄새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360도 꽉 찬 꽃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꽃과 꽃 사이의 여백과 푸른 하늘도 보고 싶다. 필자가 한국문학에서 멀어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분단, 해방, 이념, 좌우, 반미, 반일에 관련된 테마가 대세다. 이념이나 역사도 좋지만, 필자의 관심을 끄는 영역은 영혼이나 초현실을 다루는 이세계심령(異世界心靈) 소설이다. 이념·역사 문학은 30여년 전 대학 재학 당시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임을 위한 행진곡’뿐만 아니라 발라드도 듣고 싶다.

노벨위원회는 한강 선정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란 점에 두고 있다.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5·18이 한강 문학의 원점이란 식으로 표현한다. 작가로서, 시대정신에 투철한 지성인으로서 정치·사회적 사건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주4·3사건, 5·18민주화운동은 같은 피를 나눈, 같은 체제하에서 살아간 한국인 사이에서 벌어진 시대의 비극이다. 정치적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비극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고, 작가 한강은 그 같은 문제를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5·18이 한강 문학의 중심이 됐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강 문학 그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적 자유이자 독자로서의 권리다. 천하의 셰익스피어 문학이라도 독자 흥미에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유대인 샤일록을 냉혈한으로 묘사하면서 반유대주의자라 비난하든 말든, 내가 좋다면 가까이할 수 있다. 반유대인으로 몰면서 셰익스피어 분서갱유로 나가는 것은 문학이 아닌 정치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친유대, 반유대를 떠들기 이전에, 나의 흥미와 세계관이 문학의 기반이자 출발점이다. 대하소설이 아니라, 나만의 세계를 다룬 사적(私的)소설이 21세기 문학의 대세다. 노벨상 수상 소식에 환호는 하지만 한강 문학에 대한 호감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한국 문화풍토를 상징하는 모델이 될 듯하지만, 요리경쟁 프로그램조차 흑백으로 나눠 즐긴다. 흙수저 금수저를 대신해 흑수저 백수저란 표현을 쓰지만, 성공한 미쉐린 스타 요리사와 아마추어 요리사 사이는 흑백으로 분명히 나눠져 있다. 중간의 회색 수저는 처음부터 없다. 한강 수상 발표 이후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편가르기’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한강 작품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어느 틈엔가 우파 지지자로 분류되는 듯하다. 청소년 유해도서로 지정한 교육위원회는 반문명·반문화, 나아가 꼰대의 상징으로 지탄받고 있다. 반면 한강 작품을 지지하고 좋아할 경우 뭔가 진보적이고 깨인 사람으로 평가되면서 더불어민주당 색깔로 장식되는 듯하다. 한강 작품을 문학이 아닌 정치로 보기 때문에 생긴 오해, 왜곡, 과장일 뿐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러하듯, 한강은 정치·이념이 아닌 문학에 모든 것을 건 문학가다.

서브 수상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 위부터 튀르키예의 오르한 파묵, 오스트리아 출신 페터 한트케, 노르웨이 작가 존 포세.photo 유튜브

편가르기가 만들어낸 ‘반쪽’ 수상자들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편가르기 논란이 한국에서 일고 있지만, 최근 노벨 역사를 보면 너무도 일상적 풍경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수상자 발표 후 나타나는 편가르기 현상은 새삼스러운 사안이 아니라는 의미다. 특히 평화상이 문제지만, 21세기 들어서부터는 문학상도 편가르기 논란의 영역에 들어간다. 노벨이 선정한 문학상 수상자들 가운데 자국에서조차 인정을 못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학상 수상자들 가운데 21세기 들어 편가르기 대상이 된 ‘반쪽’ 작가 3명을 살펴보자.

먼저 202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존 포세(Jon Fosse)가 떠오른다. 오랜 기간 노르웨이 문학에 공헌한 인물이지만, 전체 인구의 10%만이 사용하는 신(新)노르웨이 언어에 기초한 글이란 점에서 노르웨이 문학계가 반발한다. 노르웨이 인구는 약 550만명 정도다. 존 포세가 쓴 작품 속 언어는 인구의 10% 정도만이 이해한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50만명만 이해할 희귀한 언어로 쓰인 작품이 노벨 문학상 대상에 오른 셈이다. 아무리 세계적 싱어송라이터 스타라고 하지만, 가수인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뽑은 것에 준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노르웨이는 물론 유럽 전체 문학계에서 편가르기 현상이 나타났다.

