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위해 모국 등진 4명의 일본인 이야기
나치의 학살 당시 유대인을 도왔던 독일 사람 오스카 쉰들러처럼 우리를 도운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등졌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에 연대했던 일본 시민들 이야기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며 목숨을 잃을 뻔했다. 조선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인들에게 더 큰 미움을 받았다. 자신의 민족과 맞서 싸우고 국가로부터 배척받았다는 점에서 그 고통의 뿌리가 달랐다. 이들은 조선에서는 동지였지만, 일본에서는 배신자였다. 일본 사회는 당시 이들을 ‘비국민’으로 낙인찍었다. 광복 이후에는 아무도 그 이름들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일본인은 단 두 명뿐이다.
광복 80년, 한·일 수교 60년을 맞아 주간조선은 교육·법조·노동 등 각기 다른 현장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일본 시민 4명의 삶을 조명한다. 이들을 기리고 선양하는 일은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과 정당한 역사 평가를 촉진하고, 양국의 화해를 이끄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들은 편하게 침묵하며 살 수 있는 길을 거부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다른 사람의 존엄을 지켰다. 그 선택은 국적과 경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무엇이 보편적 정의이고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기사의 내용은 지난 7월 22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본 시민 서훈 현황과 발굴 서훈의 당위’ 토론회 내용(연구 및 발제자 :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창덕 국민문화연구소 회장, 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교수, 강창일 전 주일대사)을 편집해 재구성했다. 토론회는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시민모임 독립(이사장 이만열, 대표 박덕진)이 공동주최했다.
조선일보에 관동대학살 사죄 성명 발표
‘박열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1880~1953)
1900년대 초 일본 도쿄의 한 형사법정. 검사가 피고인석에 앉은 한 노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모는 생활고 끝에 아들과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혼자 살아남았다. ‘살인미수’로 기소된 그 노모를 바라보며 검사의 마음속에는 다른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게 과연 정의인가?” 훗날 ‘일본인 쉰들러’라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검사직을 내려놓고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계기다. 그가 서게 될 법정은 더 이상 제국의 권력을 대변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후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사회적 약자가 그의 새로운 ‘의뢰인’이 됐다.
일본 미야기현 오시카군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후세는, 1894년 청일전쟁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한국군을 추격했는데, 일반 백성뿐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부터 제국주의 전쟁에 회의를 품었다. 메이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검사로 임용됐지만, 한 노모의 살인미수 사건을 거치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9년 그는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백관수 등 조선인 9명의 ‘출판법 위반 사건’을 변호하며 본격적으로 조선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들을 대신해 조선총독부 산하 법정에 서서 “체코 독립은 지지하면서 왜 조선 독립은 막는가?”라는 질문으로 재판부와 맞섰다. 1920년에는 “앞으로는 사회개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건만 맡겠다”며 ‘자기혁명의 고백’을 발표, 변호사의 사명을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결합시켰다.
후세는 박열·가네코 후미코 사건의 변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일왕 폭살을 기도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며 일본 정부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의 진실규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이 밖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관동대학살을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한다”고 썼다.
1927년에는 박헌영이 연루된 조선공산당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이끌어냈고,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혹독한 고문 실태는 국제적 비난을 불러왔다. 일본의 패전 이후에도 그는 새로운 평화헌법을 확산시키고, 미 군정과 일본 정부의 횡포로부터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지키는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박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후세는 1946년 박열의 요청으로 ‘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를 집필하고, 그의 투쟁을 정리한 ‘운명의 승리자 박열’을 출간했다. 이후 그는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후세 다쓰지 선생의 투쟁심은 조선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독립·평화·평등·호혜의 정신에 의거한 참 정의를 사랑하는 선생의 세계관에서, 용솟음치는 인류애에서 나왔다. 타민족의 기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자민족의 독립이나 인권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애국자를 도운 선생에 대해, 또 일본의 독립을 위해, 일본 인민의 기본적 인권 옹호를 위해 싸워온 선생에 대해 우리는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1949년 11월 일본 도쿄 ‘후세 다쓰지 탄생 70주년 기념 인권옹호 선언대회’ 중)
“교사가 각성해야 조선 독립한다”
조선인 교사 계몽운동 죠코 요네타로(1908~1987)
후세 다쓰지가 민중의 변호사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1920년대, 일본 시코쿠 출신의 청년 죠코 요네타로(上甲米太郞)는 처음 조선 땅을 밟았다. 가난한 지주 가문 출신인 그는 생계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경남 함안의 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그에게 조선의 아이들은 단순한 ‘학생’이 아니었다. “페스탈로치처럼 가난한 아이를 따뜻한 마음으로 가르치겠다”며 시작한 교직 생활은 잠깐의 순수와 젊음의 시기를 거쳐 곧 식민지 조선의 불평등과 마주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가 처음 부임한 학교에는 조선인 지방 유지나 교육에 눈뜬 진보적인 사람들의 자제가 많았다. 학생들은 12~13세에서 20세까지 다양했으며, 죠코와 동갑이 몇 명, 기혼자도 2명 있었다. 죠코는 이때 김재용이라는 조선인 여학생과 첫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성적이 좋고 귀여운 아이’를 대상으로 매일 수업했다는 그는 나중에 당시를 회상할 때 “인생 50년의 생애에서 이 학교에서 보낸 두 해만이 남는다면 그 뒤의 일은 없어지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교원양성소에서 조선어를 배운 죠코는 조선어로 수업을 가르치고, 조선인 집에서 기거했다. 죠코는 자신의 월급 대부분을 밥을 굶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데 썼다. 이 때문에 학교에는 죠코가 밥을 짓는 데 쓰기 위해 걸어놓은 큰 솥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은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됐다.
“매서운 현실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 1928년 쓰인 그의 일기 속 문구처럼, 그는 교사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했다. 그 당시 일본에서 ‘신흥교육’의 발간과 교원조합 준비회가 발족된 사실을 알게 된 죠코는 이 책의 배포를 통해 동지를 규합하고 실천운동에 나서고자 했다.
그 최종 목표는 조선 독립이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의 투쟁”으로 “조선의 교사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고 일본인 교사들과 함께 그는 투쟁을 다짐했다. 조선인 아이들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농민의 연대 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신흥교육연구소가 주도한 교원노동자조합의 조선 지국을 조직하기 위해 함께 일할 조선인 교사 포섭 활동을 하던 죠코는 1930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교원공산당 사건’으로 불린 이 일로 검거된 이후 그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2년간의 구치소 생활은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과 식민지의 모순된 현실에 대한 죠코의 인식을 더욱 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갇힌 감방은 원래 독방이었지만 당시는 이른바 ‘간도폭동사건’으로 여러 명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었다. 그가 수감된 2년 전후로 그는 5명의 조선인 동지들과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구치소에서 만난 조선인 운동가들로부터 배움을 통해 그의 사상은 확고한 기반 위에 자리 잡게 되었다.
반제국주의 투쟁과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에 대한 사상으로 무장한 그는 출옥 이후 생활고로 가족의 생계 방편을 마련하느라 남도 일대를 떠돌며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제자였던 조판출을 비롯한 동지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교류하였다. 그러나 생활의 고단함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군수산업인 탄광의 조선인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단순한 취업이 아니라 일제의 전쟁 동원을 위한 조선인 강제노동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전쟁 수행에 동조한 혐의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시선도 있다. 이 자리는 이른바 사상범 죠코의 출옥 이후를 감시, 통제하던 특고(특별고등경찰)가 주선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가 추진하는 전시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죠코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 그는 자신을 옥죄던 통제, 감시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살포하다가 자신을 대신하여 장남인 이라이치(伊利一)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종전 후에도 그림 연극집, 날품팔이 노동자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조선인과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한 시민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도쿄로 활동 무대를 옮겨 시민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조협회에 가입하여 일본과 조선의 우호 증진을 위한 활동을 했고, 일조학원 강사로 조선어를 가르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와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는 다양한 운동에 적극 앞서다가 1987년 8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조선에 사는 60만 일본인 중 유일한 ‘비국민’
노동운동가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7)
1930년대 함안의 교실에서 죠코 요네타로가 ‘조선의 아이들은 조선어로 배워야 한다’고 외치며 체포되던 때에, 흥남의 한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적기가’를 나눠 부르며 연대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이소가야 스에지(磯谷 季次)는 일본 시즈오카의 가난한 다리지기 집안의 10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목재상, 자동차 조수, 막노동을 전전하며 방랑하다 1920년 징병으로 조선에 왔다. 흥남에 배치돼 강제노동에 가까운 군복무를 마친 뒤, 과수원을 가꿀 꿈을 잠시 품기도 했으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에 결국 다시 취직했다. 그곳은 ‘살인공장’이라 불릴 만큼 혹독한 환경이었다. 유황 가스와 분진 속에서 주야 3교대에 시달리던 그는 조선인 노동자들과 가까워졌고, 주선규·송성관 같은 조선인 노동운동가를 만나 급진적으로 변했다.
16세 소년공 시절,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이유 없이 학살당한 것을 목격했던 기억은 그의 의식을 더욱 각성시켰다. 그는 조선과 일본 노동자의 연대를 꿈꾸며 좌익노조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다시 태어났다”고 회고했다. 차별과 폭력이 일상인 식민지 현실은 그에게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다. 1932년 4월 공장 기숙사에서 금지곡 ‘적기가’ 악보를 복사·배포하다 5월 1일 새벽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으로 체포됐다. 이때 함께 검거된 노동자는 500여명이었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는 사상범으로서 가장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일본인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동지애를 나눴는데, 간도공산당 사건 사형수 이동선과 주고받은 동지애는 지금까지도 회고된다. 동지들이 전향해 출옥할 때에도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소가야는 일본인 사상범에서 전향하지 않고 형무소 생활을 마친 유일한 사례가 됐다. 형무소 공의, 사단장 등 일제는 그를 “조선에 사는 60만 일본인 중 유일한 비국민”이라 불렀다.