2019년 수상자인 오스트리아 출신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도 편가르기 중심에 선 인물이다. 현재 오스트리아 우익정권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문학가로도 평가되지만, 기독교 국가인 세르비아 보스니아 군의 이슬람신자 집단학살을 지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한 부분이 많겠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기독교 호위무사 격인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적들을 양산한다.

2006년 수상자인 튀르키예 출신 오르한 파묵(Orhan Pamuk)도  편가르기 대열에 들어선 ‘반쪽’ 작가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아르메니아와 쿠르드족 문제에 관한 입장과 관련해 튀르키예 내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 튀르키예인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는 주장을 펴면서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튀르키예 최초의 문학상 수상자이지만, 필자 판단으로는 튀르키예인 80% 정도는 파묵을 무시한다. 에르도안 정부에 반대한다고 해도 아르메니아 쿠르드 문제에 관한 튀르키예인의 입장은 어느 정도 통일돼 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옳고 그르고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튀르키예 지식인에겐 지성의 상징이지만 튀르키예 일반 국민이 보면 분서갱유 대상일 뿐이다.

전 세계를 굳이 나누자면 상을 주는 나라와 상을 받는 나라로 이분할 수 있다. 한국은 상을 받는 데 익숙한 나라다. 한국인 수상 뉴스는 한국 신문·방송의 일상적 메뉴 중 하나다. ‘세계적 권위와 격찬’이란 문구와 함께 한국인 수상자 소식이 거의 매일 터진다. 노벨상은 1901년 스웨덴인 노벨이 만든 상이다. 따라서 스웨덴 노벨위원회가 상을 주는 위치에 서 있다. 요즘 세계관으로 보면 갑의 자리다. 21세기 논리지만, 갑이라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124년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벌 절대권위라 해도 도덕·윤리·정의와 무관한 사람들로 구성될 경우 지탄의 대상이 된다. 

상의 권위만이 아니라, 상을 주는 구성원과 조직의 정통성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반대 사건이 2018년 발생한다. 스웨덴은 물론 유럽 지성계가 깜짝 놀란 섹스 스캔들이 터진다. 스웨덴 아카데미 종신회원으로 있는 여성학자의 남편이 저지른 사건이다. 남편이 행한 2개의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여성은 사임한다. 남성이 사전에 유출한 노벨상 후보 리스트가 원인이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노벨위원회를 움직이는 사실상 상부조직이다. 간단히 말해 스웨덴 아카데미가 수상자를 결정할 뿐, 노벨위원회는 1년 이상 걸리는 실무업무에 집중하는 조직이다. 아카데미 회원 여성이 노벨 수상정보를 미리 알고 남편에게 전해주면서 후보자 리스트가 유출된 것이다.

이후 노벨위원회 내부 갈등과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남성 중심이던 회원 구성 비율이 한순간 바뀐다. 노벨위원회 위원장도 여성으로 바뀌고, 여성회원 확대도 이뤄진다.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폴란드 출신 여성작가가 탄생한 것도 그 같은 내부 변화의 결과다.

 

한강의 한글 수상 소감을 기대하며 

앞서 강조했듯이, 노벨 평화상과 문학상은 편가르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선정과정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문학상을 예로 들어보자. 얼마나 뛰어난 문학작품이냐도 중요하지만 지역·언어·나라·문화·인종·성별도 중요하다. 바로 다양성으로서의 문학상이다. 일본은 일본계 영국인을 포함할 경우 문학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한 나라다. 매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수상자 리스트에 오르내리지만, 이미 3명의 일본 수상작가가 탄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능하다는 전망도 많다. 아시아만 해도 문학상을 기다리는 나라가 긴 줄로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문학상 수상 문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언급되던 예상된 수순이기도 하다. 21세기 들어 나타난 현상이지만 노벨위원회는 현지의 공기를 적극 반영한다. 다양성 확보를 통한 책임분산이다. 필자 판단이지만, 대략 선정 자료의 50% 정도는 현지 반응에 따른다. 한강 수상은 노벨위원회와 더불어 한국 문단의 결정이라는 측면도 분명 있다.

오는 12월 10일 노벨상 수상식에서 한강의 한글 수상소감을 들을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자랑스럽게 지켜볼 현장이다. 한강 자신만이 아니라 한글로 표현된 한국문학 전체를 대변하는 인사이자 축사가 되길 기원한다. 한강 수상소식에 다시 한번 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