광복 후 그는 옛 동지들과 함께 일본인의 안전 귀환을 도왔고 1947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소학교 수위, 야간경비, 페인트공을 전전하며 살아갔지만 조선과 한국, 갈라진 한반도에 대한 애정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평생 놓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북한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북한에서 함께 활동했던 옛 동지들의 숙청, 권력 세습을 목격하며 김일성 체제에 깊은 의구심과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 활동에 관심을 보였고, 북한이 인민을 위한 민주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장문의 ‘유서’를 쓰기도 했다.
이때 그의 시선은 일본 사회에도 향했다. 귀국 후 다수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전쟁 피해만을 강조하며 조선인을 가해자로 인식하는 ‘기억의 역전’을 비판했다. “대다수 일본인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의 결과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할 수 있었을까. 오로지 한결같이 자신들이 맞닥뜨린 고난에 휘둘려서 어떤 사람은 조선 민족이 마치 가해자인 듯이 생각하여 증오심을 품고서 조선을 떠난 건 아니었던가.”
그가 남긴 기록 ‘우리 청춘의 조선’ ‘식민지의 감옥’ 등에서 “나는 조선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고백이 여러 차례 발견된다. ‘차별받는 이들과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살게 됐다’는 의미다. 생의 끝까지 그는 일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과 속죄를 촉구했다. 1991년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사형장을 돌아보며 “죽은 자에 대한 사과와 위령, 위안부 문제를 ‘이미 끝난 문제’로 덮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선인 숨겨줬다 고물상으로 연명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1900~1975)
“바싹 마른 체형, 희고 지적인 분위기… 조선에서 일본인,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있던 사람이 사상사건으로 투옥된 일은 드문 사건이었다.” 이소가야 스에지가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수감 중인 때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 鹿之助)를 관찰하며 그는 이렇게 썼다. 따로 또 같이, 조선의 편에 섰던 두 일본인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동시대의 사상범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미야케가 체포된 건 이재유라는 조선인을 집 안 깊숙이 숨겨줬기 때문이었다. 이재유는 1930년대 초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함흥·흥남 등 공업지역의 노동자 조직과 경성제대 학생운동을 연결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소가야 스에지 같은 일본인 공장노동자가 참여한 좌익노조 운동과도 같은 진영에 있었다. 따라서 미야케가 이재유를 숨겨준 일은 단순한 개인적 호의가 아니라, 당시 조선 좌익 노동운동의 지도부를 직접 보호한 사건이었다.
본래 미야케는 오사카 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1927년 경성제대 조교수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관심은 학문에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빈곤과 차별을 직접 목격하며 ‘지배자의 시선’은 흔들렸다. 1929~1931년 유럽 유학길에서는 베를린의 반제 그룹과 교류했고, 귀국 후에는 조선사정연구회를 지도하며 학생·졸업생들과 사회과학 독서회를 열었다. 전환점은 1933년 말이었다. 경성제대 학생 정태식의 소개로 이재유를 만난 그는, 공장 노동자 중심의 운동 재건과 전국 정치신문 발행 등 장기 노선을 논의했다. 이듬해 4월 경찰 추적을 피해 달아난 이재유가 관사로 숨어들자 미야케 부부는 응접실 다다미 밑을 파 굴을 만들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38일 동안 그곳에서 방침서를 함께 다듬으며 토론했다.
그러나 1934년 권영태·정태식 등이 잇달아 체포되면서 그 역시 검거됐다. 처음엔 이재유 은닉 사실을 숨겼지만, 하루를 벌어 도주 시간을 주고 다음날 자백했다. 같은 해 1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경성제대 교수로서 사상사건으로 투옥된 유일한 사례였다. 이때 미야케와 이소가야, 그리고 이재유는 같은 서대문형무소에 있게 된다.형무소에서 그는 제자 출신 간수의 배려로 중간식과 화초 재배 작업을 받았지만, 특고의 감시는 풀리지 않았다.
옥중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난해함과 자신의 한계를 언급하며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광복 후에도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이 남았다. 그러나 조선에 10년도 머물지 않았던 그가 이재유를 숨겨줬다는 사실만으로 평생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몰락과 불행을 감수해야 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수감 중에도 그의 가족은 경찰 감시를 받았고, 아내는 생계를 위해 서점을 운영하며 버텼다. 1936년 말 가출옥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특고경찰의 감시 속에 고물상, 신문판매점, 버섯재배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전후에는 교육계로 복귀해 단기대학 학장과 여러 대학 강단에 섰다. 말년에는 자신이 모은 책을 도호쿠대학에 기증하며 조용히 생을 마쳤다.